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노인 이주의 맥락
3.1. 가족의 분산
3.1.2. 농촌의 상대적 빈곤으로 인한 이주
도시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민영화로 인한 경제기회의 감소, 공업 오염, 기후의 열악 등 이유로 날로 쇠퇴하는 전통 산업지역을 떠나갈 즈 음에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개혁개방 이후 날로 증가하는 도시 와 농촌의 소득격차 때문에 농촌지역을 떠나왔다. 중국의 도시와 농촌 소득격차는 1978년에 2.47배에서 가정별 생산도급제(家庭联产承包责任 制)의 실시, 생산방식의 개선으로 1985년에 1.86배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개혁의 중심이 도시로 이전되고 물가의 안정을 위해 정부 가 농산물 가격을 통제함으로써 1994년에 2.86배로 다시 증가하였다. 그 후 식량 생산량의 증가와 가격의 하락, 향진기업의 발전의 둔화로 인해 2011년에는 소득 격차가 3.13배로 대폭 증가하였다(지성태, 2013).
이처럼 개혁개방 이후 도-농간 소득격차가 상승하는 가운데 호구를 통 한 인구이동통제가 약화되자 많은 농민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도시로 이주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이들을 농민공(農民工)이라고 부른다. 2015년
에 중국 사회에는 이와 같은 농민공이 2.77억 명이 있다. 그들 중 0.5%
는 이주 이후에 도시에서 1차 산업에 종사하고 55.1%는 2차 산업에서 종사하고 44.5%는 제3차 산업에 종사한다(中國国家统计局, 2016).
본 연구에서 관찰된 농촌 출신의 이주 가족 12사례는 모두 농촌의 상 대적 빈곤 때문에 고향을 떠난 것이다. 예컨대 위해시로 이주한 한동창 은 1983년에 가정별 생산도급제가 실시된 후로 가족이 도급 맡은 땅과 타인이 도급 받은 땅을 임대 하여 열심히 농사를 짓고 담배 재배 등 부 업으로 소득을 올리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그리나 2012년부터 곡식의 가 격과 담배 등 경제작물의 가격까지 크게 하락하여 ‘더 이상 안 될 것 같 아서’ 한동창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아들이 먼저 위해시로 이주하였다.
한동창(남성,61세)
(2013년에 아드님은 어떻게 위해시로 오기로 결심하게 되셨나요?) 1983년에 땅을 나누고 나서, 동북에서 가정별 생산 도급제를 실시했 잖아요. 그 후에 따로 농사짓고, 담배 재배하고 다른 사람 땅도 좀 더 도급 받고 해서 내가 열심히만 하면 좀 더 벌 수 있었어요. 몇 년 동 안 꽤 괜찮게 지냈어요. 내가 열심히만 하면 좀 더 벌 수 있었으니까, 담배 재배할 때 괜찮을 때, 국가에서 보조금을 줄 때에는 좀 더 많이 심고, 그 때는 담배 가격도 괜찮았어요. 2012년, 2013년 그때부터 담 배가 경기가 안좋았어요. 더 이상 안 될 것 같았어요. 12년 가을 때 가을하고 나서 위해에 왔죠.
한동창은 도시에서는 ‘어차피 하루 일하면 하루 돈 버니까’ 걱정이 없 는데 농사를 지으면 ‘가물어도 안되고 침수되도 안되고, 자연재해 있어도 안되기에’ 농업소득이 안정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농산물 가격의 하락 이 외에 자연재해 등 농업 소득을 불안정하게 하는 요소들도 농민들로 하여 금 도시로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편 1990년대부터 개혁개방으로 농촌지역의 상대적 빈곤이 날로 심각 해질 즈음에 한족 출신 농민들은 주로 연해도시로 이주하여 ‘농민공’의 신분으로 도시에서 삶의 기회를 찾았다. 그러나 조선족 출신 농민들은
한족 출신 농민들보다 선택폭이 넓었다. 조선족들은 언어가 통하고 친지 가 있어 입국과 입국 후의 취직, 적응이 보다 수월 하는 한국으로 이주 하여 탈 농화와 탈 빈곤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박광성, 2007; 김판준, 2014; 이매화, 2015; 김화선, 2016). 그리하여 1990년대부터 많은 조선족 들은 장기 체류 유형인 산업연수생제도와 같은 합법적인 경로나 밀항, 위장 결혼 등 불법의 방식으로 탈 농화, 탈 빈곤을 꿈꾸면서 한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본 연구에서 관찰되는 6명의 조선족 사례에서 6사 례는 모두 노인이나 자녀가 한국으로 진출하여 가족이 분산된 것이다.
예컨대 오영순 가족 중에 가장 먼저 이주한 막내아들은 홍수재해로 농사 가 망하자 밀항으로 한국으로 떠난 것이다.
오영순(여성, 82세)
(막내아들은 어떻게 한국으로 가게 되셨나요?) 군대 갔다 와서 집체 에서 논을 줬어. 논을 줬는데 그 때 논을 두 쌍을 줬는데 논을 했는 데 비가 와서 싹 떠내려가고 형편이 없지 뭐. 군대는 갔다 왔지, 농사 는 안됐지, 기분은 상했어. 이 때 한국으로 사람들이 밀항으로 나갔단 말이야. 한국에서 사람을 받았어. 그러니까 애가 ‘아이고, 엄마 여기 아무리 있어봐야 농사져서 돈 벌 것 같지 않아’, 내가 마음대로 하라 고 했어. 내가 애를 만날 쥐고 있겠어? 내가 맡겼어. 그때 밀항해서 한국에 나갔어. 그때부터 버는 게 한국에서 그냥 벌었지.
2007년부터는 방문취업제22)가 도입되어 합법적으로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경로가 넓어지면서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이 크게 증가하다.23) 이로 인해 가족의 연쇄이주가 점점 많아지면서 가족 구성원 중에 노동력을 보 유한 구성원 전체가 한국에 나가고 돌봄이 필요한 노인만 홀로 남는 경 우도 있었다.
22) 중국이나 구소련지역에 거주하는 만 25세 이상 외국국적동포에게 해당된다(무연고 동포 포함).
유효기간 5년 의 복수사증을 발급 받을 수 있고 36개 단순노무직에 한정하여 취업활동이 허가 된다.
23)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 동포의 수가 크게 증가하여 2007년에는 310,485명이었던 것이 2015년 에는 626,655명에 이르렀다. 법무부, “2007년 - 2015년도 출입국 외국인 정책 통계연보” 출입국·
외국인정책 본부 사이트에서 제공함 http://www.immigration.go.kr/ 검색일 2017-1-30.
최춘옥(여성, 81세)
큰 딸이 한국 간지 한 7,8년 됐는지. 그 다음에는 막내딸이 또 가고, 그 다음에 또 둘째 딸이 가고, 딸들이 다 먼저 갔어요. 그리고 사위들 도 따라 가고.
방정희(여성, 74세)
아들 둘에 딸 하나. 다 한국에 있어요. 다 한국 나가버렸어요. 날 혼 자 남겨놓고 가버리데…
요형순(여성, 82세)
(지금 자녀들은 어디에 있어요?) 한국에 다 있어. 몽땅 나왔어. 몽땅 나와서 다 한국에서 버오. 맨 처음에 나온 게 우리 작은 아들이지. 먼 저 나와서 형님을 하나씩 하나씩 다 데려갔어.
이처럼 가족 구성원 중의 ‘선구자’들은 경제적 이유나 환경의 원인으로 고향을 떠났고 가족은 분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는 다른 지역의 경제기회와 좋은 생태환경에 의해 흡인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개혁개방 이후의 거시적인 구조적 변동으로 인해 날로 쇠퇴되고 있는 고향의 생존 환경과 암울한 경제적 현실의 배출작용에 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