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전통은 단지 ‘견제력으로서의 덕성’을 강조하고, 아테네 전통은 ‘적극적 정치 참여로서의 덕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로마 전통이 견제력을 넘어 적극 적 정치 참여로서의 덕성을 강조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면, 두 전통 사이의 수렴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견제력으로서의 덕성’과 ‘적극적 정치 참여로서의 덕성’이라는 외형적 대립 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 두 이론은 ‘정치’를 통해 인간이 시민이 되어 가는 과정을 공히 인정하고, ‘공화(res publica)’, 즉, ‘공동선을 위해 공동으로 정치 에 참여하는 과정’을 강조하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현대적 지류(支流)라는 점에 서 서로 수렴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치(self-rule)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Sandel, 2015: 45).
페팃이 ‘견제력’의 수준을 넘어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 는 근거는 그의 헌정주의가 ‘자유주의적 헌정주의’보다는 ‘공화주의적 헌정주 의’에 속한다는 점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비록 페팃이 파벌들의 선동 가 능성에 대한 경계로 인해, 민주주의 보다는 법과 제도를 강조하는 로마 전통 의 공화주의를 강조하지만, 헌정주의의 스펙트럼 상에서 그의 공화주의는 ‘자 유주의적 헌정주의’보다는 ‘공화주의적 헌정주의’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적극적 정치 참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적 헌정주의’는 시민에 대한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 로 헌법을 규정한다. 이러한 경향은 인간의 권리는 천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자유주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헌법의 주요한 기능은 국가의 시민에 대한 간섭과 개입을 제한하는 데 있다(곽준혁, 2005: 39). 이에 반해, ‘공화주의적 헌 정주의’는 국가 권력을 법을 통해 제한하기 보다는 시민의 견제력을 통해 국 가 권력을 통제하는 데 초점을 둔다(곽준혁, 2005: 39). 이러한 경향은 인간의 권리는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에 의해 구성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두 이론 모두 정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동일한 관점을 지니고 있지만, ‘자의적 정부를 법으로 통제’하려고 하려는 입장이 ‘자유주의적 헌정주 의’라면, ‘시민들의 견제’로 조정하려는 입장이 ‘공화주의적 헌정주의’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이론의 결정적 차이점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그들의 입장’에 달려 있다. ‘자유주의적 헌정주의’는 오로지 정부 권력의 상호 견제와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하는 반면, ‘공화주 의적 헌정주의’는 ‘법이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법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민주주의를 최대한 수용’하려고 한다. ‘공화주의적 헌정주의’는 ‘자유주의적 헌정주의’와 달리, 정부의 정책에 대한 모든 사안을 공적토론과 비판적 검열의 대상으로 놓으려 하고, 변화의 요구들에 대하여 공 청회와 포럼을 통해 해결하려는 반응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의 결합 을 최대한 도모한다.
페팃이 견제력에 그치지 않고 더욱 적극적 정치 참여를 강조하는 정확한 근 거는 “비지배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헌정주의적 제약과 관련된 논의보다 실은 더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개념”이라고 강조하는(Pettit, 1997:
200-201) 그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체계적으로 논의 한 성공적 공화국의 조건들이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그러한 조건들이 예상하 지 못한 경로로 이탈하거나 그럼으로써 시민들의 비지배를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민주주의적 견제력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말 한다(Pettit, 1997: 200-201). 국가의 헌정적 조건들이 비지배를 보장하지 못할
경우, 해당 조건에 대한 정치적 논쟁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정치적 부당 함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본 연구는 페팃을 단순 히 정책에 대한 ‘반다수결주의자’ 혹은 ‘약한 공화주의자’로 치부하기 보다는,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민주적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적극적 공화주의자’로 평가될 여지가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샌델 역시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정치 참여 를 통해 삶의 통제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통제권 은 페팃이 말하는 비지배 자유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본 연구의 입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화주의 전통에서 샌델은 합리적 이성을 통해 동료 시민들 과 개방된 분위기에서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기준을 찾는 토론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권장한다. 그는 혼자가 아니고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좋은 삶의 기준을 찾아야만 자신의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샌델은 최선의 기준은 혼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다. “우리가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 처했을 때, 옳은 행위에 관한 판단을 재검 토하거나 애초에 옹호하던 원칙을 재고한다. 또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의 판단과 원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판단에 비추어 원칙을 재고하 고 원칙에 비추어 판단을 재고한다. 이처럼 행동의 세계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또 그 반대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바로 도덕적 사고의 기본이다”라고 주장한 다(Sandel, 2009: 28-29). 그러나 샌델은 우리가 타인과 대화를 나누거나 토론 을 할 때 더욱 최선의 기준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Sandel, 2009: 28-29).
즉 자기 스스로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기 주위에 있 는 가족, 친구, 동료, 다른 시민과 함께 토론을 했을 경우에만, 우리에게 주어 진 좋은 삶의 기준과 분배 정의와 같은 도덕적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 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도덕적 반성과 토론의 방식이 정치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사고를 정치에 적용할 때, 어떤 법으로 사회를 다스릴지 질문을 던질 때, 도시 는 술렁이고 사람들은 여러 주장과 사건으로 들끓게 마련이다. 구제금융, 가격폭리, 소 득 불평등, 소수집단우대정책, 병역, 동성혼을 둘러싼 논쟁은 정치철학과 관련이 있다.
이 문제들은 가족과 친구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시민들을 상대로, 자신의 도덕적․정치 적 신념을 명확히 하고 그 신념의 정당성을 증명하라고 촉구한다(Sandel, 2009: -29).
이러한 주장을 통해 샌델이 왜 우리에게 토론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다. 그 는 우리의 삶의 지배할 수 있는 여러 도덕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하지 않으면,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대화나 토론을 하지 않으면 결국에 는 우리는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도덕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우리의 도시에서의 자유와 행복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샌델이 말하는 토론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 고 여러 도덕적 현안들이 설령 합의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문제 들에 대해 스스로 고민해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일이 될 것이라는 점 을 명확히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샌델 역시 페팃이 강조하는 비지배 자 유의 중요성에 대해 동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페팃이 ‘공화주의적 헌정주의’를 표방하고, 샌델이 비지배 자유와 거의 유사 한 삶을 추구한다는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페팃과 샌델 모두 적극적으 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적 덕성을 강조하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현대 공화주의를 도덕 교육에 적용할 때, ‘현대 공화주의적 덕성’을 ‘정치적 현안과 제도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참여’로 규정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