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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조건 부재로 인한 근거리 거주 및 입소

4.1. 이주 초기 거주방식의 선택

4.1.3. 동거 조건 부재로 인한 근거리 거주 및 입소

1) 노인이 지하실을 임대하여 거주

경제적 조건이 있는 이주가족들에서 동거할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거하는가 하면 경제적 조건이 없어서 동거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부 득이하게 다세대 근거리 분거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 경제적 조건의 제약으로 주택을 임대하여 근거리에 분거하여 생 활하는데 주택비를 절감하기 위해 지하실을 임대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위해시의 주택구조상 옛 주택의 특성을 보유하여 아파트에 지하실(草厦 子)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지하실은 일반 주택보다 저렴하여 이주자들의 선호를 받는다. 본 연구에서 이렇게 자녀와 가까이에 거주하 면서 지하실을 임대하여 생활하는 사례는 가추분 사례와 장홍인 사례가 있다.

림업지역의 쇠퇴로 일자리가 없던 가추분 부부는 아들, 며느리와 손자 가 위해시로 이주한 후 자녀부부를 도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위해시로 왔다. 아들은 위해시에서 음식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음식점에서 제공하 는 기숙사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현재 아들을 돕기 위해 위해시로 온 가추분 부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손자의 학교 근처의 지하방을 임 대하여 살고 있다. 가추분 부부는 손자를 돌보고 며느리를 위해 저녁 식 사를 해주고 가계를 위해 노후 노동도 하고 있다.

가추분(여성, 67세)

우리는 이곳에서 집을 임대했어요, 지하방을 임대했지요. 아파트는 임 대할 엄두를 못 내고요. 우리 아들 며느리가 우리 둘을 모셔 와서 아 이를  돌보게  했어요. 아침에 유치원에 데려주고 점심은 아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저녁에 가서 데려와요. 걔 할아버지가 집에서 애를 데 려주고 데려오고 하고요. 나는 일하러 가요. 우리 집 아들은 걔 사장 이  아파트를  임대 해줬어요. 걔네  같이  일하는  일군들에게  아파트를  임대 해줬어요. 나는 우리 영감이랑 손자랑 함께 지하방에 살고 있어 요.(중략) (그럼 어르신의 며느님은 어르신들과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요?)아들과 함께 살아요. 우리랑 함께 살 수 있겠나요? 사장이 임 대해준 거구요. 사장이 돈을 내줘요. 걔네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침실 3개 방이  3칸이에요. 그러니까 아들이랑 며느리가 방 하나 쓰 고, 그다음 다른 2사람이 방 2개 쓰고, 그러니까 공동으로 임대한 기 숙사인데, 사장이  돈  절반을 대주고, 이  큰  방 쓰는 사람은  얼마 내 고, 중간  방이  얼마, 작은  방이  얼마, 이렇게  걔네들  스스로도  돈을  내요.…  며느리는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해요, 저녁을요. 아침은  자기 절로 대충 사먹고  점심은 회사에서  먹고 저녁은 우리한테  와서  먹지 요.

노인이 지하방을 임대한 사례는 가추분의 사례 이외에 장홍인의 사례 (남성, 61세)가 있는데 장홍인은 ‘서로 방해 받지 않는 삶’을 위해 아들과 같은 주거단지의 지하방을 임대하여 살고 있다. 현재 장홍인의 가족은 매일 같이 식사 하고 장홍인의 아내가 아들의 가사와 육아를 돌보고 있 고 장홍인은 거주하고 있는 주거단지의 수위실에서 일하고 있다.

2) 자녀가 있는 도시의 양로원으로 입소된 노인

일반적으로 자녀가 있는 도시로 이주할 때 자녀와 동거를 원하지 않거 나 동거할 여건이 부족한 유배우 노인들은 주택을 구매하거나 임대하여 자녀 근처에 분거해서 산다. 그러나 배우자를 사별하고 홀로 남은 노인 은 이런 경우에 어쩔 수 없이 자녀가 살고 있는 도시에 위치한 양로원으 로 모셔진다. 자녀들은 노인과 동거할 수도 없고 노인을 독거하게 두는

것도 걱정스럽기 때문에 항상 옆에 돌보는 사람이 있는 양로원으로 모시 는 것을 선호한다. 예컨대 필종구의 경우에는 사별한지 1년 된 후 위해 시에 살고 있는 딸 두 명이 멀리 계시면 돌봐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필 종구를 위해시로 모셨지만, 동거할 여건이 부족하여 필종구를 양로원으 로 모셨다.

필종구(남성, 77)

(위해에  오시기  전에  따님들이  이미  양로원을  찾아  놓으신  건가요?) 위해시에  도착하니까  바로  이곳으로  보내더군요. 애들이  이  방까지  다 봐두었더라구요. (따님들이 안배를 다 한 다음 어르신을 모셔왔군 요. 그렇죠?)네.(그럼  그  당시  어르신께서  위해에  오시기  전에  여 기 오면 양로원에 계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몰랐어요. 근 데 여하튼 애들과 같이 살지는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 당시 는 모르셨군요?) 네, 몰랐지요. (오기 전 양로원에 입소 한다는 건 모 르셨지만 어르신께서 자녀와 함께 살지는 못한다고 생각하셨네요. 그 죠?)네네.(그럼  당시  어르신께서  집을  임대하거나해야겠다고  생각 하셨나요?)아, 네, 나는 집을 임대하고 싶었어요. 집을 임대하고 싶 었고 스스로 밥도 해먹고 싶었지요. (그럼 당시 어르신께서 따님들과 함께 사시려고는  하지  않았나요?  왜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하세 요?) 불편해요.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있는데 어떻게  저랑  살수  있겠 어요.

전통적 가부장적인 생각을 가진 노인인 필종구는 아들이 있었으면 ‘당 연히’ 같이 살았다고 한다. 동거 조건이 없는 것을 ‘딸이기 때문에’, 자신 이 ‘아들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면서 양로원에 입소한 것은 ‘갈 곳이 없어 서’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양로원 입소 후에 실질적으로 출입이 자유롭고 매주 딸의 집을 방문하고 딸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가지긴 하지만 자신의 노후가 이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필종구는 노인은 나이 들면 ‘자식의 안배를 따라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기에 양로 원에 안배된 것에 불만은 없으나 양로원에 들어올 때 관리원에게 갈 곳 이 없어서 왔기 때문에 죽어도 이 양로원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필종구(남성, 77)

(그러니까  만약 아들이라면  어르신께서는 함께 사신다는  거네요?)그 건 당연하지요.(아들이라면 틀림없이 함께 사신다?) 당연히 함께 살 아야지요. (자식들이  딸이기  때문이군요. 그럼  어르신께서  후회되지  않으세요? 내가  왜  아들을  낳지  못했는지 서운하지 않으세요?) 서운 하죠. 당연히  서운하다만 하지만  그래도  쓸데없지요. 그런  서운함이  있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지요.(어르신께서는 정말  서운해 하시는 군요.)서운하죠.  아쉬움이  있어요. 내가  아들이 없으니까  당연히  아 쉬움은 있지요.(그럼 따님들이 어르신을 양로원으로 모셨을 때 당황 하지 않으셨나요? 나를 양로원에 보낼 거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했네. 

이러한 생각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별 불만이 없었어요. 그때도 이 미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고려했고요.  어떻게  안배하고  어떻게  살지는  그대로  따라야  되지요.  나이가  들면  자기절로  무엇이나  결정 하려 하면 안 되지요. 자식이 어떻게 안배해주면 그것을 따라야 해요. 

반드시 어떻게 안배해주든지 따라야 하지요.(때문에 양로원에 온 것 에  별로  불만이  없겠네요?) 없어요. 불만이  없어요.  반드시 와야죠.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지요. 제가 그때 이곳에 왔을 때 양로원 관리원 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죽어도 이 양로원에서 죽어야 되요, 왜 냐면 갈 곳이 없으니까.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 되요.” 이렇게 말씀드 렸죠. 내가 죽는다  해도 죽는 그 날까지도 이  양로원에서 죽어야  되 요. 아무런 생각도 없고, 양로원을 집이다 해야죠. 집이지요.

노인이 돌봄이 필요하여 가까이로 모셔 와야 하는 상황에서 동거조건 이 부족하여 양로원으로 모시고자 할 때 모든 노인들이 필종구처럼 순응 하는 것이 아니라, 양로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강하게 거부할 수 도 있다. 최춘옥의 경우에는 양로원 입소가 자녀들의 강한 의지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최춘옥은 ‘붙잡혀서’ 양로원으로 왔다고 말한다.

최춘옥은 딸이 네 명이 있는데 노인과 한 마을에 살던 둘째 딸이 한국에 나갔다. 노모가 농촌 마을에 홀로 생활하는 것이 걱정되어 딸들은 셋째

딸이 있는 위해시의 양로원에서 모시기로 했는데 최춘옥이 강하게 거부 하였다. 결국 반 강제로 위해시의 조선족 양로원에 입소하게 되었다. 다 행히 양로원에 입소한 후 최춘옥은 양로원 생활을 잘 적응하고 있었다.

최춘옥(여성, 81세)

나는 동북에서 둘째 딸이랑 살다가 둘째 딸이 한국 가니까 내가 혼자 남게 됐지. 그니까 그 다음에 우리 막내딸이 한국에서 ‘언니 엄마 거 기 혼자 놔뒀다가는 죽겠다고 엄마 빨리 데려가라’고 그래서 그래 나 를 나오라는 거를 처음에는 ‘난 절대 안 간다. 난 양로원에 갈 나이가 안됐다’고 안 간다고 했지. 안 간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 두 번째, 세 번째는 차표까지 사서 자기 시어머니하고 시아버지하고 내하고 세 사 람 비행기 표 사가지고 오라고 하니까 그 때 붙잡혔지. 그래가지고 왔지. 와보니까 처음에는 좀 스산하던 게 하루, 이틀 지내보니까 사람 이 마음도 들고 원장이 나이 어린데 참 처사를 잘한단 말이. 그래 나 도 마음에 들더란 말이. 그래 여기 마음 붙여서 사는 게 지금까지 살 았지.

이처럼 가족 재결합의 초기에 이주가족들은 주로 상호의존을 위해 동 거를 하거나, 세대 간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근거리 분거를 하거나 동 거 조건이 부재할 경우에는 근거리에 분거하거나 입소하는 거주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거주방식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의 건강상태, 세대 관계, 자녀의 경제상황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이주 후기에 다시 조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