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팃은 비지배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공통적 지식 (common knowledge)’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민 사이의 간주 관적인 심리적 공유는 권력자의 전략적인 자의성과 조작가능성을 집단적으로 차단하는 효과와 함께 시민 사이의 권력관계가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 의 긴장을 자체적으로 유지시켜주는 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공통적 지식’의 조건은 자유주의에서는 간섭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공화주의에서는 비지배 자유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자유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 A입장에서 국가 권력자가 복지 정책 X를 시행하는 경우, 그 정책 X가 자신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고 오히려 혜택 을 준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런데 경제 전문가인 시민 B가 그 정책 X는 시민 A에게 단기적으로 달콤한 정책으로 보여 지지만, 장기적으로 는 세금의 증대로 인해 오히려 시민 A에게 불리한 정책이라는 것을 알려주면 서 정책 X의 시행에 대해 반대할 것을 충고할 수 있다. 이때 정책 X에 대한 희망에 젖어 있는 시민 A입장에서는 시민 B의 충고가 간섭으로 여겨질 수 있 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간섭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페팃이 구상 하는 공화주의 국가라면, 시민 A는 시민 B의 충고가 그들 모두의 비지배 자 유를 유지하고 확보할 수 있는 훌륭한 조언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동시에 공 화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A는 이러한 혜택을 주는 ‘공통적 지식’의 필요성에 대해 인정하고 수용하게 될 것이다.
페팃의 공화주의에서 ‘공통적 지식’이 필요한 근본적 이유는 만일 ‘공통적 지식’이 없다면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시민들의 비지배 자유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페팃은 제도와 비지배간의 인과성을 부인하면서, 단지 시민 들은 그 제도들을 구성함으로써 비지배를 향유한다고 본다(Pettit, 1997:
107-108). 쉽게 말하면, A라는 제도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X라는 비지배가 형 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X라는 비지배는 원래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 지만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A라는 제도는 B제도, C제도 등 다른 제도들의 연쇄적인 반응과 시민들의 ‘공통의 지식’이 결합되면서 원래 존재했었던 X라 는 비지배가 드디어 실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Pettit, 1997: 107-108). 따라
서 비지배는 인과적 필연성에 입각해서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제도와 정책을 시민들 스스로가 구성할 때 향유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도가 잘 제정 되었으니 이제 비지배가 보장되겠구나.”라는 생각은 안일한 생각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하나의 제도만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비지배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공통적 지식’이라는 원칙에 입각하 여 서로가 협력하고 시민적 우정을 발휘하여 여러 제도들을 구성해내야만 진 정한 비지배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페팃은 비지배 자유가 ‘사회적 선(social good)’인 동시에 ‘공동선 (common good)’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비지배 자유는 시민들의 연대감(solidarity)과 상호작용(interactive dispositions)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 하다고 본다(Pettit, 1997: 121). 비지배 자유는 공공재처럼 비배제성의 특징을 가지며, 어떤 이의 선의 증진으로 인한 어떤 이의 선의 감소는 있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단순히 A라는 제도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비지배를 달성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지속적으로 비지배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의 연대와 협력 이 필요하다. 만일 이러한 연대와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비지배 자유가 유지되지 못할 가능성도 높아질뿐더러, 특정 시민의 비지배 자유 보장이 다른 시민의 비지배 자유의 권리를 침범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페팃의 ‘공통적 지식’의 개념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공 동체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샌델의 ‘구성적 공동체’ 개념과 공유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 본 연구의 판단이다. 샌델은 롤스를 비롯한 절차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무연고적 자아(unencumbed self)의 개념을 반대한다.
무연고적 자아는 시민 자신의 지적, 사회적 조건을 인식론적 차원에서 괄호를 치는 것으로, 자신의 지적 능력이 얼마인지, 자신이 속한 가족, 직장 등과 같 은 공동체의 관계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당 공동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착근성(embeddedness)과 고유한 맥락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시민들 사 이의 상호 관련성을 무시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샌델은 무연고적 자아관은 공동체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며, 공동선의 추구에 있어 비정상적 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샌델은 절차적 자유주의가 무연고적 자아를 채택하고, 착근성을 부정하는 이유로서 절차적 자유주의자들이 수용하는 ‘도덕적 개인주의(moral individualism)’를 지목한다.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은 자유란 개인이 자발적으로 합의하고 동의한 의무만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본다(Sandel, 2010: 213). 샌델이 보기에 이러한 개인주의적 사고는 결국 공동체의 전통과 역사에 의해 발생하 는 의무를 부정하게 만든다. 즉 도덕적 개인주의는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역 할을 부정하거나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샌 델이 보기에 이러한 도덕적 개인주의는 칸트와 로크,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 의 철학의 흐름 속에서 정당화되어 온 것으로서, 인간이 지닌 서사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샌델은 매킨타이어의 의견에 따라, 인간은 서사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샌델은 인간이 살면서 서사적 탐색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 한 탐색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고민’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선택 과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더욱 가깝다고 주장한다(Sandel, 2010: 221-222). 그러면서 그는 “내 앞에 놓인 어느 길이 내 삶의 궤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지는 나보다 남이 더 분명히 알 수도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서사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러한 가능성을 허용 하는 미덕이 있다.”고 주장한다(Sandel, 2010: 222). 이러한 주장을 통해, 샌델 은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전통의 맥락을 부정 하고, 자신들의 선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관점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샌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펼쳐진 배경과 맥락을 고민해야 함 을 강조하면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인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의 조언과 협조 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공동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과정은 그 스스 로의 이야기(narrative)를 통해서 가능한데, 이러한 이야기의 정확한 이해는 타 인과의 나눔과 협력 속에서만 가능하다(이양수, 2005: 321). 따라서 샌델에게 공동체는 단순한 ‘선택적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해줄 수 있 는 ‘구성적 공동체’로 간주되며, 롤스가 말한 ‘수단적 협력으로서의 공동체’나
‘정서적 교감으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양태를 구성해 줄 수 있
는 필수적인 기초로서의 공동체’인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정’의 가치와 관련하여, 페팃은 ‘공통적 지식’, 샌델 은 ‘구성적 공동체’의 개념을 통해 이들이 ‘우정’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페팃의 ‘공통적 지식’은 오로지 비지배 자유를 위해서만 필요 한 것이기 때문에, “샌델의 ‘구성적 공동체’가 요구하는 것처럼 다소 강한 유 대감은 필요 없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페팃은 여 전히 약한 유대감, 샌델은 강한 유대감을 전제로 하고 있지는 않나?”라는 지 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이들의 유대감에 대한 강조의 차이점을 떠나, 페팃의 ‘지배받지 않으려는 공통의 연대’는 샌델의 ‘보다 좋은 삶을 영위 하기 위한 구성적 공동체의 개념’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향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두 학자의 수렴 지점이 존재한다는 판단이다. 샌델이 강조하는 좋은 삶이라는 것도 결국 공동체 자치 능력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러한 삶 의 통제권 회복을 위한 노력은 페팃이 강조하는 비지배 자유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수의 사람에게 피해를 유발하여 소수의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공리주의를 정의의 원칙으로 삼을 수 없 다고 주장한 부분과,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대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면서 자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부분에서 ‘전정치적 (pre-political) 방식’을 거부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비지배의 삶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지속적으로 이성적이고 언 어적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폭력과 강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치적 해법들을 설명하듯이, 샌델 역시도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가 지닌 지배적 구조를 비 판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논쟁들을 공론화시키는 데 주력한다. 이것은 바로 아렌트와 샌델이 사회나 국가에 잠재되어 있는 자의적 지배와 폭력을 경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안은 경제 성장에 따른 분배 정의의 문제, 환경 문제, 먹거리 안정성 문제, 인권 문제, 양성 평등 문제, 동성애 문제, 대학 입시 문제 등등의 것들인데, 이 러한 논쟁적 이슈들 대부분이 비지배 자유의 보장과 관련된 논쟁이기는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