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팃은 나의 비지배를 보장하고 증진하기 때문에 내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 의 간섭이라면 그것은 ‘허용될 수 있는 간섭’이라고 주장한다(Pettit, 1997:
24-25). 만일 어떠한 간섭이 나를 ‘지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나를 ‘지배 의 영역에서 구출하려는 의도’를 지닌다면, 설령 그것이 겉으로는 간섭이라 보 일지라도, 실제로 장기적으로 보면 나의 비지배를 보장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 러한 간섭은 수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만일 비지배를 보장하려는 간섭이 ‘간헐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행해질 경우, 그러한 간섭은 우리가 수용해서는 안 되는 간섭이며, 만일 이를 수용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간섭에서 우연성을 제거해야만 한다(Pettit, 1997:
24-25). 만일,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잘 보여서 그에게서 ‘지배 없는 간섭’을 받았지만, 그가 어느 순간 감정적으로 돌변하여 우리를 지배하여 자의적인 개입을 한다면,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가 비지배 자 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페팃에 따르면, 공화주의 전통에서 이러한 ‘우연성’의 위험성을 줄여주는 핵 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Pettit, 1997: 35). 인민의 이익에 체 계적으로 응답하는 법은 간섭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인민의 자유를 훼손 시키지는 않는다. 즉 페팃에게 법은 그 자체로 개인에게 간섭의 요소로 작용 할 수 있지만, 그 법의 제정과 적용이 누군가의 의도적 지배에 의한 것이 아 닌 동시에 인민의 공통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면 자의적인 것으로 볼 수 없 기 때문에 인민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페팃과 같은 로마 전통 공화주의자인 비롤리도 “시민권, 즉 키비타스(civitas)의 주요 특징은 법 의 지배(Viroli, 1990: 149)”라고 주장하였다.
법 그 자체는 항상 억압과 강압의 요소를 지녔기에, 인간의 자유를 침범한 다고 주장하는 홉스의 비판에 대해 페팃은 공화국의 법은 공화국의 ‘시민들 스스로’가 만들기 때문에 자의성이 발생할 여지는 없다고 반박한다(Pettit, 1997: 39). 이처럼 페팃과 홉스가 법에 대해 상반된 관점을 가지는 이유는, 비 간섭을 옹호하는 홉스의 자유주의가 모든 법률 체제를 ‘손상’이라고 간주하는 반면, 비지배를 옹호하는 페팃의 공화주의는 법률 체제를 ‘조건’으로 보기 때 문이다(Pettit, 1997: 84-85). 즉 페팃은 이상적인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조건 으로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페팃은 비지배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호 권력의 전략(strategic of reciprocal power)’과 ‘헌법 규정의 전략(strategic of constitutional provision)’
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Pettit, 1997: 67). ‘상호 권력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지 배자와 피지배자의 권력을 같게 만드는 전략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 권력의 전략’은 정치적 권력 구조의 현실 속에서 ‘실현가능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권력을 서로 같게 만들어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쉽 지 않다는 점에서 비지배 달성을 위한 전략으로서 그 한계점이 존재한다
(Pettit, 1997: 67). 예를 들어, 현실에서 서로 같은 권력을 가지려면 입법과 사 법 등의 헌법적, 법률적 영역에서 ‘권력의 등가성’을 실현해야 하는데, 대통령 과 국회의원의 힘을 같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국회의원과 일반 공무원의 권력을 같게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설령 현재는 동일한 권 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피지배자 입장에서 지배자의 ‘보이지 않는 압력’
에 언제라도 권력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으며, 지배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 는 피지배자 동료들의 배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가 존재하지 않는 상호적 권력의 전략은 단지 이상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페팃은 ‘상호적 권력의 전략’은 그 자체의 실현가능성의 한계로 인해, 그보 다는 오히려 ‘헌법 규정의 전략’에 많은 기대를 건다(Pettit, 1997: 67-68). ‘헌 법 규정의 전략’은 지배자의 자의적인 간섭에 대해 자기 스스로 방어해 내는 것이 아니라, 헌법적인 권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서 자의적인 간섭을 하는 사 람들의 힘을 무력화시킨다. 헌법적 권위가 시민들을 지배할 수 없는 까닭은 그러한 헌법이 ‘시민들의 공동선’에 입각하여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지배하는 자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헌법적 권위를 의식한다면, 이러한 체제의 사회에서 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자의적인 간섭에 대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권력을 행사하던 자들이 이러한 헌법 조항의 범주 에 들어오려고 할까? 페팃은 결국 이러한 헌법 조항에 대한 조정이 이루어지 지 않으면 지배자들 역시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게 되는 위치에 놓 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헌법 규정의 전략’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전략이라고 주장한다(Pettit, 1997: 68).
헌법적 권위는 사람들을 지배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용 가능한 선택을 일관되게 제 한하거나, 그러한 선택에 더 큰 희생이 따르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법률체제 와 정부든 특정한 선택지들이 더 이상 행위자에게 이용 가능하지 않으며, 최소한 더 이상 이전처럼 이용 가능하지 않는 현실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률체제와 정부 는 다양한 선택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적절하게 강제적 압력들을 사용하게 된다. …
(중략)… 그러나 비록 헌법 규정 전략이 이러한 단점을 가지고는 있지만, 상호 권력 전
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보다는 비지배 달성에 있어 보다 가능성이 높다(Pettit, 1997:
93).
물론 위의 페팃의 주장처럼 ‘헌법 규정 전략’은 기존의 지배자나 공직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선택지들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 에서, 그들에게 강제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헌법 규정 전략은 시민들이 공통의 지식으로서 법의 정당성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법 규정을 수용하는 데 있어 별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페팃의 생각이다. 또 한 ‘상호 권력의 전략’은 비지배 달성을 위해 사적 영역의 노력에만 머물게 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분산된 방법과 전략을 쓸 수밖에 없으므로 심각 한 약점들이 발생할 것(Pettit, 1997: 95)이라고 보는 페팃의 입장에서 헌법 규 정은 상호 권력의 전략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우선하여 고려되어야 할 ‘법치의 제 1요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