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고 우리가 위조할 수 없으나 인생의 요구 에 반응하여 꼭 의미들을 발견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우 리는 가치들로부터 도움 받을 수 있지만 가치의 우위를 결정해야한다. 프랑클은 궁 극적인 의미에 관한 해답이 욥이 말한 “우리가 모른다”는 것과 소크라테스가 말한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궁극적 의 미는 일상생활에서만 시험될 수 있다는 기본 가정을 지니고 있다. 즉 우리는 궁극 적 의미가 존재하는 것처럼 살 수 있고 그래서 모든 것이 혼돈과 우연이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순간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조력자 를 가질 수 있는데 우리는 영적 무의식 속에 묻혀있는 의미 발견의 도구를 가지고 있다. 프랑클에 따르면 양심이 우리로 하여금 개별적 상황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도구라고 하였다.82)
80) 무의식의 신 , 32쪽.
81) 무의식의 신 , 37쪽.
82) Fabry, 앞의 책, 121-122쪽.
양심이 우리 행위의 안내자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오 래된 문제에 대한 가장 오랜 해답이다. 오늘날에 되찾은 재발견이다. 양심은 환원 론자(reductionist 프로이트 아들러)의 사고의 희생물이 되어 왔다. 그것은 정신적 육체적 차원에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실체의 일부분으로써 오랫동 안 무시되어져 왔다. 양심은 학습 과정의 결과로 여겨지거나 혹은 정신 역동적 “초 자아”로 대리된다. 우리가 이런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만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혹은 아버지 이미지에 부합하기 원한다는 이유만으 로 “윤리적”이다. 이런 방식에서 영적인 즉 특별한 인간 차원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현상은 영적인 차원을 무시하고 인간 존재 차원의 더 낮은 부분인 과정을 통해
“교묘히 변명하여 모면된다.” 프랑클은 환원론자의 설명을 거부했다. 양심은 “개별 적 인간 현상”일 뿐 단순한 학습 과정의 산물도, 아버지의 이미지도, 혹은 다른 어 느 것도 아니다. 양심은 훈련이나 외적인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긴 하지만, 이러한 영향 때문에 변형될 수는 없다. 프랑클은 양심이란 개별적 상황 안에서 “의미되는 것” 한 상황 안에 내재하는 고유한 의미 형태를 “알아차리고 발견해내는 직관적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프랑클은 양심이 개별적 인간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 인 환원론자의 이론은 양심을 조건화 과정의 산물로 여긴다. 프랑클은 그것을 “허 위 도덕성”이라 하여 초자아가 평안한 상태로 살기 위해서만 도덕을 실행하는 것 으로 지칭하였다. 진정한 도덕성은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다 른 사람,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일할 것을 결심할 때부터 시작한다고 보았다.83)
영적 무의식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모델은 양심이다. 양심은 책임성 과 함께 결단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내부에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불변의 현상이 다. 양심은 무의식의 깊은 곳에까지 존재하며 무의식적 지평에서 생성된다. 즉 양 심은 무의식적 지평에서 발현되는 실존적으로 진정한 결단들이다. 이 결단들은 통 제되지 않고 완전히 자연스럽게 반성 없이 일어나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래 서 양심은 그 기원을 깊이 알아갈수록 무의식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심은 비이성적이며 비논리, 혹은 더 정확하게 전(前) 논리적이다. 의미에 있어서도 전(前) 윤리적 이해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적어도 작동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성의 영역 안에서 설명될 수 없고, 반드시 ‘사실이 있은 뒤에’만 설명 이 가능하다. 결국 양심의 판단들은 검증될 수 없다. 의식 앞에서 노출되는 것은
‘있는 것’이지만, 양심에게 제시되는 것은 ‘있어야 할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은 실 재 그 자체가 아니라 실재화시켜야 할 어떤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가능성 이다. 양심은 근본적으로 직관적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화시켜야 할 것을 예상하기 위해서 양심은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84)
인간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 일’을 보여 주는 것이 양심의 과업이다. 이 한 가 지 일은 절대적으로 유일한 것이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한 인간이 특정한 상황에서 83) Fabry, 앞의 책, 122-123쪽.
84) 무의식의 신 , 39-40쪽.
실현해야 할 유일한 가능성이어야 한다. 양심이 구체적이고 개별적 의미의 가능성 들을 직관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본능이라고 생각하여 양심 자체를 하나의 윤리적 본능이라 부른다.85) 윤리적 본능은 종족 보존 본능과는 달리 인간 으로 하여금 보편적이라기보다는 더 개별적이고 더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한다. 윤 리적 본능은 특정 상황에 맞는 하나의 요구, 즉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알 수 있도 록 해준다. 양심을 생활화한다는 말은 언제나 개개의 구체적 상황을 완전히 인식하 면서 보다 높은 인격의 차원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양심은 계속해서 나의 인격적 ‘존재’(Sein)의 구체적 ‘소재’(Da)를 파악해 오고 있었다.86) 사실 양심은 눈 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어떤 사건이나 현상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을 보고 다른 사람이 판단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 자신에게도 나름대로의 양심이 있다. 다만 나쁜 일을 하거나 양심을 속이는 일을 하는 경우에 스스로 죄책감을 가지게 되지만, 양심을 지키지 못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자기합리화하면서 원인 을 사회나 타인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많다.
의미 요법에 의한 양심은 매우 특별한 기능을 지닌다. 오늘날 사용되는 대부분의 의미 요법의 기초가 되는 동기이론(motivati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 으로 필요를 충족시키고 충동과 본능을 만족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는 존재이다. 언 제나 ‘항상성(homeostasis, 내적 평형)’을 유지하고 회복할 목적으로 본능에 충실 하며 충동으로 발생되는 내적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 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클은 인간이란 일차적으로 내적 평형과 같은 어떤 내적 조건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자기 밖의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더 기울이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실존은 적어도 신경증으로 잘못되지 않았다면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한다기보다는 완성시켜야 할 의미로서의 어떤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랑을 통해 꼭 만나야 할 대상으로서의 어떤 사람을 지향한다. 프랑클 은 이러한 인간 실존의 구조적 특징을 ‘자아초월(self-transcendence)’이라는 말 로 표현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아초월의 결과면서 자연적인 부산물이 자아실현 이라고 했다.87)
야스퍼스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고 자아실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자아실현은 ‘삶의 의도성에 의해 얻어지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위대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만큼 이 문제를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한 사람도 없 는 것 같다. 그는 “Was der Mensch ist, das ist er durch Sache, die er zur seinen macht” 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인간은 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은 바로 그 원인으로 인해 그와 같은 사람이 된다.” 88)
85) 무의식의 신 , 41쪽.
86) 무의식의 신 , 42쪽.
87) 무의식의 신 , 88쪽
결국 인간은 자신이 원하거나 원했던 일의 결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매슬로우 는 ‘자아실현의 과업’은 ‘어떤 중요한 일에 전념함으로써’ 가장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자아실현이 의미의 완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처럼 우회(迂廻)해서 실현된다면, 같은 논리로 주체성도 책임감을 통해서, 다시 말 해서 의미의 완성을 위해 책임 있는 존재로서만 확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 간이 기본적으로 ‘자신을 위해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 는 특징을 잘 나타낸다. 인간은 희생정신으로 대의명분이나 타인에게 자신을 헌신 하고 자신을 잊어버릴수록 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가 된다.
양심은 사유하는 능력에 의해 완성된다. 아래 사례는 ‘사유의 중요성’을 말한다.
독일 출신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하노버의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나 하이데거에게 배웠으며, 이후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933년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 취득과 강의가 금지되며, 프랑스로 이주했으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후 1941년 탈 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후에는 주로 전체주의 및 다양 한 정치적 주제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전임교수로 지명받 은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예 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재판을 참관하였다. 아이히만은 나치 독 일의 친위대 장교로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제2차 세 계대전 중 유대인을 수용소로 수송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1941년 나치 지도부가 유대 인 학살을 결정했을 때 아우슈비츠 및 다른 수용소 현장을 시찰하고 직접적으로 학살을 지시한 사람이다. 수백만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1945 년 독일이 패전한 후 가명으로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기계공으로 은신하고 있었지 만, 1960년 5월 이스라엘에서 15년간 도피를 하다가 붙잡혔다. 자신이 고안해 낸 열차(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로 수많은 유대인이 여기에서 죽음) 덕분에 시간 낭비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고, 죽이 라는 명령도 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아렌트는 악을 행하는 사람은 광신자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 내지는 포악하게 생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평범하게 생긴 것에 놀랐다고 한다.
수백만 명을 가스실인 ‘죽음의 공장’으로 보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은 재판 과정 내내 자신은 그저 국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행동이 반인륜적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유대인을 더욱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더 많이 죽이기 위해 방법을 고안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다. 오 히려 군인으로서 국가의 월급을 받고 상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 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88) 빅터 프랭클, 삶의 의미를 찾아서 , 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