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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탈리아 자연철학자

2.2. 계보

2.2.3. 르네상스 이탈리아 자연철학자

영국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저명한 고중세과학사가 앤드류 그레 고리(Andrew Gregory)는 르네상스기를 이후의 과학혁명기와 구별되는 독특한 성격의 시기로 파악한 바 있다. 그가 특징짓는 르네상스기에서는, 학습과 발견에 대한 적극적인 낙관주의가 팽배했고, 과학혁명에서와는 달리 고대의 전통을 통째로 거부하거나 모든 것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 으며, 만물박사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았다.225) 이러한 맥락에서 파라 켈수스는 르네상스적 인간상에 잘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세계의 무한성, 정신과 자연의 통일, 개체의 해방으로 요약되는 르네 상스 철학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로부터 출발하여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에 의해 종합되 었는데, 파라켈수스는 이들 둘 사이의 징검다리 위치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226) 파라켈수스를 ‘독일적인’ 철학자로 이해했던 에른스트 블로흐의 관점과는 달리, 실제로 파라켈수스가 깊게 영향을 받았던 사상가들은 이 탈리아 자연철학자들이었다. 이는 그의 북부 이탈리아 유학 경험과 무관 치 않은데, 르네상스 초기 의학 분야에 기여했던 인문주의자들은 북부

223) 브루스 모런, 『지식의 증류』, 56.

224) 헨리 레이시스터, 『화학의 역사적 배경』, 118-119.

225) 앤드류 그레고리, 『과학혁명과 바로크문화』, 박은주 역 (서울:

몸과마음, 2001), 43.

226) 브루노,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22-23. 다음의 고전적인 연구 를 참조하라. 폴 크리스텔러, 『르네상스 사상과 그 원천』, 진원숙 역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1995).

이탈리아의 대학에서 공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 지역은 새로운 사상 조류에 개방적이었고 코스모폴리탄을 지향했기 때문에 유럽의 인재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공부한 의사들은 물리학과 천문학에 정통했 고, 마법과 점성술에 지속적인 흥미를 가졌다.227) 파라켈수스도 페라라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플라톤주의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의 전통 을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228)

파라켈수스의 자연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두 명의 이탈리아인 은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와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였다. 파라켈수스는 피치노야말로 최고의 의사라고 칭송했던 바 있다.229) 피치노는 일찍이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462년 피렌체(Firenze)에서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했으며, 플라톤의 대화편과 플로티노스(Plotinos) 의 신플라톤주의 저술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다. 당대에 플 라톤을 새롭게 해석하는 틀이었던 헤르메스주의의 경전 『코르푸스 헤르 메티쿰(Corpus Hermeticum)』을 번역한 것도 피치노의 성과였다. 파라 켈수스는 피치노로부터 두 가지의 측면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 다.230) 하나는, 성서 및 그리스도교를 플라톤 철학을 조화시킴으로써 새 227) 앨버트 S. 라이언즈 & R. 조지프 페트루첼리. 『세계의학의 역 사』, 363; 움베르토 에코 & 리카르도 페드리가,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2』, 윤병언 역 (파주: 아르테, 2019), 55. 이탈리아 대학에서는 신학이 비교적 늦게 발전했고 제한된 영역에서만 영향을 끼쳤던 대신에, 자연주의적이고 이 성주의적인 사고방식이 확산되었다.

228) 파라켈수스가 둔스와 신플라톤주의 전통을 접했던 과정에 관하여 는 Henry M. Pachter, Paracelsus, 제3-4장을 참조하라. 움베르토 에코 &

리카르도 페드리가,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2』, 48. 북이탈리아를 예외로 두고서, 서유럽 대학의 교육 과정에서 양적으로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압도하고 있었다. 플라톤이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교육된 것은 16세 기 말에 가서야 가능했다.

229) Hus. 7: 264. “Et fuit egregius Medicus Ficinus.” 파라켈수스의 피치노 사상 수용에 관하여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Ingo Schütze, “Zur Ficino-Rezeption bei Paracelsus,” in Parerga Paracelsica: Paracelsus in Pergangenheit und Gegenwart, ed. Joachim Telle (Stuttgart: Steiner, 1991), 39-44.

230) Hiro Hirai, “The New Astral Medicine”, 268. 파라켈수스는 피치

로운 세계관을 확립해야 하며 그 목적은 인간의 갱신에 있다는 가르침이 다.231) 또 하나는, 마법과 점성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이다. 피치노에게 마법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자연 사물 속에 담겨 있는 신적인 미덕을 포착하여 일으키는 행위이며, 그것의 힘은 사물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통해 드러난다.232) 파라켈수스의 핵심 사상 중 하나였던 사물의 서명 이론은, 하늘의 힘이 지상에 작용한다는 피치 노 사상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233)

한편으로, 파라켈수스는 피코의 급진적 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 다. 파라켈수스가 태어나기 15년 전에 페라라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 던 피코는, 1486년에 쓴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Oratio de hominis dignitate)』을 통해 인간론을 펼쳤다. 여기서 피코는 인간을 “위대한 기 적”으로 칭하면서,234) 이후 파라켈수스의 호문쿨루스 레시피를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의 중요한 단서를 제시했다. 첫째, 인간(아담)은 신과 동물 사이에 놓인 중간자적 피조물의 지위를 갖지만, 또한 자유의지를 가진 덕분에 스스로의 선택으로 능히 창조의 행위를 할 수 있다.235) 둘째, 인 간은 피조물의 세계를 초월하여 신적인 영역으로 수직 상승할 자유를 지 닌 존재이다.236)

노의 저작 『삶에 관한 세 권의 책(De vita libri tres)』을 잘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231) 움베르토 에코 & 리카르도 페드리가,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2』, 91-92.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는데 다음의 논문이 유용하다. 송유레, “왜 플라톤을 번역하는가? 르네상스 플라톤주의자 피치노의 대답,” 「인문논총」

72 (2015): 367-400.

232) Nicholas Goodrick-Clarke, Paracelsus: Essential Readings, 25.

233) 프레드릭 코플스턴, 『후기스콜라 철학과 르네상스 철학』, 이남원 역 (성남: 북코리아, 2021), 288. 그러나 피치노와는 달리 피코는 마법과 점성 술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234) 피코 델라 미란돌라, 『피코 델라 미란돌라: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 성염 역주 (파주: 경세원, 2009), 13. “mgnum miraculum est homo!”

235) 피코 델라 미란돌라,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 17. “오 아담 이여, …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어느 면모를 취하고 어느 임무를 맡을지는 너의 희망대로, 너의 의사대로 취하고 소유하라. … 이는 자의적으로 또 명예 롭게 네가 네 자신의 조형자요, 조각가로서 네가 원하는대로 형상을 빚어내 게 하기 위함이다”(5,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