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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배 자유의 이론적 정당화

(1) 소극적 자유와의 차별화 시도

페팃은 자유주의가 채택하고 있는 ‘소극적 자유와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그 는 소극적 자유 입장에서 미처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간섭 없는 지배’가 지닌

‘자의적 위험성’을 경계한다. 즉 소극적 자유주의자들은 간섭의 유무에만 신경 을 쓰는 나머지 간섭보다 개인의 삶을 자의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지배의 위 험성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팃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지배에 대한 위험을 경계하려는 비지배 자유의 노력이 비간섭 자유만을 강조하는 소 극적 자유와 차별화 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노예의 입장에서, “주인의 간섭이 없으므로 나는 자유롭다”는 생각이 과연 옳을까? 페팃에 의하면, 주인은 비록 노예를 ‘간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노예의 삶을 은연중에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노예는 자유를 완벽히 보장받고 있다고 볼 수 없다(Pettit, 1997: 22-23). 예를 들어, 사장이 나에게 월급을 제때에 챙겨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장이 내가 국가의 임금 제 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정당한 임금 체계에 맞지 않게 몰래 임금을 깎아서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주인이 겉으로는 친절해 보인다고 하더 라도, 실제로는 안 보이는 곳에서 나를 지배할 수도 있다. 페팃은 ‘세르부스 시네 도미노(servus sine domino)’, 즉 ‘주인 없는 노예’라 할지라도 진정한 자 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Pettit, 1997: 32). 왜냐하면, 이러한 ‘주인 없는 노예’는 현재는 비록 주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언제든 주인이 돌아와 노예의

22) 라보르드(C. Laborde)와 메이너(J. Maynor)에 따르면, 페팃의 정치철학적 공헌은 단연 비지 배 자유의 발견이다(Laborde and Maynor, 2008: 2).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적극적 자유와의 차별화 시도

페팃은 로마의 리베르타스(libertas)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닌,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개념으로서,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며, 소극적 개념이라는 점 을 강조함으로써 비지배 자유가 ‘적극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Pettit, 1997: 27). 즉 ‘공화주의의 자유’는 공화국의 국가적 사안에 대해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적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국가의 정책이 나의 삶을 지 배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소극적 개념’인 것이다.

그는 공화주의 전통에서 ‘민주적 참여의 중요성’은 분명 지배와 연관된 각종 해악들을 피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Pettit, 1997: 27). 즉 공화주의는 비지배 를 침해하는 정책이나 위험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국가의 모든 사안에 적 극적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페팃은 시드니(A. Sidney)의 “나는 순 수 민주주의(pure democracy)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 해도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Sidney, 1990: 189 ; Pettit, 1997: 29)”

라는 주장을 인용하면서 공화주의 역사에서 민주적 참여가 그리 중요하지 않 았음을 강조한다.

페팃이 순수 민주주의를 배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민주적 참여가 가져올 수 있는 ‘민중주의의 폐해’ 때문이다. 그는 민중주의가 의도치 않은 독 재자를 선출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오히려 자의적 지배가 더 증진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Pettit, 1997: 30).

페팃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지는 순수 민주주의보다는 대의 민주주의가 시 민적 자유를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Pettit, 1997: 30).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가 커짐에 따라 루소와 같이, 자유가 자치(self-rule)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니라는 민중주의적 입장이 나타났다. 이러한 입장은 민주적 자치의 이상 이 불간섭 자유라는 이상에 대한 주요 대안으로 지지되었을 경우에만 완성형 에 이른다(Pettit, 1997: 30)”고 주장한다. 즉 민주적 참여는 단지 ‘시민적 자유’

를 증진시키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삶의 권력이자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비지배 자유

페팃에 따르면, 비지배 자유는 그 자체로 일종의 ‘권력(power)’으로서, 단순 히 ‘자의적 간섭의 부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간섭을 행하는 것들에 대항하 는 하나의 ‘면역체(immunity)’로서 작동해야 한다(Pettit, 1997: 68). 페팃은 비 지배 자유를 개인이 삶을 살아 나가는 데 있어 견고한 방어태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일종의 권력과 힘’으로서 설정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자비에 의해서 살아가지 않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비록 현재는 주인에게 간섭을 받지는 않 고 있지만, 자신도 모른 채 지배당하고 있을 지도 모를뿐더러, 가까운 미래에 는 간섭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확실성의 상황에 맞서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의 종업원인 나는 현재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많고 회사에서 주어지는 업무에 관한 처리 속도와 능력도 빠르기 때문에 지배와 간 섭을 받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만일 내가 어떠한 이유로 재산을 탕진하게 되 고 업무 처리 속도도 예전만큼 빠르지 않게 되었을 때, 사장의 지배와 간섭이 발생하게 된다면 심리적으로 예전만큼 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매우 힘들게 느껴질 것이며 많은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즉, 자신의 주어진 삶의 여건 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지배자에게 간섭받지 않아야 할 형식적 조건이 구 비되어야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페팃이 말하는 ‘일종의 권력으로서의 비 지배 자유’인 것이다.

또한, 페팃은 비지배 자유는 시민 모두가 원하는 하나의 ‘개인적 선 (personal good)’인 동시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적’이며(Pettit, 1997: 81), 또 한, 하나의 ‘정치적 이상(political ideal)’으로 간주된다(Pettit, 1997: 80-92).

비지배가 왜 ‘정치적 이상’인지에 대해 비간섭 자유와의 비교를 통해 구체적으 로 설명한다(Pettit, 1997: 83-90). 첫째, 비지배 자유가 불간섭 자유에 비해 뛰

어난 점은 자의적 간섭을 줄여주는 보다 확실한 방법을 강구하기 때문이다 (Pettit, 1997: 85). 예를 들어, 형이 동생에게 강제와 간섭을 행하고 있을 때, 동생이 자신의 부모에게 가서 형의 압력 행사를 막아달라고 하면서 부모의 도 움을 요청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불간섭 자유는 부모의 도움이 더 큰 간섭 으로 돌아올 것을 예상해 형의 작은 압력과 간섭을 용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비해, 비지배 자유는 형의 ‘자의적 간섭’을 막기 위해 부모의 ‘비자의적 간섭’

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

둘째, 비지배 자유는 미리 법이나 제도로 자의적 간섭을 줄여놓았거나, 차단 해 놓았기에 주변에 일어나는 간섭을 하나하나 모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데 비해, 불간섭 자유는 주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한 간섭의 상황들을 시시각각 주시하면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비용, 에너지를 쏟게 된다(Pettit, 1997: 86). 회사에서 직원이 상사에게 애교를 잘 부리고, 입에 발 린 말을 잘 하는 등, 전략적인 아부로 상사의 간섭을 피해가는 것보다는 회사 의 규정을 보다 합리적으로 마련해 놓아 상사가 아래 직원에게 함부로 간섭과 압력을 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상사의 자의적 간섭을 막을 보다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셋째, 비지배 자유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적 지식’을 연결 고리로 하여 비지 배에 대한 공유된 인식이 확보될 수 있는 반면, 불간섭 자유는 사람들 사이에 불간섭 자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간주관적 교류가 거부된다는 점이다 (Pettit, 1997: 87). 비지배 자유는 공통적 지식을 통해 서로 공유된 인식을 가 질 수 있어서, 지배자의 자의적 간섭에 공동으로 대응을 할 수도 있으며, 동료 들 중 한명이 자의성을 가지려 할 경우, 나머지 동료들이 그를 제압하거나 대 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유리하다.

한편 페팃은 비지배가 ‘도구적 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롤스가 말한 ‘기본 적인 선(primary good)’의 지위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Pettit, 1997: 90-92). 페팃이 비지배 자유를 ‘기본적인 선’으로 언급하는 이유 는 비지배가 특정 사람들만이 누리는 재화가 아니라 보통의 일반 사람들도 향 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재화라고 보기 때문이다(Pettit, 1997: 90-91). 예를 들

어, 표현의 자유를 특정인만 누릴 수 있는 재화나 선으로 간주해보자. 이는 얼 마나 불행한 일인가. 공적인 토론의 장(場)에서 지배자 혹은 자신과 이해관계 가 걸려 있는 누군가의 압력으로 자신이 가진 철학적, 종교적 소신을 표출하 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 자 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는데, 만일 비지배가 보장되 지 않는다면, 만족할 만한 삶의 계획을 세우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는 불행한 인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팃은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비지배 자유를 확신하면서도, 비지배 자유가 아테네 전통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중립적 개념으로 비춰질 수도 있음을 우려 한다(Pettit, 1997: 96). 실제로 샌델은 ‘비지배 자유’라는 추상적이고 중립적인 이상을 성취하려다 보면 롤스의 ‘무연고적 자아(unencumbered self)’가 겪는 비판에 똑같이 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문화권이 존재 하는 데, 모든 문화권이 ‘비지배 자유라는 가치’를 최고의 가치와 이상으로 여 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비지배 자유를 최고의 가 치로 여기지 않고, 지배자의 예속과 통치 하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하는 문화권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해본다면, 이러한 문화권의 사람이 비지배를 최고의 정치적 이상으로서 삼을지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샌델은 현 대의 다문화 사회에서 ‘비지배 자유’라는 중립적 가치를 최고의 이상으로 여길 때, 각 문화권에 속한 시민들에게 비지배의 달성을 위해 헌신하라고 하는 것 은 많은 문제점을 가져올 것이라고 본다. 샌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페팃은 비록 귀족이나 성직자 등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예속하려고 하고 지배하 려는 사람들에게 별 다른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의 다원주의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주류(main stream)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것을 최고의 이상 으로 여긴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와 같은 비판을 피해간다(Pettit, 1997:

97).

오히려 페팃은 공동체주의자들이 공화주의의 매력에 빠질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Pettit, 1997: 120). 페팃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핵심적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