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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생애

2.1.3. 평판, 성격, 건강

스의 행동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적대자들을 향한 명백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교수단은 그의 강의를 방해했고, 그를 비 방하는 풍자시가 게시되었다.158) 조력자였던 프로벤이 세상을 떠나고 바 젤 시의회도 더이상 그를 지원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환자의 치료비 문 제로 법정 시비에 휘말린 파라켈수스는 결국 1528년 2월 바젤을 도망치 듯 탈출해야만 했다.159)

바젤에서와 같은 전성기는 파라켈수스의 남은 생애에서 다시는 돌아 오지 않았다. 그는 독일의 여러 도시를 방랑했고, 광산과 온천을 떠돌면 서 의술과 저술에 전념했다. 바젤 시기 이후부터 그는 ‘파라켈수스’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본격적인 저작들을 남겼지만,160) 그의 평판과 저항적 견해 때문에 그의 저작들은 생전에 거의 출판되지 못했다.161) 그의 마지 막 정착지는 잘츠부르크였다. 그는 1541년 9월 24일 이 도시에서 숨을 거두었고, 성 세바스치안 구호소에 매장되었다. 그의 남은 재산은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갔다.162)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동시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습관적으로 그러 하듯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 혹은 그리스어로 표현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파라켈수스라는 이름을 자신의 의학 저작의 필명으로 사용한 것은 1536년에 완성된 『대외과술(Grosse Wundarzney)』부터였다. 흔히 말 하듯 이 이름이 고대 로마의 의학자 켈수스(Celsus, 67∼130)를 능가하는 인물이란 의미로 사용된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것을 호헨하임의 번역어라고도 하고, 1530년대에 완성된 주저 『파라(para)』

시리즈와의 발음 유사성에 주목하기도 한다.164)

그렇다면 사람들의 눈에 비친 파라켈수스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헨리 지거리스트가 그를 르네상스기에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았던 것과 유사 한 평가였을까?165)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는 1580년 저작 『수상록(Essais)』에서 파라켈수스가 의약의 출발점으로서 “고대 의 모든 규칙들을 뒤바꾸고 둘러 엎었고, 의술은 지금까지 사람들을 죽 이는 데에만 쓰였다고 주장”했으며 “그가 이것을 쉽게 증명할 것”이라 평가했다.166) 또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1584 년 저작 『원인, 원리, 일자에 관하여(De la causa, Principio e Uno)』

에서, “그리스어도 모르고 아랍어도 모르고 … 아마도 일찍이 라틴어를 몰랐던” 파라켈수스가 “갈레노스, 아비켄나를 비롯해 라틴어로 의견을 164) Walter Pagel, Paracelsus, 5. 파겔은 파라켈수스라는 명칭이 그가 바젤에서 쫓겨나 콜마르(Colmar)에 머물던 시기에 그를 둘러싼 추종자 써클 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 명칭은 1529년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출판된 정치-점성학적 저작인 『실천(Practica)』의 필명으로 처음 등장했는 데, 아마도 ‘테오프라스투스 폰 호헨하임’이라는 의학 저자의 이름과 구분 짓 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로이 포터, 『의학, 놀라운 치유의 역사』, 여인석 역 (서울: 네모북스, 2010), 255. 켈수스가 유럽 지식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 려진 것은 1478년 이후부터였다.

165) René Bernoulli, “Montaigne and Paracelsus,” Gesnerus 49 (1992):

311. “Aber sein Werk, an einem Wendepunkt der abendländischen Medizin entstanden, ist heute noch vollkommen lebendig.

166) 몽테뉴, 『인생 에세이』, 손우성 역 (중판; 서울: 동서문화사, 2005), 664. 이 구절을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긍정적인 추켜세움의 표현으로 보았는데(『과학의 탄생』, 476), 이후의 문장으로 보아 과연 그러한지는 의 문스럽다. “그러나 내 생명을 그의 새 경험의 실험에 맡긴다는 것은 현명한 일은 못된다고 본다.”

말했던 모든 사람들보다 치료제와 치료술의 본성을 잘 알 수 있었다”고 칭송했다.167)

그러나 파라켈수스의 평판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그는 당대의 별종이었고, 그의 시대는 그의 인격이 드러내는 들쭉날쭉한 윤곽선을 감 당하지 못했다. 파라켈수스의 조수였던 요한네스 오포리누스(Johannes Oporinus, 1507~1568)가 남긴 편지가 빈약하기 그지없는 파라켈수스의 전기 자료를 보충해준다. 미국 아퀴나스 대학의 역사학자 찰스 거노 (Charles D. Gunnoe Jr.)에 의해 핵심 부분이 복원된 그 편지에 따르 면,168) 파라켈수스는 기도를 거의 하지 않았고 그가 교황에게 비판적인 만큼이나 루터에게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술고래가 되었고, 꽤 자주 취한 상태로 글을 쓰곤 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옷을 갈아입지 않았으며, 교수형 집행인으로부터 얻은 긴 칼을 지니고서 침대 위에 널 브러졌다. 그리고는 잠깐 졸다가 자신의 머리 주변으로 칼을 휘두르며 벌떡 일어나곤 했다. 언제나 용광로 앞에서 무언가를 끓여대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고, 궤양 치료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농민들과 술 마시기 대결을 벌여 승리를 거두곤 했다. 이 편지의 내용을 두고 제 자가 스승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보았던 카를 주드호프와 요제프 슈 트레벨과는 달리, 발터 파겔은 오포리누스가 스승을 향한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평가한다.169)

167) 조르다노 부르노, 『무한자와 우주의 세계: 원인과 원리와 일자』, 강영계 역 (파주: 한길사, 2000), 353.

168) Charles D. Gunnoe, Jr., “Thomas Earastus and His Circle of Anti-Paracelsians,” in Analecta Paracelsica, ed. Joachim Telle (Stuttgart:

Franz Steiner, 1994), 147-148. 거노의 연구는 오포리누스 편지의 새로운 사 본이 발견됨으로써 가능했다.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Udo Benzenhöfer,

“Zum Brief des Johannes Oporinus über Paracelsus: Die bislang älteste bekannte Briefüberlieferung in einer Oratio von Gervasius Marstaller,”

Sudhoffs Archiv 73 (1989): 55-63.

169) Walter Pagel, Paracelsus, 30. 오포리누스가 스승을 존경하지 않 았다면, 스승의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넘겨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옌 스 죈트겐,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100. “술에 고주망태가 되었어도 집에 돌아와 자신의 철학을 받아쓰라고 내게 불러주는 내용은 너무나 질서정 연해서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봐도 고칠 게 없었다.”

오포리누스의 편지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파라켈수스가 여성에 게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평생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언급이다. 윌리 엄 뉴먼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1990년 잘츠부르크의 성 세바스치안 성당 에서 발견된 파라켈수스 유골에 관한 법의학적 분석을 다루었다. 1541년 에 이 장소에 안치되었다고 알려졌던 유골 조각들은 계량적이고도 화학 적인 분석을 거쳤고, 심하게 손상되어 있던 두개골이 파라켈수스의 것임 을 지지하기에 충분한 근거들이 확보되었다.170)

유골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또 다른 단 서는 파라켈수스의 초상화였다. 실제 파라켈수스를 묘사한 가장 오래된 초상화는 아우구스틴 히르쉬포겔(Augustin Hirschvogel, 1503∼1553)의 1538년 작품이다.171) 대중에게 잘 알려진 파라켈수스 초상화는 크게 두 가지의 계열로 나뉘는데, 하나는 히르쉬포겔의 작품으로부터 1567년의 로지크루시안 파라켈수스로 계승된, 가장 전형적인 파라켈수스 초상이다.

다른 하나는, 17세기 화가 벤첼 홀라르(Wenzel Hollar, 1607∼1677)의 작 품으로서, 비교적 젊은 시절의 파라켈수스를 묘사하고 있다.172)

170) William R. Newman, Promethean Ambitions, 195-196. 그는 수 은의 독성으로 인해 사실상 치아가 거의 없었으며, 심각한 유양돌기염 (mastoiditis) 증상으로 고통을 받았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사망한 원인이었 을 것이다; Urs Leo Gantenbein, “Poison and Its Dose: Paracelsus on Toxicology,” in Toxicology in the Middle Ages and Renaissance, ed., Philip Wexler (London: Academic Press, 2017), 8. 그의 유골의 수은 함유량 은 일반인의 10배에 달했다. 이는 그가 수은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171) 파라켈수스의 초상화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하라. Joseph Strebel, “Ist Augustin Hirschvogel der Monogrammist der authentischen Bildnisse von Paracelsus?” Nova Acta Paracelsica 3 (1946): 133-146; Charles Webster, “Bare Heads against Red Hats: A Portrait of Paracelsus,” in From Physico-Theology to Bio-Technology:

Essays in the Social and Cultural History of Biosciences, ed. Kurt Bayertz & Roy Porter (Amsterdam: Rodopi, 1998), 54-75.

172) 19세기에는 제3의 계열의 초상화가 등장하는데, 이는 향후의 연구 를 필요로 하는 주제이다.

[그림 2] 아우구스틴 히르쉬포겔의

파라켈수스 초상 (1538) [그림 3] 로지크루시안 파라켈수스 초상 (1567)

[그림 4] 벤첼 홀라르의

젊은 파라켈수스 초상 (17세기) [그림 5] 19세기 파라켈수스 초상 (제3의 계열일까?)

초상화와 두개골을 법의학적으로 비교 분석하여 성 세바스치안 성당 의 유골이 파라켈수스의 것임이 확인되면서, 그의 성적 정체성과 관련된 흥미로운 논의들이 제기되었다. 그는 키가 1.6m 이하였고, 큰 두개골과 두꺼운 목을 가졌으며, 목소리는 날카로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골반 은 비정상적으로 넓었고, 팔과 다리는 사춘기 이전에 거세당한 환관을 연상시킬 만큼 짧았다.173) 법의학 전문가들은 파라켈수스가 거짓남녀한 몸증(pseudohermaphroditism)을 가졌던 생물학적 남성 혹은 부신성기과 다증(adrenogenital syndrome)을 가졌던 생물학적 여성,174) 즉 간성인 (inter sex)이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175) 이는 파라켈수스가 성행위를 위한 동작을 취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주며, 그가 평생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오포리누스의 증언의 개연성을 높여준다. 모호한 성별로 인해 그가 가졌을 불완전한 남성성은,176) 그의 일부 저작들 및 호문쿨루 173) Philp Ball, The Devil’s Doctor, 25-27. 갑상선 질환와 구루병이 의심된다. 그가 어릴 적에 군인 혹은 마녀에 의해 거세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도 했다; Bruce T. Moran, Paracelsus, 7-8. 그의 골반은 여성의 형태를 가 졌다. 174) William R. Newman, Promethean Ambitions, 197-199. 만약 후 자의 경우라면, 태아기에 음핵이 확대되어 마치 음경이 돌출된 듯 보이게 되 고, 음순이 서로 들러붙어 속이 빈 음낭처럼 보이는 구조를 이루었을 수 있 다; 마크 S. 블럼버그, 『자연의 농담: 기형과 괴물의 역사적 고찰』 김아림 역 (서울: 알마, 2012), 188. 파라켈수스의 신체적 상태를 요도밑열림증 (hypospadic)이나 남녀추니(hermaphrodite), 또는 총배설강외번증(cloacal extrophy)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175)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STS)에서는 남성중심주의 과학을 나쁜 과 학으로 비판하는 경험론과 반(反)성차별주의적 경험에 기반한 과학이 더 나 은 과학이 될 수 있다는 입장론이 논의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성소수자의 입장에서 ‘좋은’ 과학을 만들 수 있다는 입장론의 주장은 사실상 간성인에 해당하는 파라켈수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 스트 입장론의 주장을 잘 보여주는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샌드라 하딩, 『누 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여성들의 삶에서 생각하기』, 조주현 역 (파 주: 나남, 2009).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의 5.2.1.을 보라.

176) 불완전한 성기에 대한 성별 인식의 역사에 관하여는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토머스 월터 라커, 『섹스의 역사』, 이현정 역 (서울: 황금가지, 2000); 파라켈수스의 신체적 조건에 따른 감정 이입을 위해, 그와 유사한 조 건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다음의 소설 작품을 추천할 만하다. 제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