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소비와 수요의 영역 : 주거의 상품화
3.3.4 주거문화특성 : 삶의 양식화와 문화적 평준화
보편적인 핵가족이라는 거주자를 상정하고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가장 무난하고 범용 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면서, 거의 동일한 공간 논리를 가진 획일성은 비단 공간 차원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기는 삶의 내용까지도 표준적 스타일로 양 식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파트라는 표준화된 물리적 획일성은 거주자의 일상적 삶까지 패키지된 상태로 제공하는 것이며, 이는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삶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아파트가 획일적이라는 지적은 주거동의 모양이 똑같다는 점을 탓하는 것 이 아니라 아파트단지에서의 생활이 단조롭고 무료한 것이어서 삶의 활력을 갖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획일적이라는 말을 단순히 모양이 같아 문제 라고 이해하는 것은 그 말의 속내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설픈 진단에 불과하 다.”249
삶의 양식화는 비단 접지성이 결여되고 균질한 단위세대 내부 공간뿐만 아니라, ‘단 지’라는 물리적 형식으로 인한 단조로운 공간 조직과 열린 사회적 공간의 상실, 그로 인한 지루한 풍경과 무미건조한 경험에서도 발생한다. 즉 표준적이고 균질한 공간들의 병렬은 그 안의 삶까지도 그러한 방식으로 획일화시키며 다채로운 삶의 활력을 사라지 게 한다.
“이곳(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뒤 특별하게 달라진 것은 아직까지 백화점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낮잠을 즐긴 것은 기껏해야 한 두 번에 불과하다. 글쓰기나 책 읽기를 떠나 서재에 머무르는 시간도 무척 많아졌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런 변화가 생겼을 터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백화점 나들이는 아파트에서의 무료함을 보상하기 위한 도피처인 셈이었고, 물건을 구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낮잠 시간이 거의 없어진 것 역시 신체의 피곤함보다는 아파트 생활의 무료함이 가져온 연쇄작용이 아 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서재에 머무르는 시간은 처음으로 나를 위한 공간 을 갖게 되니 자꾸 보듬고 싶어 그리 되었다고 하겠다.”250
그러나 아파트의 단조로우며 폐쇄적인 공간조직으로 인한 삶의 양식화는 여전한 반면, 이러한 현실을 가리기 위한 아파트 단지의 과시적 경쟁은 치열해진다. 남의 눈에 잘 띄어야 하며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게 하고 남들로 하여금 자신을 높이 올 려다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하에 아파트 단지는 점점 더 초고층화, 대 단지화되며, 아파트 외벽을 장식하는 브랜드 로고와 상층부 장식은 더욱 거대해지고 화려해진다.
아파트 단지 간에는 그 외형과 외관을 통해 과시적 경쟁이 치열해진다면, 동일 단지 내부에서는 특별히 거주자의 개성을 외관에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단위세대 내부공간이 문화적 쇼윈도 역할을 파며 과시적 전시성 공간이 될 공산이 크다. 집 꾸 미기의 주요한 참조점이 되는 모델하우스에서의 과시적 장식 경향은 집이 다 지어진 뒤 다시 “구경하는 집”251 으로 이어지는데, 아파트의 외관이 단지 차원에서의 사회
249 박철수 ․ 박인석, 아파트와 바꾼집, 도서출판 동녘, 2012, p.34.
250 박철수 ․ 박인석, 아파트와 바꾼집, 도서출판 동녘, 2012, pp.272-273.
251 ‘구경하는 집’을 찾으면 각종 고급스런 커튼재료와 휘황찬란한 조명기구들, 기본적으로 주어진 설비와 기기를 뜯어내고 고급스런 것으로 대체한 대체설비들과 번쩍이는 바닥재 그리고 황금색으로 칠해진 욕실기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철수, 현재성을 갖는 과거 - 설계관행의 출발 점, 공간, 2003년 9월호, p.101
적 지위와 신분의 상징이라면, 아파트 내부 공간은 각 거주자의 개성과 취향이 드러나 는 각 세대 간의 경쟁 공간인 것이다. 특히 거실은 다른 공간들보다도 더욱 지위 표출 공간으로서 전시성이 강조되어 왔다.
그 결과 아이러니한 모순이 발생하는데, 외형적 모습뿐만 아니라 내부공간도 획일적으 로 동일하게 주어지는 아파트에서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경쟁과 모방의 부추김은 역 설적으로 문화적 평준화 혹은 평등주의로 귀결”252 된다는 점이다. 옆집과 쉽게 비교 가능한 동일한 공간적 상황 하에서, 경쟁과 모방을 부추기며 가족 특유의 개성과 상관 없이 실내장식이 집단적으로 획일화되는 경향은 아파트에서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 상이다.253
사실 아파트에서는 각 실별로 가구의 종류 및 나열이 거의 동일한데, 비례나 구성이 동일한 획일적 공간구조라는 아파트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경쟁이 오히려 취미와 취향 자체의 획일화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는 나름의 개성을 찾고자 하는 신흥 중산층이 각 개인의 실제적인 취향과 안목 등의 문화자본이 결여된 상황에서 천편일률적 겉치장에 휩쓸린 데서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인테리어가 아무리 개성을 드러낸다고 해 도 결국 그 시대의 한정된 물자를 이용해야 한다는 면에서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러 나 아파트의 경우에는 공간 자체의 획일성과 균질함으로 인해 더욱 평준화될 개연성이 높고 또 실제로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중산층의 획일적 문화주의는 한편으로는 소비주의를 촉진시키며 자본주 의를 확대재생산 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기능 역시 담당한다. 우리가 흔히 대중문화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 진정 대중이 원하고 그들에 의해 생산된 자생적인 것이기 보다 미디 어에 의해 문화적 내용이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런 견지에서 보 면 이러한 주거문화 평준화 현상은 소비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용이한 기반이 되며 일원화된 가치에 의한 경쟁에 지배되는 우리 삶의 실제적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1998년에는 분양가가 자율화되면서, 건설업체들은 내부 장식의 고급화와 첨단설
252 아파트에서의 닮은 삶을 조명하는 박완서의 소설 ‘닮은 방들’에서의 주인공 역시 편리함 과 독립성을 위해 아파트로 이사하지만 점차 평균적인 아파트 문화에 동화되어 간다. 그에게 동일 한 아파트 공간 내에서 동일한 삶의 패턴을 이루며 살아가면서 형성되는 흉내 내기와 획일화된 삶은 벗어나야 하는 일종의 압박이 된다. 전남일·양세화·홍형옥, 한국 주거의 미시사, 돌베게, 2009, pp.176.
253 은난순, 1980년대 이후 한국 주거문화에 나타난 근대화의 재평가, 한국가정관리학회지, 제 22권 제5호, 2004, pp.64-65.
비를 통한 아파트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는 도시주거의 풍요로운 공간 환경이 결여된 자리를 첨단 설비와 기능향상 그리고 과시적 장식으로 채워 넣으며 사 람들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보이지 않는 삶의 진정한 가치보다 눈에 보이는 외적 스펙터클을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빈약한 주거의 일상을 편리한 첨 단기기와 시각적 쾌락으로 가림으로써, 인간 본연의 감성과 정서 그리고 일상이 중요 하다는 기본적 진리는 은폐되어 갔다.
또한 문화는 대부분의 경우 시간적 차이를 두고 상류계급에서 하위계급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 외현적 양상이 과시적 장식으로 일관된다면 동일계층끼리는 평준 화될 수밖에 없고, 상대적으로 하위계급은 언제나 재현과 모방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 문에 이를 따라잡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소외만 되풀이될 뿐이다.
이와 같이 아파트단지의 물리적 환경의 획일성은 삶의 양식의 유사성과 관계를 맺으 며, 나아가 가치관과 의식의 획일화까지도 초래할 개연성이 높다. 또한 획일성에 기반 한 서열화와 경쟁은 오히려 문화적 평준화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러한 주 거유형의 특성을 기반으로 그동안 사회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이룩하기도 하였지만, 주 거가 일상적 삶을 담아내는 공간으로서 거주자의 의식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도 형성 한다는 점에서 주거의 동질성은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