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인간복제의 꿈
6.2.2. 파라켈수스의 후예들
17세기 서유럽 의학은 세 가지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출발했다. 그것 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갈레노스주의, 파라켈수스주의였다.572) 아리스 토텔레스주의는 눈에 띄게 쇠퇴하고 있었고, 갈레노스주의는 도전자인 파라켈수스주의와 헤게모니 싸움을 벌였다. 주로 식물 약재에 의존했던 갈레노스주의 의사들과는 달리, 파라켈수스주의 의사들은 광물과 금속을 약재로 사용하는 요법을 대중화했다. 파라켈수스주의자들의 의화학은 연 금술이란 이름을 벗어버리고 화학(chymia)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의화학 자는 점차 연금술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의화 학자는 의사이거나 의사와 일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573)
파라켈수스주의가 확장되던 무대는 유럽 전역이었지만, 가장 치열한 격전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는 안티모니(antimony) 금속 화합물의 사용 여부를 두고 파라켈수스 추종자들과 전통적인 갈레노스주의자들의 싸움이 벌어졌다. 새로운 화합물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처방에 사용하는 의사들이 늘어나자, 파리 대학은 이를 법으로 금지하고 나섰다.574) 금속 571) 본 논문의 6.2.3에서 소개하는 파라켈수스주의자들의 면면은 파라 켈수스에 관한 주제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방대하다. 여기서는 결론을 위한 실마리를 제시하는 데 그치는 대신, 별도의 후속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572) 앨버트 S. 라이언즈 & R. 조지프 페트루첼리, 『세계의학의 역 사』, 421.
573) 휴 W. 샐츠버그, 『화학의 발자취』, 165, 183-184.
화합물 사용에 적극적이었던 대표적인 인물은 프랑스 국왕 앙리4세의 주 치의였던 조셉 뒤센느(Joseph Duchesne, 1544∼1609)와 드 메이에른 (Theodore Turguet de Mayerne, 1573∼1655)이었다. 드 메이에른은 파 라켈수스의 약을 처방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제임스1세의 주치의가 되었다.575)
덴마크 출신의 의사 페트루스 세베리누스(Petrus Severinus, 1542~
1602)는 초창기의 대표적인 파라켈수스 추종자로서, 역시 대표적인 비판 자였던 에라스투스의 논적이었다. 그는 1571년 저작 『철학적 의학의 개 념(Idea medicinae philosophicae)』에서 파라켈수스의 질병관을 해석하 여 전달함으로써, 스승의 사상이 의학 전통 내에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 들의 관심을 얻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576)
독일의 대표적인 파라켈수스주의자는 오즈발트 크롤(Oswalt Croll, 1580∼1609)이었다. 그의 1609년 저작 『화학의 구조(Basilica Chymia)』
는 파라켈수스의 처방과 치료요법을 소개했다.577) 같은 해에 요한 하르 트만(Johann Hartmann, 1568∼1631)은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 에서 유럽 최초로 시도된 ‘키미아트리아’ 강좌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는 파라켈수스주의자가 대학에 진출한 첫 사례였다. 하르트만의 강의는 아 리스토텔레스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의화학의 대중적인 확산에 기여했다.578) 이처럼 파라켈수스주의 의사들은 여전히 소수였지 만 갈레노스주의 의사들보다 더 나은 약을 만들고 처방한다는 평판을 얻 음으로써 유럽 각국의 궁정 및 상류사회로 대거 진출할 수 있었다.579)
574) 존 엠슬리, 『세상을 바꾼 독약 한 방울 1: 죽음을 부르는 독극물 의 화학사』, 김명남 역 (서울: 사이언스북스, 2010), 21-22.
575) Allen Debus, The French Paracelsians, 48-59. 프로테스탄트 친 화적이었던 앙리4세의 등장은, 프랑스에서 파라켈수스주의 의사들의 활동이 증가하는 배경이 되었다.
576) Joel Shackelford, “Early Reception of Paracelsian Theory:
Severinus and Erastus,” The Sixteenth Century J ournal 26 (1995): 125- 126. 577) 브루스 모런, 『지식의 증류』, 155.
578) 로런스 M. 프린시프, 『과학혁명』, 노태복 역 (파주: 교유서가, 2017), 142-144.
579) 유럽 궁정사회에 진출했던 파라켈수스주의 의사들에 관하여는 다
파라켈수스주의가 반드시 파라켈수스의 옹호자들에 의해서만 확산되 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영향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의 한계를 극복하려 는 방식으로 파라켈수스주의자가 되었던 인물들도 있었다. 이 중 두드러 진 인물은 벨기에 출신 의사 판 헬몬트(Jan Baptista van Helmont, 1579
∼1644)였다. 그는 파라켈수스의 3원소 이론을 부정하고 물 일원론을 주 장했지만, 체액의 부조화가 아닌 국지적 실체로서의 질병 개념을 받아들 였다. 판 헬몬트의 1648년 저작 『의학의 기원(Ortus Medicinae)』은 갈 레노스주의의 처방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자 보편적 지식의 구축을 위한 야심찬 기획이었으며, 그의 의화학이 파라켈수스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 음을 보여주는 저술로 평가받는다.580)
독일의 화학자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Andreas Libavius, 1550∼
1616)는 파라켈수스주의의 용어가 지니는 과도한 모호함에 불만이 많았 다. 의화학을 향한 사람들의 선입견과 반감을 극복하고 혁신하고자, 그는 1597년 최초의 화학교과서인 『연금술(Alchemia)』을 썼다.581) 아이러니 하게도, 파라켈수스의 한계를 비판하고 나선 파라켈수스주의자들의 활약 은 파라켈수스주의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갈레노스주의 모두 를 성공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이후 18세기에 전개될 화학혁명을 위한 무 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파라켈수스주의의 확장을 의화학의 영역에만 국한하여 살펴보 아서는 안 된다. 유럽이 과학혁명으로 진입하고 있던 이 시기에, 어떤 파 라켈수스주의자들은 전혀 다른 형태의 과학혁명을 기대했던 과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연금술과 의학의 개혁을 넘어서서 사회의 개혁에 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파라켈수스주의의 연금술을 변화의 모 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Hugh Trevor-Roper, “The Court Physician and Paracelsianism,” in Medicine at the Courts of Europe 1500~1837, ed.
Vivian Nutton (London: Routledge, 1990), 79-94.
580) Georgiana D. Hedesan, An Alchemical Quest for Universal Knowledge: The ‘Christian Philosophy’ of Jan Baptist Van Helmont (157 9~1644) (London: Routledge, 2016).
581) 브루스 모런, 『지식의 증류』, 19-23. 리바비우스의 『연금술』은 당대의 화학 지식을 개관한 업적으로서, 전반부는 화학 물질의 조작법을 다 룬 ‘절차’(Encheria), 후반부는 화학 물질의 성질을 다룬 ‘화학’(Chymia)으로 구성되었다.
든 측면과 관련된 보편적 과학으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특히 파라켈수스 의 사물의 서명 이론을 도입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서명을 올바르 게 해석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려는 과학자 집단의 운동이 펼쳐 졌다.582)
그 대표적인 사례로, 1614∼1615년에 걸쳐 익명의 저자에 의해 출판 된 『장미십자회의 명성(Fama Fraternitatis)』과 『장미십자회의 고백 (Confessio Fraternitatis)』을 꼽을 수 있다.583) 이 메니페스토의 저자는 어떠한 비밀결사가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연금술의 언어와 상징을 활용하여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지식의 개혁과 사회의 갱신에 동참할 것 을 촉구했다. 여기서 공개된 비밀결사란, 의술의 비밀에 통달했다는 크리 스티안 로젠크로이츠(Christian Rosencreutz)에 의해 설립된 장미십자회 로 알려졌다. 이 선언문의 영향은 어마어마하여 수많은 익명의 개인들이 회원 가입을 위한 청원 편지를 작성하거나, 스스로를 장미십자회원으로 칭하는 일들이 벌어졌다.584)
몇몇 연구자들은 『명성』과 『고백』의 저자가 『화학적 결혼』의 저자로 추정되는 발렌티누스 안드레애585)와 동일 인물이었을 것으로 본 다.586) 안드레애의 확실한 저술은 1619년에 출판된 『그리스도교 국가 (Christianopolis)』인데, 이 책이 묘사하는 그리스도교적 유토피아는 에 는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의 『유토피아(Utopia)』
(1516),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1568∼1639)의 『태양의 582) 파라켈수스주의의 이러한 흐름은 제3세대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탐색되기 시작한 새로운 연구 주제이다. 앞으로 더 풍부한 연구가 이어질 것 으로 기대한다. 이 주제를 다룬 주목할 만한 최근 논문들은 다음과 같다.
Martin Želma, “From Paracelsus to Universal Reform,” Daphnis 48 (2020):
184-213; Urs L. Gantenbein, “Cross and Crucible: Alchemy in the Theology of Paracelsus,” Ambix 67 (2020): 88-99.
583) Frances A. Yates, Rosicrucian Enlightenment, 41-58.
584) Lyke de Vris, “The Rosicrucian Reformation: Prophecy and Reform at Play in the Rosicrucian Manifestos,” Daphnis 48 (2020):
270-295.
585) 본 논문의 6.1.1.을 보라.
586) Frances A. Yates, Rosicrucian Enlightenment, 65. 그러나 예이 츠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도시(La città del sole)』(1602), 프란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 스(New Atlantis)』(1627)와 비견될만하다. 안드레애의 유토피아에서는, 의화학적 사상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교육 방법론을 완성하기 위한 학자 공동체가 구성되어 있고, 공공의 복지를 위해 자연을 연구하는 실험실이 자리 잡고 있다.587) 이와 같은 모습의 유토피아는, 루터의 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종류의 사회 개혁이 지식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요청되 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588)
과학과 의학을 통한 사회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대표적인 파라켈수스 주의자는 영국의 의사 로버트 플러드(Robert Fludd, 1574∼1637)였다. 장 미십자회 운동을 지지했던 그는 진정한 의술이야말로 자연철학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질의 변성만을 강조하는 연금술은 “비속한 화학”(chymia vulgaris)에 불과하지만, 참된 연금술은 영적인 재생의 기 술이기에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589)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망명한 사무엘 하틀리프(Samuel Hartlib, 1600-1662)는 모든 영역의 생활에서 개혁을 이루려는 유토피아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회복시킬 것을 주 장하면서, 과학과 기술의 실천을 통한 유토피아 실현을 꿈꾸었다. 그는 587) 루이스 멈퍼드, 『유토피아 이야기』 박홍규 역 (서울: 텍스트, 2010), 97-116; Nichole Pohl, “Utopianism after More: the Renaissance and Enlightenment,”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Utopian Literature, ed.
Gregory Claey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57-59. 안 드래애의 유토피아에는 교육, 종교, 과학의 하향식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의 죄를 극복할 수 있으며, 선을 이루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와 같은 신과 인간 사이의 가부장적 구조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에서도 공유되었다.
588) 파라켈수스주의의 확산과 장미십자회 운동의 연결고리에 관하여 는 다음의 논문집을 참조하라. Susanna Åkerman ed., Rose Cross over the Baltic: The Spread of Rosicrucianism in Northern Europe (Leiden: Brill, 1998).
589) William Huffman. Robert Fludd and the End of the Renaissance (London: Routledge, 1988); 후프만의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한 다음의 논문도 참조하라. Luca Guariento, “Life, Friends, and Associations of Robert Fludd: A Revised Account,” Journal of Early Modern Studies 5 (2016): 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