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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res publica)의 추구를 통한 자유의 성취

이번 절에서는 공화주의의 실천적 가치 중에서 첫 번째로 ‘자유’에 관한 페 팃과 샌델의 수렴적 요소를 모색하고자 한다. Ⅲ장과 Ⅳ장에서 살펴본 바, 이 들은 각각 ‘비지배 자유를 보장받았을 때’와 ‘자치를 실현했을 때’ 자유가 실현 된다고 봄으로써 자유에 관한 상이한 관점을 지닌다. 하지만 본 연구는 이러 한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자유의 개념이 수렴될 여지 가 있다고 판단한다. 즉, ① 로마 전통이 ‘비지배로서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유 는 아테네 전통이 지니는 ‘민중주의 혹은 전체주의로의 경도 가능성’을 우려하 기 때문이다. ② 하지만 아테네의 ‘자치로서의 자유’는 ‘민중주의 혹은 전체주 의로의 경도 가능성’을 스스로 경계한다. ③ 또한, 로마 전통의 ‘비지배로서의 자유’는 시민적 책임성을 외면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스스로 아테네 전통이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④ 만일 ②와 ③이 설득력을 확보한다면, ‘비지배로서의 자유’와 ‘자치로서의 자유’는 서로 수렴될 여건이 조성된다. 만일, 이러한 두 전통의 수렴이 가능하다면, 결과적으로 이 들의 영향을 받은 페팃과 샌델의 수렴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자치로서의 자유’의 대표적 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살펴보자. 인간 이 도시 국가 안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살아갈 때 인간은 자신들의 목적인 행복(eudaimonia)을 성취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 따른 다면, 개인의 행복은 국가의 행복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 텔레스는 행복의 고취를 위해서 국가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원하 지는 않는다. 그는 국가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정치공동체는 행복 의 양이 증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단일한 합의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그러한 합의가 정치공동체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좋은 음악이 동일한 음의 나열보다 다양한 음들 간의 하모니를 추구하듯이 좋은 국가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 간의 균형적 조화를 도 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Aristotle, 2009: 78).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최고 권력을 민중이 가져야 하는가, 귀족 혹은 유 능한 사람이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논하면서, 다수(polloi)는 각자가 비록 훌륭 하지 않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모였을 때는 소수자인 가장 훌륭한 사람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고 보았다(Aristotle, 1995: 108). 그것은 마치 여러 사람이 비용 을 갹출한 잔치가 한 사람의 비용으로 제공되는 잔치보다 더 나은 것과 같다 (Aristotle, 1995: 108). 즉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의 탁월함을 합치면 한 개인 의 탁월함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선동가 (dēmagōgos)의 무절제(aselgeia)에 의해서 민주정은 다소 민중주의적 문제점 에 봉착할 수 있다(Aristotle, 1995: 190). 민중선동가들은 귀족을 공격함으로써 귀족들의 결속을 유발하고, 때로는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서로 나누어 갖기 도 한다. 또한, 민주정은 공직 후보자들이 민중에게 인기를 얻기 위하여 민중 이 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한다(Aristotle, 1995: 191). 민주정의 핵심은 ‘다수의 지배’와 ‘개인의 자유’의 결합인데, 다수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경우, 국가의 정체(polity)는 붕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Aristotle, 1995: 208-209).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의 장점을 강조하면서도 민중선동가나 포 퓰리즘(polpulism)에 의한 왜곡된 민주정의 출현을 경계하였다. 그는 민주정과 과두정 모두 중용을 지켜야만 하며,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Aristotle, 1995: 206-207). 그는 소수와 다수의 비판적 목소리를 수용하면서도 그들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혼합정이 형성되어야 하며, 만일 소수와 다수가 서로 싸우게 된다면 국가는 파괴되고 붕괴될 것이 라고 본다. 민중들의 정치적 활동은 오히려 부자들의 이익을 향상시키는데 초 점을 맞추고, 과두정의 구성원들은 민중들의 이익을 고취하는데 강조를 두어 야만 국가의 정체는 안정될 수 있다.

아테네 전통의 공화주의자인 아렌트는 로마법의 권위는 법 제정 당시의 시 민들 사이의 공적인 약속으로 발생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라고 본다.

이때의 정치적이라는 것은 시민들이 합의한 것이라는 의미로, ‘공화(res publica)’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로마법은 시민들의 자기유지 (self-maintaining) 욕구의 한 가지 구체적 표현으로, 이러한 욕구들을 정치적 규범으로 함축시킴으로써 공공의 영역을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김비 환, 2007: 105). 만일 이러한 법이 제정되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자의성이 규제 되지 않은 형태로 출현할 수 있으며, 결국 정치 체제를 파괴시키는 전체주의 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아렌트에 따르면, “법은 다원적 이고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의 상호 대화와 토론을 통해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김비환, 2007: 105). 또한, 아렌트는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적 용기 (andreia)와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공화주의의 영광(gloria)을 가져올 것이라는 다소 보수적 주장과 함께, 공론장을 복원시키고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요구한 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것’의 복원을 강조하였다(곽준혁, 2007: 140). 결국 아렌 트와 같은 보수적 입장의 공화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시민들의 자기 이 익의 개념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어, 다수파의 선동가능성은 이미 차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샌델은 현 시대의 ‘공동체 상실의 위기’라는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참여’와 ‘자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정치의 도덕화’를 위해, 혹 은 민중주의나 전체주의 국가를 위해 정치적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정의란 무엇인가』,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민주주의 의 불만』등의 책을 통해 정치적 토론의 중요성을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는 순수 절차적 공정성, 가치중립성, 자아의 무연고성과 같은 소극적 자유주의의 변형된 형태들을 비판하면서, 현대 사회의 ‘도덕적 가치의 회복’은 ‘정치적 참 여의 부활’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정치적인 것’의 부활은 비단 정치적 영역으로 한정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샌델이 말했듯이 중립적이 고 진공적인 공간이 아닌, 공화국의 시민들 각자의 열망과 관점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체적 삶의 공간으로 인식함으로써, 본래적으로는 ‘도덕적인 것’의 부

활이 그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인 것이 민중주 의나 전체주의로 경도될 가능성을 유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의 분명한 입 장이다. 샌델 역시도 자신이 상대주의적이고 다수파주의적인 공동체주의 지지 자가 아니라는 점을 여러 저서를 통해 명확히 밝힌다(Kobayashi, 2011: 103).

“샌델에게 중요한 것은 공동체 다수파의 신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선(善)과 관계있는 정의(正義)로, 선과 정의는 특정 시대, 특정 공동체의 다수파의 생각 을 초월한 것이다(Kobayashi, 2011: 103).” 따라서 샌델에게 있어 정치와 도덕 의 결합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선의 쟁취나 정의의 실현이라는 보다 실천적이고 참여적 노력을 의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렌트, 샌델과 같은 아테네 전통 공화주의자들이 민중주의 를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공화주의인 페팃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공화 주의의 민중주의로의 경도가능성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차원에 서 페팃은 ‘비지배 자유 보장’이라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며 ‘수동적’인 공화 주의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페팃의 소극적 공화주의는 상대적 으로 그의 공화주의가 ‘민주적 참여’와 ‘책임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 냐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는 근거로 작동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페팃은 다 음과 같이 해명한다.

중세 이후 유럽 공화주의의 전통은 다음의 3가지 점에서 동의한다. 첫째는 비지배 자 유라는 고유한 개념이고, 둘째는 로마 공화국의 혼합정체가 보여주듯 사적 지배 (private domination)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국가는 반드시 그 힘을 각기 다른 부문으 로 분배해야 공적 지배(public domination)를 피할 수 있다는 신념이며, 셋째는 시민들 이 통치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특별히 정부가 하는 일을 면밀히 검사하고 견 제하는 데 있어 방심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그러한 정체가 손상되지 않고 효 과적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첫째는 자유라는 철학적(philosophical) 이상이고, 둘째는 혼합정체라는 헌정적(constitutional) 이상이며, 셋째는 시민적 관여라는 민주적 (democratic) 이상이다(곽준혁, 2010: 49).

페팃은 자신이 따르는 로마 전통의 공화주의가 철학적, 헌정적, 민주적 이상

을 모두 실현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시민들이 국가를 견제하는 과정 에서 ‘민주주의의 이상’이 로마 전통의 공화주의 속에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 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법과 제도, 시민적 견제력에 대한 페팃의 해명 에도 불구하고, 페팃의 ‘민주적 견제력’은 고전적 공화주의에서 강조하는 ‘민주 적 심의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추가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이에 대해 페 팃은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공화주의의 오랜 전통 속에는 혼합정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고, 경계하는 시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요소는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헌정 체제는 적극적 시민들이 제공할 수 있는 지속적인 검증과 쇄신에 의해 통제될 경 우에만 튼튼해지고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시민들이 헌정체제를 통해 정부의 투 명성을 확보하고 정부를 견제할 수 있으며 도전할 수 있을 때,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정부를 감시할 수 있을 것이다.…(중략)…이는 사적인 이익집단들의 로비와는 다르다.

사회운동은 영역별 정책결정에 전문성을 갖게 해줌으로써 시민적 노동을 분담시키고, 시민들이 효과적으로 통치에 기여할 수 있게 해준다(곽준혁, 2010: 51-52).

위의 페팃의 주장을 통해 우리는 그가 시민의 적극적 책임성에 대해 경시하 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대응하는 과정에서 ‘혼합정과 같은 헌정 체제’와 ‘시민 들의 정치 참여’는 사실상 양립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반(反)민중주의 노선을 유지하며 시민들의 적극성을 경계하였던 그가 ‘시민 의 책임성 문제’라는 지속적 비판에 직면하여서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소극 적 견제의 수준을 넘어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확대될 수 있음을 수용한 것이 다. 다만 페팃이 이러한 시민들의 적극적 정치 참여는 ‘사적인 이익집단들의 로비’와는 구별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가 경계하는 민중주의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집단들의 파벌적 이익 추구’를 의미한다는 점을 밝힌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페팃이 경계하고 있는 민중주의에 대한 우려가 완화되었으며, 이러한 완화가 진행될수록 아테네 전통의 공화주의와 수렴될 여지가 많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을 통해, 자유의 가치와 관련하여 페팃과 샌델의 수렴적 요소가 지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