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생산과 공급의 영역 : 표준화된 대량생산 주거유형의 도입
3.2.1 아파트 공급대상 : 사용자/거주자 개념의 보편성
모든 도시와 건축의 계획과 설계에는 막연하게라도 그러한 공간을 사용하리라 예상되 는 사용자를 설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파트 공급주체 역시 공급을 위한 대상을 설 정하고 그에 맞는 생산을 계획하게 된다. 따라서 공급대상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라는 초기의 고민은 다른 순차적 문제와 연계되며 파급적 영향력을 갖는다.
서구에서 건물을 점유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 혹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보편적이고 추 상적인 용어인 ‘사용자’(user)는 모더니스트 담론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한 어휘 중 하나이다. 그 기원은 1945년 이후 서유럽 국가에 복지국가 프로그램이 도입된 시 기와 일치하며,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널리 퍼졌다. 복지국가 시절에 등장한 이 용어에 대한 최초의 공격 중 하나는 르페브르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용자라는 단어는 뭔가 막연하고 수상한 느낌을 풍긴다. 도대체 무엇의 사용자인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 거주자란 단어와 마찬가지로 사용자란 단어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의미하지 않는다.”145
르페브르는 도시계획가, 사회공학자, 전문가, 기술자 등에 의해 공간은 특정 용도로 개념화된다고 보고, 이를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 of space)이라고 정의한 다. 이는 공간을 심리적 추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구성원들로부터 공간의 생생한 체험을 박탈해 놓고 나서, 그 공간의 거주자들마저도 하나의 추상으로 둔갑시켜 거주 자들이 공간 속에 있다는 사실마저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146
에이드리언 포티(Adrian Forty) 역시 사람들을 그냥 ‘사용자’라고 지칭함으로써, 그들의 불일치하고 비순응적인 개별성을 박탈하고 그 대신 동질적인 일체성을 부여한 다고 주장한다.
145 Henry Lefebvre (translated by Donald Nicholson-Smit), The Production of Space, Oxford : Blackwell, 1991, p.362.
146 Henry Lefebvre (translated by Donald Nicholson-Smit), The Production of Space, Oxford : Blackwell, 1991, p9. 그러나 사용 혹은 사용자가 르페브르에게 전적으로 부정적인 개 념만은 아니었으며, 그의 궁극적 목적은 사용자가 공간을 다시 차지하여 그것을 사용자의 것으로 만들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점유와 사용은 (...) 교환과 지배에 대항하는 개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Henry Lefebvre (translated by Donald Nicholson-Smit), The Production of Space, Oxford : Blackwell, 1991, p.368와 신승수, 사용자 중심의 중층적 공공성 실현을 위한 건축 디 자인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2010 참조. 즉 일상의 개념처럼 사용과 사용자 역시 그 맥락과 배치에 따라 다른 함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점유자, 거주자, 고객 대신에 ‘사용자’를 선택한 것은 불우한 사람들 혹 은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는 함의를 강하게 풍긴다. 그러니까 건축가 의 주택 구상에 기여할 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게다가 ‘사용자’
는 언제나 미지의 사람이다. 이 때문에 현상적 실체가 없는 허구 혹은 추상 이다. ‘사용자’는 구체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사용자의 신원, 직업, 계급, 젠더,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 등이 밝혀지면 그것은 더 이상 카 테고리가 아니다. 그 추상적 일반성이 박탈되면 ‘사용자’의 가치는 붕괴한 다. 사용자라는 카테고리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각종 차별을 무시하면서 도 건물의 거주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147
서구에서의 사용자 개념은 복지 개념과 함께 대두되면서 학교와 병원 그리고 주택 등 의 공공 부문의 공사와 관련되어 불우한 사람들 혹은 힘없는 계급을 모두 포괄하는 함 의를 내포하고 있다. 즉 서구에서는 사용자 개념을 통해 실제로 계층 간의 차이가 그 대로인데도 불구하고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 못지않게 동등한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다 는 이상적 믿음을 갖게 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향해 사회가 급속히 나아간 다고 주장하려는 복지국가 민주주의 방식에 건축업이 일정부분 기여한 측면이 있다.
20세기 초반 근대운동 역시 도시주거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노동자 주거문제를 해결하 기 위한 여러 가지 개념과 계획들이 제시되면서 이러한 사용자 개념에 기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근대건축운동은 ‘인간의 신체기관은 모두 같고 기능 또한 같으므로 모든 인간의 요구는 같은 것’이라는 전제 하에 주거에 대한 인간의 모든 요구를 단순화시 켰다. 근대건축에서 주거의 의미는 무엇보다 평균적 인간을 위한 평균적 주거의 공급 이라는 기본틀 속에서 아파트의 확산을 통해 주거의 양적 부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목 적을 두었다. 따라서 당시 근대 건축가들은 주거에서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공간의 효 용성과 안락함 그리고 적절한 설비로 축소해서 설정하였기 때문에, 문화적이고 사회적 인 요구는 반영될 여지가 없었다.148
“특히 저소득층 및 노동자 계급은 그들이 지닌 역사적·문화적 배경의 차이 에 관계없이 동일한 집단으로 설정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을 위한 주거형식 은 동일한 논리에 의해서 계획되고 제시되었다. 주거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147 Adrian Forty, Words and buildings : A vocabulary of modern architecture, London:
Thames and Hudson 2000, 이종인 옮김, 건축을 말한다, 미메시스, 2009, p.518.
148 손세관, 도시주거형성의 역사, 열화당 미술선서, 1995, p.282.
보편화·세계화됨으로써 그에 대한 건축적 해결도 보편화되었고, 하나의 주 거유형을 반복적으로 생산함으로써 집단의 주거에 대한 요구도 자연히 해결 될 수 있었다. 대중을 위한 주거유형은 단순한 도식에 의해 산출되었으며, 나 중에는 단지 건축의 밀도와 높이를 결정하는 정도의 문제만 남게 되었다 .”149
그리고 이와 같이 범주화된 사용자 개념은 표준화가 가능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동선 도출과 같은 시도 등을 통해 더욱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즉 포디즘적인 과학적 합리 성에 근거한 공간계획으로, 사용자 개개인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요구와 행위를 추상 적 개념아래 소거시키는 방식은 정당화 되었다.
반면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영구임대주택이 일부 공급되었을 만큼 주거복지 정책 이 사실상 전무했던 국내에서의 사용자 혹은 거주자 개념은 상품주택의 등장과 함께 의미를 갖는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박정희 정부는 대한주택영단을 ‘대한주택공 사’로 개편하고, 서구에서처럼 국가의 재정적 지원에 의한 사회주택 혹은 영구적 임 대주택 공급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국가가 기업적 방식으로 주택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자 하였다. 따라서 아파트 건설 초기에는 대한주택공사 등 공공부문이 사실상 민간부 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정부 주택의 일관된 흐름은 잘 팔리는 집을 대량으로 건설하여 판매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국가가 기업적 방식으로 주택을 건설하면서, 사실상 국내의 도시주거는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온전히 내맡겨진 채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의 주택정책 이 사회복지 차원이 아니라 ‘건설 산업’150 의 성격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따 라서 ‘기성주택’ 혹은 ‘상품주택’으로서의 아파트는 그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무난한 스타일의 범용적인 주택”151 을 이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표준적이고 획 일적인 행동양식을 갖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사용자 혹은 거주자 개념을 상정하게 되 었고, 과학적 합리성과 표준화를 위해 환원된 행동 분석이라는 기능주의 모델에 입각 하여 획일적인 공간모델을 정립하게 된다.
그 결과 지리적 위치나 맥락이 달라도 아파트단지의 형태적, 공간적 특성은 전국 어느 곳이나 동일한 모델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내부공간뿐만 아니라 외관이
149 손세관, 도시주거형성의 역사, 열화당 미술선서, 1995, p.282.
150 임서환, 주택정책 반세기 : 정치경제환경 변화와 주택정책의 전개과정, 기문당, pp.40-43.
151 전상인, 아파트에 미치다 : 현대한국의 주거사회학, 이숲, 2009, p.48.
나 단지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에 들어가 정보를 찾았다. (...) 내가 찾 는 것은 32평형 아파트다. 평형이 32평형이라는 것은 전용 공간이 25.7평 내외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방은 세 개라는 말이 된다. 그 세 개의 방 중 하나는 좀 크고 나머지 두 개는 상대적으로 작다. 세 개의 방들은 거실이라 불리는 마루를 가운데 두고 빙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거실은 대개 부엌과 붙어 연결되어 있다. 32평형 아파트는 부엌과 거실을 구분 짓는 문이 나 있지 않은 게 대부분이다. 누가 그렇게 정해 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 지만 별로 예외가 없다. 화장실은 하나일 수도 있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지어진 아파트라면 두 개일 수도 있다. (...)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면 계단이 나타나고,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고 있다. 그것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 오면 한 건물 혹은 두 세 건물에 하나씩 담당 경비실이 있고, 아파트 단지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실이 있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경로당과 어린이 놀이 터가 적어도 한 둘쯤 있는 곳이 많다. 그렇지 않은 곳도 물론 적지 않다. 그 리고 주차장이 있다. (...) 너무 쉽다. 너무 단순하다. 너무 똑같다.”152
위의 사례에서와 같이, 평형대의 크기에 따라 스케일의 차이가 있을 뿐 대다수 아파트 의 공간 구성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이는 부부에 아이가 하나 혹은 둘인 3인 또는 4인 단위의 핵가족이라는 보편적 거주자를 상정한 데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단위세 대 모델을 표준화된 이상으로 정형화시킨 후 대량생산 시스템에 맡기는 것이다.
[그림 3-2] 전형적인 32평형 계단실형 기본형(좌)과 42평형 계단실형 기본형(우)
152 송도영, “우리에게 아파트란 무엇이었는가”, 공간, 2003년 9월호, 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