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물론 위의 페팃의 주장처럼 ‘헌법 규정 전략’은 기존의 지배자나 공직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선택지들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 에서, 그들에게 강제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헌법 규정 전략은 시민들이 공통의 지식으로서 법의 정당성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헌법 규정을 수용하는 데 있어 별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페팃의 생각이다. 또 한 ‘상호 권력의 전략’은 비지배 달성을 위해 사적 영역의 노력에만 머물게 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분산된 방법과 전략을 쓸 수밖에 없으므로 심각 한 약점들이 발생할 것(Pettit, 1997: 95)이라고 보는 페팃의 입장에서 헌법 규 정은 상호 권력의 전략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우선하여 고려되어야 할 ‘법치의 제 1요건’이다.
문서화와 절차주의에 빠지게 되면, 정부 기구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재량권이 하나도 남게 되지 않아 오히려 그들의 비지배가 박탈당할 위험에 처하기 때문 이다. 엄밀하게 법의 제국을 완성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누군가의 비지배를 약 화시키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헌정주의의 두 번째 조건으로서, 법률적 권한의 분산은 법의 조작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장치이다(Pettit, 1997: 178-179). 즉 만일 권력이 분산되지 않 는다면, 정부 기구의 권력자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형태로 법을 조작할 수 있 고, 만일 권력자의 법의 조작으로 인해 누군가는 비지배를 당할 가능성이 높 아질 것이다. 이러한 권력의 분산은 공화주의의 오랜 전통인 ‘혼합정’과 ‘입 법․행정․사법의 권력 분립’과 다른 것이 아니다(Pettit, 1997: 179-180), 만일, 3권 분립과 혼합정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전제정으로의 경도 가능성을 막을 수 없을 것이며, 상대적으로 시민의 입장에서는 비지배를 누릴 가능성이 약화 된다.
국가의 제도와 정책에 대한 조작을 막기 위한 조건으로, 법을 가능한 성문 화하려고 노력하고, 정부 기구의 권력을 분산하는 것 외에 더욱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헌정주의의 세 번째 조건으로서, 그것은 반드시 법을 개정함에 있 어 다수의 지지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Pettit, 1997:
180). 이러한 페팃의 반다수결주의 조건은 그 사회의 다수가 언제든 그 사회 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닐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다수가 원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회의 소수자 들은 항상 지배를 받게 되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 국 사회에서 영원한 다수인 백인들은 소수 인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하는 제도나 정책을 언제든 강압적으로 추진한다면, 백인은 항상 소수 인종 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둘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다수의 억압은 아마도 페팃 이 목표로 하는 비지배 자유로서의 공화주의의 이상적 모습은 아닐 것이다.
(2) 권력자 부패에 관한 규제
페팃은 권력자는 부패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력을 가졌을 경우, 권력을 이용한 욕망의 충족을 위해 임의적인 정 책과 제도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일련의 부패 행위에 대한 규제 는 그 행위 당사자가 도덕적인 사람인 경우 손쉽게 해결될 수 있는 반면, 그 권력자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보다 복잡한 방식의 규제가 요구 된다. 페팃은 이러한 권력자의 부패는 개인적 덕성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 다는 입장을 취하며,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행위를 규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Pettit, 1997: 211-212).
페팃은 부패한 권력자를 규제하는 방식으로 ‘제재(sanctions)와 선별 (screens)’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면서도, 제재보다는 선별을 우선하여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ettit, 1997: 212-220). 제재는 권력자가 정해진 규 칙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처벌을 하고, 규칙을 잘 준수한 경우 보상을 주는 통제의 방식을 말한다. 이에 비해, 선별은 권력을 가진 공직자가 자신이 앞으 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을 선제적으로 분별하여 특정 선택지들을 배제할 수도, 또한 추가할 수도 있는 방식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국민의 투표에 의해 정당 하게 정권을 잡은 권력자가 앞으로 자신의 공적 결정에 있어 공정성을 미리 담보받기 위해서 정부 주요 공직자의 임명 절차에서 특별 인사위원회를 구성 하여 적격 후보자를 선별하여 후보자를 임명하는 절차적 제도 혹은 규칙을 포 함시키는 제도를 미리 선정하는 경우를 선별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페팃 은 공화주의 전통에 따르는 규제를 위해서는 제재와 선별의 방식 모두를 사용 할 수 있다고 보지만, 두 방식 중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반부패 적 노력을 보여줄 기회를 선제적으로 부여하는 선별의 방식이 우선되어야 한 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재와 선별은 도덕적 능력이 낮아 부패를 저지른 권력자 를 처벌하는 ‘일탈자 중심의 규제(the deviant-centered regulation)’에 적용되 어야 할까? 아니면, 도덕적 능력이 비교적 높은, 공정하게 공직을 수행하려는 의지를 가진 권력자에게 초점을 맞춘 ‘순응자 중심의 규제(the complier-centered regulation)’에 적용되어야 할까? 페팃은 공화주의 전통에
따라 국가의 공적인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려는 사람의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서는 일탈자 중심의 전략보다는 순응자 중심의 전략이 더 우선되어야 한 다고 주장한다(Pettit, 1997: 215). 그 이유는 일탈자 중심의 전략은 그가 선호 하는 선별의 방식보다는 제재의 방식만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악한을 염두에 두고 고안된 일탈자 중심의 제재들이 갖는 문제는 그러한 제재를 적용 하는 모든 행위자들에게 동기와 헌신에 대한 노골적인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 이다. 선천적 순응자에게 일탈자 중심의 제재들은 철저한 모욕으로 여겨질 수도 있 다.…(중략)…이처럼 악한의 경향성을 가정하는 제재들을 부가하는 것은 선천적 순응자 를 소외시키고 타락시킬 수 있으며, 그들을 화나게 하거나 그들이 적대적이고 방어적 인 사고방식을 갖도록 부추길 수 있다(Pettit, 1997: 217-218).
페팃은 공화주의의 전통에 따라 권력자는 수치와 명예를 중시한다고 가정하 고, 일탈자 중심의 전략은 권력자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방 식은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는 자신의 덕성을 잘 유지하고 드러낼 수 있는 순 응자 중심의 전략을 통해 권력자의 명예를 높여주는 보상의 전략을 통해 권력 자가 부패를 저지를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즉, 페팃은 권력 자 부패에 대한 규제 방식으로 순응자 중심의 전략 하에서 제재의 방식보다는 선별의 방식이 옹호되어야 하며, 비록 제재를 하더라도 가능하면 순응하는 사 람들에게 좋은 보상을 주어야 하고, 이러한 처벌 후에도 부패한 권력자가 나 타나면 그를 처벌하기 위한 강력한 제재의 수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페팃은 권력자 부패를 막기 위한 구체적 실천 전략으로 헌정주의와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그는 헌정주의의 조건으로는 법의 제국, 권력 분산, 반 다수결주의를 제시하며, 민주주의의 조건으로는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공정 하고 객관적인 토론과 심의의 절차를 제안한다(Pettit, 1997: 232-233). 즉, 그 는 권력자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입법 과정 자체에서 시민들의 심사숙고의 결과물로서 법을 만들고, 이러한 법을 통해 권력자가 통치를 해야 한다고 본 다. 그리고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가 권력의 균형과 견제를 통해 운 영되어야 하며, 다수의 이익이 소수의 이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다분한 다수결
주의를 부인함으로써 권력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부패의 가능 성을 차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