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생산과 공급의 영역 : 표준화된 대량생산 주거유형의 도입
3.2.4 주거공간특성 : 기능중심의 구성과 내향화
20세기 전반의 변화된 사회적 관념들과 지향가치로 인해 서구 근대 주거건축에서는 주택 설계에 있어 부엌과 욕실이 응접실과 식당보다 중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기능과 효율성 즉 노동절약의 관념이 중시되면서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합리적인 동선이 무엇 보다 우선시된다.
그러나 사실 가사 노동에 있어서 시간이 곧 돈이라는 경제 법칙을 가정주부 그리고 엄 마의 사랑이라는 비영리 노동력과 비교하는 것은 해당 여성들에게 모욕이 될 수도 있 었다. 하지만 1913년에 ‘새로운 가사 - 가정관리에서의 효율성 연구’(The New Housekeeping - Efficiency Studies in Home-management)라는 영향력 있는 저 서와 1915년의 또 다른 저서 ‘가정 공학 - 가정에서의 과학적 관리’(Household Engineering - Scienfific Management in the home)의 저자인 크리스틴 프레더릭 (Christine Frederick)이라는 미국 여성에 의해 효율성과 부엌 디자인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180
180 엔지니어의 아내인 크리스틴 프레더릭은 산업 효율성에 대한 남편과 동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녀는 빈번히 언급되는 ‘효율성’(efficiency)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에 호기심 을 느끼게 되었고, 심지어 가정주부라도 가사 노동을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원리를 적용하면 적은 노동으로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듣게 된다. 깊은 인상을 받은 프레더릭 은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가사작업을 개선하면 단순한 가정주부에서 존경할 만한 가사 노동의 전 문적 관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Christine Frederick, The new housekeeping - Efficiency studies in home management, 1913 (originally published in Ladies' Home Journal, Sept-Dec. 1912).
프레더릭은 그녀의 저서에서 단지 한명의 숙련된 여성이라는 노동력만으로 작동할 수 있는 효율적인 작업장으로서의 부엌이 어떻게 디자인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녀 에 따르면 부엌 효율성의 비밀은 식사를 마련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엌의 한 쪽 면에 배치하고, 반대편에는 설거지를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배치하는 데 있다. 이 를 증명하기 위해 요리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동선이 엇갈리는 비효율적인 배치와 부 엌 찬장과 개수대 그리고 가열대를 효율적이고 동선을 절약하도록 한 배치를 대조 방 법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논점을 명확히 전달한다.
[그림 3-4] 부엌에서 음식의 준비(A)와 설거지 및 정리(B)에 소요되는 동선의 비교
효율적인 부엌과 비효율적인 부엌의 비교는 부엌에 테일러리즘을 적용하여 가정에 공 장식 효율성을 도입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프레더릭은 이러한 부엌 디자인으로 인해 전문가적인 가정주부는 하인의 도움 없이도 가사를 혼자 관리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 라, 전기 청소기나 식기 세척기 같은 새로운 가전제품들은 변덕스러운 하인보다 더 믿 을만하고 확실히 더 효율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181
이에 앞서 미국의 19세기 유토피안 작가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 역시 그 의 저서 ‘뒤를 돌아보면서’(Looking Backward 2000-1887)에서 상류층 여성의
181 [그림 3-4] 참조. Christine Frederick, The new housekeeping - Efficiency studies in home management, 1913 (originally published in Ladies' Home Journal, Sept-Dec. 1912).
가사 효율성 결여를 비난한다. 자신의 지휘 하에 여러 하인을 두고 있어서인지 좀 더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상류 계급의 여 성들이 하인의 도움 없이 가사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 할 상황이 되어야만 좀 더 창의 적이 되어, 작업을 더욱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내고 유용한 기계들 을 발명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벨라미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페미니스트인 샬롯 질만(Charlotte Gilman)의 경우는 고급 호텔 서비스와 가정을 결합시킨 소위 '아파트먼트 호텔’(apartment hotel)을 통해 하인부족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182 전문적인 직원들이 식사를 요리하여 아 파트 단지 내 레스토랑에서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일단의 보모들은 거주자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고 전문 청소부들은 개인 아파트 내부를 청소해 주는 것이다. 그녀는 모든 가사 작업들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위대한 가정의 혁명’(the grand domestic revolution)을 선언했고 가사 일을 돌보는 하인들이 불필요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는 각 세대 내에서 부엌을 아예 없애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상류층을 겨냥했던 아파트먼트 호텔에서는 대부분의 기능이 외부에 위탁되 고 중앙에 집중시켜 공유되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독립된 방들을 갖추었던 기존의 거대한 도시 주택과는 달리 단일 레벨의 소규모 아파트로 공간구성의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부엌이 없는 가정(kitchen-less family homes)이라는 질만의 아이디어 가 혁명적이기는 하였지만 온전히 효율성의 논리 하에 도출된 것이었기 때문에, 집에 서 요리한 식사가 가족 구성원들의 유대에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거주자의 인간적 욕 구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가 없었다. 그 결과 아파트먼트 호텔은 결국 가족보다는 싱 글과 같은 독신자 세대들에게 더욱 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하여 논의는 다시 효율적인 부엌 설계에 집중하게 되고, 오스트리아 여성 건축가 마가레테 쉬테 리호츠키(Margarete Schütte-Lihotsky)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사회 주거 프로젝트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소위 ‘프랑크푸르트 부엌’(Frankfurter Küche)이 관심을 모으게 된다. 그 결과 하인들의 작업장일 뿐만 아니라 생활공간이기 도 하였던 넓고 개방적인 19세기의 부엌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비좁은 20세 기의 부엌이 효율성에 있어서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받게 되었다.183
182 Dolores Hayden, The Grand Domestic Revolution: A History of Feminist Designs for American Homes, Neighborhoods and Cities, MIT Press, 1982 참조.
183 최근 서구에서는 근대적 방식으로 계획된 부엌보다 이러한 19세기의 넓은 부엌 공간을 더 욱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현대적 라이프스타일이 근대적 가치와는 다른 지향점을 추구한다 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그림 3-5] 19세기 유럽의 부엌 (좌) / 1926년 프랑크푸르트 부엌 (우)
물론 각 나라마다 문화나 역사가 달라 프랑크푸르트 부엌을 곧바로 적용시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모델로서 각각의 상황에 맞게 변형되었으며 독일 식 부엌 가구의 수입도 장려되었다. 즉 부엌에서의 효율성에는 2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요리와 설거지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을 경감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효율적이고 저렴한 부엌가구의 대량생산과 관련이 있었으며 이는 더욱 정확하 게는 가구 유니트의 표준화로 이어졌다.
이처럼 가사노동이 집중되는 부엌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효율성과 경제성의 원 리는, 프레더릭의 다이어그램과 프랑크푸르트 부엌에서와 같이 ‘동선’에 대한 관심 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동선은 부엌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각 실의 효율적 이고 기능적인 배치에서도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효율적 동선은 포디즘적인 과 학적 합리성에 근거한 것으로 “수많은 행위 중 선택되어 환원된 움직임”184 을 의미 한다.
184 서정연, Bernard Tshumi의 초기 작품을 중심으로 본 움직임 연구, 한국실내디자인학회 논 문집 : v.18 n.1 (통권 72호), 2009, p.30.
[그림 3-6] 알렉산더 클라인의 다이어그램 (1929년)
합리적 가치의 추구를 위한 기능적 공간 구성은 효율적 동선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각 실에서의 기능의 순화 및 분화와도 연결되면서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의 분리와 거실, 다이닝룸 등 각 실의 기능 부여를 통해 다용도의 공간 활용보다는 공간의 분화 및 구 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구 근대 주거의 이러한 기능중심의 효율적 동선 배치 및 공간 구성은 국내 아파트단지에서도 그대로 도입되어 나타난다.
즉 부엌은 비단 서구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비합리적인 것의 대명사로 여겨 졌는데, 국내 역시 1970년대에 들어서 가정부로 고용할 수 있는 노동자 수가 감소하 고 중산층이나 상류층 주부들이 아파트에서 직접 부엌일에 종사하게 되면서, 보다 편 리한 구조와 설비 그리고 시설을 갖추는 방향으로 개선되도록 요구되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단독주택보다는 부엌과 내부의 주거공간이 생활에 편리하도록 설계되어진 아파 트가 주부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현대화된 부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파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였다. 185
또한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구성은 단위세대 내부의 기능적 공간 구성 뿐만 아니라 단 지 계획에도 적용되어 나타난다. 단지 차원에서 고층고밀의 직각배치가 일반화된 것도 인동간격과 평등한 거주조건의 확보뿐만 아니라 동선의 효율성에도 기인하였다. 옥외 공간은 그 공간이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기본 기능을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수 행할 수 있도록 계획되는 것이 우선시되면서, 거주자들을 위한 일상생활공간으로서의 의미보다는 기능위주, 편리위주의 공간배치가 선행하게 된다.
특히 자가용 보유율의 급격한 증가로 단지내 주차공간 확보에 대한 수요자의 요구가 법규제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외부공간은 기본적인 거주자들의 생활내용을 수용하는 공 185 함한희, 부엌의 문화사, 살림, 2005, pp.5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