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고 본다.

실제로 우리는 롤스가 말한 것처럼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을 전제로

‘선(善)의 개념’을 고려하지 않고 ‘정의의 원칙’을 정당화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기준과 원칙 을 만드는 데 있어 좋은 삶의 개념이 먼저 고려되지 않는다면, 과연 좋은 정 의의 기준이 마련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샌델은 정의의 문제는 선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으며, 선의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반성과 숙고, 합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정의의 문제는 매우 허무하고 내용 없는 결론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 다고 주장한다. 샌델의 입장에서 정의의 원칙은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적 맥락 속에서 토론하고 숙의하는 과정에서 세워지는 것이며, 이러한 자치의 과정 속 에서 시민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 이다.

더 나아가 샌델은 이러한 롤스의 ‘정치적 인격 개념’, ‘중립성의 요구’가 지 닌 3가지 차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롤스가 강조하는 ‘정치적 정체성을 지 닌 자아’는 진정한 ‘자치로서의 자유’를 향유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샌 델은, ‘정치적 정체성’ 논리에 입각하여 도덕적․종교적 교설들 간의 이견에 대해서는 괄호(bracket)를 쳐야 한다는 롤스의 주장은 “중대한 정치적 합의의 과정에서 결과의 산출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Sandel, 1998: 196). 동성애, 마약, 낙태, 생명 공학 윤리와 같은 문제들에 있어 항상 명확한 결론이나 합의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롤스가 말한 ‘정치 적 정체성’이 위와 같은 논쟁에서 참이나 거짓을 판별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실제로 위의 이슈들과 관련된 법의 제정이나 제도의 정비가 실질적 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샌델은 낙태 논쟁을 예로 들며, 만일 롤스의 괄호 치기(bracketing)가 적용된다면, 카톨릭 교설에서 내세우는 태아의 도덕 적 지위와 같은 논의 자체를 아예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Sandel, 1998: 197-198). 서로 상이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교리들 간의 생산 적 논의 자체를 토론의 영역에서 아예 배제함으로써 정치적 심의와 숙고를 풍 부하게 만들 근거와 토대의 생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시

민의 자유’가 감소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또한, 샌델은 ‘링컨과 더글라스의 노예제 논쟁(1858년)’을 예로 들면서, ‘정치 적 자유주의의 괄호 치기’가 지닌 한계를 설명한다. 더글라스는 연방정부는 노 예제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으로서, 그는 연방 권력이 노예제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미국 헌법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며, 각 주의 권리 를 존중하면서 그들의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Sandel, 1998: 198-199). 반대로 링컨은 노예제에 대해 실질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보는 입장으로서, 그는 노예제를 폐해로 간주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법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Sandel, 1998: 199-200).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자들은 더글라스의 중립적 주장에 대해 반 대 의견을 표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노예제가 공정하지 못하며, 비인 간적인 제도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 는 바는 중립적 절차라는 것이 항상 도덕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이 다. 샌델은 “오늘날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러한 더글라스의 주장에 대해 어 떠한 판단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샌델은 만일 ‘칸트식 자유주의’라 고 한다면,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는 인격주의 정언명령에 의해

‘노예제 반대’라는 확고한 대답을 얻을 수 있기라도 하겠지만, 이에 반해 롤스 식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1858년의 노예제 논쟁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Sandel, 1998: 201). 이는 형이상학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칸트의 의무론을 포기한 롤스의 선택이 좋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의미 하며,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러한 노예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킴으로써’ 오히려 스스로 철학적 정당성을 잃게 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노예제라는 명백하 게 비인간적인 제도에 대해서도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정치가 지닌 순 기능’을 무시하는 일이며, ‘정치를 통해 우리의 좋은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이 유’를 부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링컨과 더글라스의 노예제 논쟁’은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 시민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는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샌델은 롤스가 정의(justice)의 문제는 ‘순리적 다원주의의 사실(the

fact of reasonable pluralism)’32)이 반영되지 않고, ‘순리적 불일치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합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고 주 장한다(Sandel, 1998: 202-203). 롤스는 사람들이 도덕적․종교적․철학적 교 설들에 관해서는 이견을 갖고 있지만, 정의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지 않으며, 설령 이견이 있더라도 숙고를 통해 이견을 없앨 것이라고 주장한다. 롤스는 이를 통해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 덕적․철학적 영역은 ‘순리적 다원주의의 사실’이 존재하지만, 정의에 대해서 는 ‘순리적 다원주의의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야만, ‘옳음과 좋음의 불균형’ 혹은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즉 ‘좋은 삶(좋음)에 대한 이견’은 발생할 수 있지만, ‘정의(옳음)에 대한 이견’은 발생하 지 않는다고 주장해야만 칸트식의 형이상학적 정의관을 벗어나는 롤스만의 독 립적 정의관이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샌델은 소득 분배, 형평 과세, 의료 복지와 같은 정의의 문제에 관한 수많은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으 며, 쉽게 이성적으로 규제될 수 없는 산적한 논쟁들이 즐비하다고 말하면서, 차등의 원칙과 같은 정의 원칙만이 유독 이러한 순리적 불일치를 피해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Sandel, 1998: 204).

샌델은 롤스가 차등의 원칙이 노직과 같은 자유 지상주의자들의 정의관보다 더욱 우선한다는 점을 보여주었지만, 사실상 노직의 자유지상주의 이론이 더 욱 우세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롤스가 반성적 균형을 통해 ‘차등의 원칙’을 도출한다면, 반대로 자유지상주의 역시도 반성적 균형을 통해 ‘자생적 질서를 통한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Sandel, 1998: 2071-208). 이러한 점에서 샌델은 정의의 문제에서도 순리적 불일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의 의 영역에서 순리적 불일치가 존재한다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설득력 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롤스 입장에서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 주장을 유 지하기 위하여 “최소한 정의의 영역에서는 순리적 불일치가 존재하지 않는

32) 롤스는 ‘다원주의의 사실’과 ‘순리적 다원주의의 사실’을 구분한다. ‘다원주의의 사실’은 이 성적인 토론을 거치지 않은 상태의 다원화된 상태를 가리키고, ‘순리적 다원주의의 사실’은 철학적․종교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치열하게 이성적 숙의를 나눈 후에도 결론이 도 출되지 않는, ‘순리적으로‘ 불일치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의의 영역에서 순리적 불일치가 존 재한다는 실증적 근거들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관심은 ‘만 65세 이상의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권’

에 대한 논의이다. 여기에서 초점은 ‘노인의 기준 연령에 대한 적절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만 65세 이상이 노인이 지하철을 무임승차함으로써 발생하는

‘정의의 분배 문제’가 초점이다.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와 관련하여, 롤스의 말 대로 정의의 영역은 순리적 다원주의의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최근 공사가 완료되어 운행되고 있는 몇몇 민간투자 지하철 사업의 경우, 과거의 정부나 서울시가 운영 책임 을 맡아 경영을 해왔던 것과는 달리, 노인의 무임승차로 인한 영업 이익의 손 실로 인한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러한 영 향으로, 다른 민간 투자 지하철 및 경전철 사업이 지연됨으로써, 상대적으로 교통난이 심한 곳의 주민들을 애꿎은 피해만 입게 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15년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 6개 도 시철도 운영기관의 당기 순손실은 7,968억 원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무임승차 에 따른 손실은 4,939억 원으로 전체의 61.2%에 이른다.”33) 문제의 핵심은 ‘노 인 복지’와 ‘정상적 기업 운영의 불가능’이라는 분배 정의의 문제가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편에 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현재 우리나라 의 노인은 그동안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이끌어 온 ‘베이비부머 세대’로서, 지하철 무료승차권 정도의 복지 혜택은 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 반면, 만일 적자로 인해 지하철 사업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는 우리들의 교통 복지가 오히려 줄어들 위험에 처할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 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특히, 복지와 관련된 정의의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러한 ‘노인 무임승차 논쟁’ 역시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롤스가 말한 ‘정의의 영역’에 ‘순리적 다원주의의 사실’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해되기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33) 인터넷 신문 ‘THE FACT 라이프’의 2017년 10월 09일자 기사 “말 많은 지하철 무임승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