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소비와 수요의 영역 : 주거의 상품화
3.3.3 주거선택 지향가치 : 자산의 증식과 신분의 상징
힘입어 낮은 비용으로 공급되었으며, 심각한 주택부족 때문에 분양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228 1970년대 후반 부동산 투기 붐이 일어 아파트 분양가격이 급등하고 민영아파트 신규 분양 시에 청약창구마다 장사진을 이루자 서울시는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아파트 층수제한과 용적률 을 완화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각종 대책은 기업의 생산효율성을 제고하는 지원책 이 되었다. 또한 민간아파트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공정의 20%가 되어야 분양할 수 있던 것을 공정의 10% 이상이면 분양할 수 있도록 하여 주택건설업체의 자금부담을 해소해 주었다. 즉 정부 는 주택난이라는 구실 아래 일관되게 친기업적인 정책을 추진해 왔다.
229 임서환, ‘거주의 예술’로서의 주택정책과 계획제도, 공간, 2003년 9월호, p.88.
상품화를 기반으로 한 각종 제도 속에서 단독주택에 비해 더 높은 가격상승의 경험은 아파트의 투자가치를 인식하게 하였고 아파트라는 주거유형의 선택에 있어서도 경제적 요인이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게 하였다.230 즉 아파트 도입 초기에는 온수 사용과 난 방 등 편리함과 관련된 우수한 거주성이 수요의 원인이었다면, 이후에는 높은 가격상 승률이 아파트 소비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주거에 대한 소비자의 관점 역 시 일상적 삶을 담는 장소로서의 의미보다 교환가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파트의 가격 상승은 아파트가 가장 안전하고 수익성이 높은 투자수단이라는 인식을 일반화시키며 부동산 투기의 대상이 되게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의 아파트의 엄청난 프리미엄과 높은 가격상승률로 인한 자산 가치는 아파트 선호를 높인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으며, 자가 소유자에게 아파트의 경제적 가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아파트 가격상승에 대한 경험적 학습은 아파트란 저축한 돈으로 사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대출을 받아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로 발전되었으 며, 따라서 집을 사기 위한 대출은 빚이 아니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은행대출을 레버리 지로 활용한 부동산 투기도 성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투자를 대부분의 중산층 은 당연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이를 통해 자산을 증식해 왔다. 특히 중대 형 평형일수록 가격 상승폭은 더욱 컸기 때문에, 자가 소유자들은 은행대출을 받아 집 을 늘려갔으며 전세 거주자들은 전세금이 상승하는 시기에 대출을 통해 자가 소유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중산층을 위한 도시주거로서 아파트의 상품화는 전적으로 당시 정부가 채택했던 주택 과 경제정책의 결과였고, 그 결과 경제적 능력이 있는 중산층 사이에서 아파트를 둘러 싸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으며 이 경쟁은 급기야 엄청난 ‘투기열풍’으로까지 이어 진 것이다.231 이와 더불어 고도성장, 소득증가, 높은 사회적·지리적 인구이동, 가계 여유자금의 축적, 인플레 경제 등은 주택을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만드는데 가세하였 으며, 따라서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사둬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230 단독주택은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건물가격은 제외하고 택지가격만을 기준으로 가격이 형성 되는 반면, 아파트의 가격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파 트와 달리 단독주택의 질을 평가하는 데에는 여러 요소들이 작용하는 데, 단독주택은 공법과 구 조, 자재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에 아파트처럼 보편적인 시세가 없으며 매매도 땅값을 중심으로 가격이 형성된다.
231 아파트 거주자들의 소극적 공동체의식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나,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재산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담합적 태도가 상당히 높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서도 아파 트 소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주택의 소유가 무엇보다 상품의 소유, 즉 자산으로 의미가 바뀌면서 주거선택 에 있어서도 ‘살기 좋은 집’보다는 ‘팔기 좋은 집’이 기준이 된다. 상품화란 무 엇보다 판매와 교환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누구나 거주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고 범 용적인 특징이 선호되는 것이다. 그 결과 상품화된 주택에서는 일반인들의 주택에 대 한 보편적 선호와 가치관이 공간구성에 강하게 반영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232
즉 주택상품화 및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인해 개성 있는 주택보다는 범용적 특성을 갖 는 주택이 상품가치가 높아지면서, 개별적 인간의 개성을 추구하는 것보다 누구에게나 편리하고 무난한 공간에 대한 요구를 수요자 스스로도 욕망한 바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과 가족의 삶에 맞는 집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시장에서 쉽게 사고 팔리 는 표준화된 주택상품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어차피 표준화된 아파트라면 유일한 차별 화는 건설회사이기 때문에 대기업의 브랜드는 더욱 믿을만한 상품 가치로 부각되는 것 이다.
이와 같이 아파트 그리고 아파트단지가 하나의 상품이자 교환가치로서 주택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은 한국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사회 전체적으로 경쟁의 공정성과 분배의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성장해 온 것과 마찬 가지로, 주택의 공급과 배분과정 역시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우리 의 주거 지향가치에도 그대로 녹아있는데, 투기심리가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던 것 처럼 주택에 있어서도 신규공급 아파트를 분양받고 주거이동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는 경쟁적 현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파트는 축재의 수단 혹은 원천이라는 동태적 의미에 기반하여, 부와 신분의 상징이라는 정태적 차원과 결부되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내 집 마련이 생 존을 위한 최소한의 거처나 단란한 가족생활을 위해 필요한 공간에서 자산의 소유와 증식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변화하면서 그리고 이에 대한 기업의 광고 이데올로기 가 가세하면서 아파트는 점차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라는 특성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저소득층의 경우에는 주거가 여전히 가족의 생존과 휴식 등 안락한 가정생활을 위한 거처나 안식처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중산층 이상으로 갈수록 단순한 물리적 주택의 의미를 넘어서서 자산의 증식뿐만 아니라 주택을 통해 사회적 위세를 드러내고 자 하는 열망이 강해진다.233
232 강인호·한필원, 주거의 문화적 의미, 세진사, 2000, p.232.
233 계층에 따라 주거의 의미와 가치는 다르게 나타난다. 저소득층에게 주거는 독립된 생활과
19세기 서구사회에서도 새로운 부를 바탕으로 출현한 부르주아들은 그들이 새로 획득 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과거 귀족계급에 의해 향유되어 왔던 문화양식 을 답습하려는 경향을 보였다.234 주택의 과시성이 새롭게 계급상승을 이룬 계층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라면, 경제성장으로 급격히 늘어난 국내 중산계층에 있어 아파 트가 강한 상징성과 과시성을 갖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베블렌도 벼락부자가 된 자본가들과 그 가족들의 ‘과시적 소비’에 주목하면서, 돈으 로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권력과 가치관을 과시하는 새로운 엘리트를 발견한 바 있다.
즉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보장해주는 신분적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는 구체적인 외부 기호에 의존하고자 하는데,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외부 기호가 경제적 상 징성에 치중되면서 물질적 부를 드러내는 기호만이 엘리트적 가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특성들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정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의 상품화가 진전될수록 주 거의 상징성은 편리함에 더하여 아파트 거주자들이 아파트를 선택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아파트 공급이 한정적이었던 초기에는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신분을 과시할 수 있었지만,235 아파트 거주가 점차 일반화되면서 단독주택과 아파트 간의 계층 분화는 심해진 반면 아파트에 거주하는 계층은 과거 중산층에서 상 류층 및 중하계층까지로 넓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것만으로 는 신분의 상징이라고 볼 수 없으며, 이러한 배경 하에서 각 건설업체는 기호 가치에 대한 요구를 자극하는 차별화 전략을 모색하게 된다.
사실 초반에 별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마포아파트도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와 영화 제작 등을 통해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던 점을 생각해 보더라도, 아파트가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가 어떠한가는 구매의 강력한 동인이 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위협적 세상에 대한 안전과 보호의 안식처로 인식되는 반면,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보다 외 부지향적이고 상징적인 가치가 중시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폐쇄사회의 상류층은 주택을 지위표출 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 반면, 새로운 엘리트층은 주택을 지위상징의 수단으로 중시하고 있다 는 점이다. 이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이나 이주한 중산계급은 자신의 지위가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주택이나 소비재를 전시용으로 이용하려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234 Fishman, Robert, Bourgeois utopias : the rise and fall of suburbia, 박영한·구동회 옮 김, 부르주아 유토피아, 한울, 2000.
235 장성수, 1960-1970년대 한국 아파트의 변천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p.3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