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호문쿨루스의 계보
5.1.1. 현자의 돌
영국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고고학연구소의 마르코스 마르티농-토 레스(Marcos Martinón-Torres)는 지난 반세기에 걸친 연금술 역사의 서 술 경향을 돌아보면서, 199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히스토리오그라피’의 흐름을 지적했다. 이 흐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연금술사들의 최종 목표인 ‘현자의 돌’이 황금변성의 촉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포착 해냈다는 점이다.458)
물론 르네상스기 연금술사들이 여전히 황금변성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황금변성 연금술의 전성 기는 중세가 아닌 르네상스기였다.459) 연금술이 제 목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은, 헤르메스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던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458) Marcos Martinón-Torres, “Some Recent Development in the Historiography of Alchemy”, 221.
459) William R. Newman, “Technology and Alchemical Debate in the Late Middle Ages”, 423-445;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 스의 권위를 힘입어 연금술의 불가능성 혹은 악마적 기원을 주장했고, 중세 연금술사들은 그들의 강력한 권위로부터 스스로를 간신히 방어해야 하는 처 지에 놓였을 뿐이었다.
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르네상스기의 연금술 이론은 이미 여러 갈래의 전통들, 즉 고대 그리스의 4원소 이론, 중세 아랍 철학의 2원소 이론, 고 대 야금술의 전통, 헤르메스주의의 우주론이 결합되어 형성된 복잡다단 한 체계였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당대의 연금술사들은 금을 제외한 기본 금속(철, 구리, 납, 주석, 수은, 은)의 형상을 파괴하여 이상적인 유황과 수은을 추출하고 거기에 금의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금을 제조하 려는 노력을 기울였다.460) 금속이 어머니 대지의 자궁 속에서 가장 비천 한 철의 단계에서 가장 고귀한 금의 단계로 서서히 자라난다는 오랜 믿 음에 따르면,461) 연금술은 이러한 금속의 성장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작 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자연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야 완성할 수 있 는 것을 인간의 기예에 의해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자연의 가속화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는 무엇일 까? 연금술사들은 사물에 내재된 정수, 즉 제5원소야말로 금속을 변성시 키는 결정적인 매개라고 여겼고, 증류(distilling)의 과정을 통해 이 만능 의 재료, 즉 ‘현자의 돌’을 추출해내려고 했다.462) 연금술 전통에서는 현 자의 돌에 이르는 과정을 일컬어 ‘마그누스 오푸스’(magnus opus)라고 한다.463) 유황과 수은의 신성한 화학적 결혼으로 비유되는 이 작업은 매 우 복잡하지만, 크게 나누어 니그레도(흑화), 알베도(백화), 루베도(적화) 의 단계를 거친다.464) 14세기 파리에서 살았던 연금술사 니콜라 플라멜 460) 르네상스기에도 대부분의 연금술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이론으로부터 비롯된 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과연 연금술이 실체적 형상을 다룰 수 있는지의 여부가 연금술 찬반론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461) 미르치아 엘리아데,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45.
462) 이탈리아의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가 남긴 증류에 대한 경 탄을 떠올리게 한다.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이현경 역 (파주: 돌베개, 2007), 89. “증류는 아름답다. 무엇보다 느리고 철학적이며 조용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 또 증류가 아름다운 건 변신이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약체 에서 증기로, 증기에서 다시 액체로 말이다. 위로 아래로 두 겹의 여행을 하 는 사이 마침내 순수한 것에 도달한다. …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행동으로 불완전한 물질에서 정수를, 우시아를, 영혼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을 북 돋우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알코올을 얻게 되는 일이다.”
463) 쿠사노 타쿠미, 『도해 연금술』, 34-35.
(Nicholas Flamel)은 이 과정에 성공하여 금을 획득한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되었는데, 그 전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의 성공 이야기는 이후 수 많은 연금술사들의 노력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465)
그러나 르네상스기의 몇몇 연금술사들은, 현자의 돌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라틴 서유럽 세계에서 전통적으로 현자의 돌이 불완전 한 금속을 완전한 금속으로 변성시키는 촉매였다면, 새로운 시대의 헤르 메스주의적466) 연금술사들은 불완전한 건강을 완전한 건강으로 변성시키 는 의약으로서의 현자의 돌을 찾고자 했다.467) 파라켈수스 역시 이러한 새로운 전통을 표방했음에 분명하며, 마그누스 오푸스를 의약 제조의 과 정으로서 실천했음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다.468)
그런데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편집한 파라켈수스의 후예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불완전한 현재 상태와 완전한 최종 상태를 나누고 있는 시간적 간극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다름 아닌 연금술이라고 한다면, 금속의 변성과 건강의 변성을 넘어서서,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한
464) 일반적으로 연금술의 과정은 하소(calcination), 응결(congelation), 응고(fixation), 용해(dissolution), 소화(digestion), 증류(distillation), 승화 (sublimation), 석출(separation), 밀랍(ceration), 발효(fermentation), 증식 (multiplication), 사영(projection)의 절차를 포함하는데, 이 과정은 매우 길고 도 고통스러운 수난의 길이다. 연금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읽고 읽고 또 읽 고 기도하고 일하여라, 그러면 얻으리라”(Lege, lege, relege, ora, labora et invenies)는 격언을 말 그대로 몸소 실천해야만 했다.
465) 앨리슨 쿠더트, 『연금술 이야기』, 15-18.
466) 헤르메스 문헌에서 헤르메스는 고대 그리스의 치료의 신이었던 아스클레피오스를 가르친 스승으로 등장한다. 연금술사들은 스스로를 헤르메 스의 자손으로 여기고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467) 안드레아 아로마티코, 『연금술』, 70. “화금석은 … 병을 고치고 건강을 유지시키고 식물들의 생장을 기적같이 촉진시킬 수 있는 만능 치료제 의 성분이 되었다.”
468) 본 논문의 2.2.2.를 보라; Andrew Sparling, “Paracelsus, a Transmutational Alchemist”, 70. 파라켈수스도 자신이 현자의 돌에 관한 초 보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존 그레고리 버크, 『신성한 똥』, 성귀 수 역 (서울: 까치글방, 2002), 147. 16세기 독일의 의사 요한네스 프롬만 (Johann Christian Frommann, 1623~1695)는 파라켈수스가 정액으로 의약을 만들었다는 소문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는 아마도 호문쿨루스가 파라켈수 스의 의화학에 반영되어 만들어진 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으로 변성시키고 그렇게 완전케 된 인간의 집합인 사회를 변성시키 는 촉매로도 현자의 돌이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469) 최초의 연금술이 금의 제작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고 그 원리를 그리스 과학으로부터 빌려 온 것도 아니라는 엘리아데의 지적을 일부분이나마 수용한다면,470) 우리 는 실험실 안에서 즉물적 성격을 지녔던 중세 연금술을 벗어나 실험실 바깥으로 뛰쳐나와 이상적 성격을 드러내었던 르네상스기 연금술을 이해 하기가 한층 수월해진다. 황금에서 의약으로, 의약에서 인간과 사회로, 현자의 돌은 연금술 그 자체를 변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