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팃은 비지배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자신 스스로도 자신의 자유가 증진되고 보호되어야만 함을 심리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야 하며, 이러 한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비지배 자유에 대한 관심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Pettit, 1997:
70-72). 내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점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머무른다 면, ‘우연히’ 타인의 지배와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영원 히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사회에 속한 개 별적 시민들이 비지배를 누려야 한다는 이러한 상호주관적 인식을 공유한다면 지배자의 조작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개인들이
‘친절해 보이는 주인’에 의해 비지배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오 류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또한, 지배자에 대항하는 피지배자들의 ‘공통적 지식’은 지배자들이 지닐 수 있는 자의성을 규제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 서로가 서로에게 지 배적 권력을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이 러한 상호주관적 지식은 비지배의 필요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페팃은
‘불간섭 자유’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전통은 ‘공통적 지식’을 ‘간섭’으로만 바라 본다고 주장한다(Pettit, 1997: 72-73). 자유주의는 개인의 삶을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공통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바로 이러한 공 통적 지식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비지배 자유와 불간섭 자유의 차이로 드러나 는 것이다.
‘공통적 지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공동체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는 페팃이 주장하는 ‘구조적 평 등주의’ 개념과도 연결된다. 페팃은 ‘물질적 평등주의(material egalitarianism)’
의 실현 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 평등주의(structural egalitarianism)’의 실현 이라고 주장한다(Pettit, 1997: 113-119). 국가의 제도로 인한 혜택의 수혜자가 있을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제도로 인한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혜택을 받는
당사자, 즉 비지배의 향유를 보다 많이 누릴 수 있는 사람과 그 제도로 인해 오히려 비지배 자유가 감소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경우, 비지배 자유의 ‘범 위’가 확보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누군가의 비지배 증진이 누군가의 비지배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비지배 자유의 ‘범위’의 문제에 이어, ‘강도’의 문제를 따져보자. X라는 정책 으로 인해, 어떤 사람이 비지배를 향유하게 되었는데 그 증가분이 A이고, 어 떤 사람은 비지배가 감소되었는데 그 감소분이 B라고 가정해보자. 페팃은 그 러한 X라는 평등적이지 않은 정책을 감행했을 때, A가 반드시 B보다 커야만 정책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A가 B보다 항상 클 것이라는 장담 을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Pettit, 1997: 114-115). 따라서 평등하지 않은 정 책을 펴는 것이 비지배 자유를 극대화한다고 볼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 지배 자유는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평등주의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즉 비 지배의 향유는 사회 전체의 권력비율에 따르는 구조적 관계 혹은 함수 관계이 다. 이러한 비지배 자유의 ‘범위’와 ‘강도’의 문제와 같은 구조적 함수를 잘 해 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공통적 지식의 역할이다.
우리나라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율형 사립고 폐지’ 논쟁을 예로 들어보 자. 자율형 사립고를 폐지하고 모두 일반고로 전환하려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 이 쉽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러한 교육 정책이 모든 사람의 비지배 자유를 증 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율형 사립고에 보내고 싶어도 경제적 사정으 로 인해 자녀를 일반고에 보낼 수밖에 없던 부모의 경우, 지배의 입장에서 비 지배의 입장으로 변환되는 반면, 자녀를 자율형 사립고에 입학시켜 보다 양질 의 교육을 받게 하고자 하는 물질적으로 넉넉한 부모의 경우, 비지배의 입장 에서 지배의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비지배 향유가 또 다른 누군가의 비지배를 감소시키는 역학적 함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페팃의 표현을 빌면 ‘비지배 자유의 범위’와 관련된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자율형 사립고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였을 경우, 이러한 폐지로 인해서 비 지배가 증진된 사람의 비지배 증가분이 비지배가 감소된 사람의 비지배 감소 분보다 많아야만 성공적인 정책 결정이라고 평가받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렇지 못한 결과를 산출할 경우, 그것은 최소한 로마 전통의 공화주의에서는 실패한 정책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러한 ‘자율형 사립고 폐지’ 문제와 같은 ‘경합적 갈등 관계’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페팃이 주장하는 ‘공통적 지식’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화주의 전통에서 강조되는 ‘시민적 우정’의 가치는 현대 로마 전통의 공화주의에게 있어서는 ‘공통적 지식’의 연대감으로 등장한다. 사람들이 공통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만일에 있을 자의적 간섭에 대항할 수 있는 인식적 연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생긴다. 이는 공화국을 유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더 나아가 시민들이 공통적 지식을 공유한다면 공동의 심의체를 구성할 것이며, 이로 인해 비지배 자유의 보다 효율적인 분배를 도모할 수 있다. 다음의 페팃의 주장을 통해, 비지배 자 유의 효율적 분배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A와 B 두 개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A는 B의 간섭에 대해 일반적으로 저항하거나 간섭 을 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자원을 확보하고 있다. 다시 말해, A는 A와 B로 구 성된 사회에서 B로부터 처벌받지 않고 B의 자의적 간섭에 종속되지 않은 채, 높은 수 준의 비지배를 누리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A가 지니는 권력을 보다 증 가시킨다고 하더라도 A가 누리는 비지배에는 실질적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A는 그가 지니는 권력들의 증가가 지니는 한 계생산성이 제로인 지점에 있을 수 있다. 이 증가분은 비지배라는 목적에서 실제로 불 필요한 권력을 A에게 제공하는 잉여분일 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A가 B의 간섭에 일 반적으로 저항할 수도 없고 이를 억제할 수도 없는, 상대적으로 무력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를 가정한다면, 이러한 증가분은 엄청난 가치를 지닐 것이다(Pettit, 1997:
115-116).
같은 제도라도 충분히 비지배를 누리고 있거나, 물질적으로 넉넉한 사람이 혜택을 받는 것보다는, 비지배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거나, 물질적으로 부족 한 사람이 혜택을 받는 것이 그 사회의 전반적인 비지배를 극대화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이를 쉽게 표현하자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 같은 원리로서)
‘한계 비지배 자유 체감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율형 사립고
폐지’ 문제에 이러한 ‘한계 비지배 자유 체감의 법칙’을 적용해 보자. 물론, ‘자 율형 사립고 폐지’ 문제에 ‘한계 비지배 자유 체감의 법칙’을 적용한다고 하더 라도 완벽한 해결책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자율형 사립고를 폐지함으로 인 해 더 높은 비지배 자유를 누리는 계층이 ‘자율형 사립고 폐지 반대측’인지
‘자율형 사립고 폐지 찬성측’인지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어느 측이 자율형 사립고 폐지로 인해 더 많은 비지배 자유를 누 릴 수 있는지”에 관한 객관적인 근거가 확보된다면, ‘한계 비지배 자유 체감의 법칙’을 통해 이 사안을 결정하는 것은 공정한 절차로 평가받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 시 자율형 사립고 폐지와 관련된 시민들 사이에 ‘비지배 자유에 보장에 관한 인식적 연대’의 필요성을 시민들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만일 ‘자율형 사립고 폐지’ 문제에 비지배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적 공유를 실현할 수 있다 면, ‘자율형 사립고 폐지 반대측’과 ‘자율형 사립고 폐지 찬성측’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공통적 지식을 통한 인식적 공유는 시민적 우정이라는 소중한 공동체적 가치 를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