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프랑클의 ‘무의식의 신’과 불교의 ‘유식사상’
6. 무의식의 신
내일은 영영 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즉시 실천하는 것’이 아니면 기약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언제나 ‘오늘 지금 바로 여기’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책임성은 인간과 그 상황에 대한 책임성이다. 의미요법의 형태로 나타나 는 실존분석은 하나의 심리요법적인 방법이고 특히 신경증 환자에게는 자신의 책 임감을 의식적으로 인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간혹 인간을 ‘책임의 존재’라는 말로 설명되어지는 것은, 오직 영성이나 실존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그러 므로 실존분석에서 의식으로 표출되는 것은 충동이나 본능, 혹은 원초아와 자아의 충동이 아니라 내 자신(self)이다.77)
프랑클은 ‘무의식의 범위에는 무의식적 본능과 무의식적 영성이 있다고 하였으 며, 영적인 것은 심층심리학 곧 무의식의 심리학에 포함시킨다. 실존은 본질적으로 무의식이다. 실존의 근본은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으며 완전히 파악할 수도 없기 때 문이다. 영적 현상들은 무의식적일 수도 있고 의식일 수도 있지만, 인간 실존의 영 적 바탕은 궁극적으로 무의식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대단히 유동적이고 상 호 침투적이며, 억압을 통하여 의식적인 것이 무의식이 되고, 억압을 없애면 무의 식이 의식화 된다’고 하였다.78)
인간 존재는 처음부터 “충동과 본능으로의 환원 존재”로 해석하는 심리분석과 달리 실존분석은 인간이 더 이상 심리적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니라 자율적인 영적 실존이라는 점에 역점을 둔다. 빈스방거(Ludwig Binswanger)는 본능과 영을 ‘측 정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표현하였다.
인간의 실존은 영적 실존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는 것보다 다른 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인간의 실존을 바르게 재는 진정한 척도 는 오로지 주어진 현상을 영적인 것인가, 본능적인 것인가로 판별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지,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로 판별하는 것과는 상대적으로 무관하다. 왜냐하 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정신분석적 개념처럼 충동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되 어야 할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의 말을 빌린다면 그것 은 ‘결단하는 존재’(entscheidendes Sein)가 된다는 것이고,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의 말을 빌린다면 현존(Dasein)이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된다 는 것은 책임 있는 존재, 자신의 실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79) 그러므로 실존은 무의식적 상태라도 진정한 것일 수 있고 인간은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실존하게 된다. 진정한 실존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순간 나 타나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개인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언제
77) 무의식의 신 , 28쪽.
78) 무의식의 신 , 29쪽.
79) 무의식의 신 , 30쪽.
아무도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고 우리가 위조할 수 없으나 인생의 요구 에 반응하여 꼭 의미들을 발견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우 리는 가치들로부터 도움 받을 수 있지만 가치의 우위를 결정해야한다. 프랑클은 궁 극적인 의미에 관한 해답이 욥이 말한 “우리가 모른다”는 것과 소크라테스가 말한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궁극적 의 미는 일상생활에서만 시험될 수 있다는 기본 가정을 지니고 있다. 즉 우리는 궁극 적 의미가 존재하는 것처럼 살 수 있고 그래서 모든 것이 혼돈과 우연이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순간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조력자 를 가질 수 있는데 우리는 영적 무의식 속에 묻혀있는 의미 발견의 도구를 가지고 있다. 프랑클에 따르면 양심이 우리로 하여금 개별적 상황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도구라고 하였다.82)
80) 무의식의 신 , 32쪽.
81) 무의식의 신 , 37쪽.
82) Fabry, 앞의 책, 121-122쪽.
양심이 우리 행위의 안내자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오 래된 문제에 대한 가장 오랜 해답이다. 오늘날에 되찾은 재발견이다. 양심은 환원 론자(reductionist 프로이트 아들러)의 사고의 희생물이 되어 왔다. 그것은 정신적 육체적 차원에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실체의 일부분으로써 오랫동 안 무시되어져 왔다. 양심은 학습 과정의 결과로 여겨지거나 혹은 정신 역동적 “초 자아”로 대리된다. 우리가 이런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만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혹은 아버지 이미지에 부합하기 원한다는 이유만으 로 “윤리적”이다. 이런 방식에서 영적인 즉 특별한 인간 차원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현상은 영적인 차원을 무시하고 인간 존재 차원의 더 낮은 부분인 과정을 통해
“교묘히 변명하여 모면된다.” 프랑클은 환원론자의 설명을 거부했다. 양심은 “개별 적 인간 현상”일 뿐 단순한 학습 과정의 산물도, 아버지의 이미지도, 혹은 다른 어 느 것도 아니다. 양심은 훈련이나 외적인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긴 하지만, 이러한 영향 때문에 변형될 수는 없다. 프랑클은 양심이란 개별적 상황 안에서 “의미되는 것” 한 상황 안에 내재하는 고유한 의미 형태를 “알아차리고 발견해내는 직관적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프랑클은 양심이 개별적 인간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 인 환원론자의 이론은 양심을 조건화 과정의 산물로 여긴다. 프랑클은 그것을 “허 위 도덕성”이라 하여 초자아가 평안한 상태로 살기 위해서만 도덕을 실행하는 것 으로 지칭하였다. 진정한 도덕성은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다 른 사람,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일할 것을 결심할 때부터 시작한다고 보았다.83)
영적 무의식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모델은 양심이다. 양심은 책임성 과 함께 결단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내부에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불변의 현상이 다. 양심은 무의식의 깊은 곳에까지 존재하며 무의식적 지평에서 생성된다. 즉 양 심은 무의식적 지평에서 발현되는 실존적으로 진정한 결단들이다. 이 결단들은 통 제되지 않고 완전히 자연스럽게 반성 없이 일어나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래 서 양심은 그 기원을 깊이 알아갈수록 무의식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심은 비이성적이며 비논리, 혹은 더 정확하게 전(前) 논리적이다. 의미에 있어서도 전(前) 윤리적 이해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적어도 작동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성의 영역 안에서 설명될 수 없고, 반드시 ‘사실이 있은 뒤에’만 설명 이 가능하다. 결국 양심의 판단들은 검증될 수 없다. 의식 앞에서 노출되는 것은
‘있는 것’이지만, 양심에게 제시되는 것은 ‘있어야 할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은 실 재 그 자체가 아니라 실재화시켜야 할 어떤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가능성 이다. 양심은 근본적으로 직관적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화시켜야 할 것을 예상하기 위해서 양심은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84)
인간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 일’을 보여 주는 것이 양심의 과업이다. 이 한 가 지 일은 절대적으로 유일한 것이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한 인간이 특정한 상황에서 83) Fabry, 앞의 책, 122-123쪽.
84) 무의식의 신 , 39-40쪽.
실현해야 할 유일한 가능성이어야 한다. 양심이 구체적이고 개별적 의미의 가능성 들을 직관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본능이라고 생각하여 양심 자체를 하나의 윤리적 본능이라 부른다.85) 윤리적 본능은 종족 보존 본능과는 달리 인간 으로 하여금 보편적이라기보다는 더 개별적이고 더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한다. 윤 리적 본능은 특정 상황에 맞는 하나의 요구, 즉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알 수 있도 록 해준다. 양심을 생활화한다는 말은 언제나 개개의 구체적 상황을 완전히 인식하 면서 보다 높은 인격의 차원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양심은 계속해서 나의 인격적 ‘존재’(Sein)의 구체적 ‘소재’(Da)를 파악해 오고 있었다.86) 사실 양심은 눈 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어떤 사건이나 현상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을 보고 다른 사람이 판단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 자신에게도 나름대로의 양심이 있다. 다만 나쁜 일을 하거나 양심을 속이는 일을 하는 경우에 스스로 죄책감을 가지게 되지만, 양심을 지키지 못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자기합리화하면서 원인 을 사회나 타인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많다.
의미 요법에 의한 양심은 매우 특별한 기능을 지닌다. 오늘날 사용되는 대부분의 의미 요법의 기초가 되는 동기이론(motivati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 으로 필요를 충족시키고 충동과 본능을 만족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는 존재이다. 언 제나 ‘항상성(homeostasis, 내적 평형)’을 유지하고 회복할 목적으로 본능에 충실 하며 충동으로 발생되는 내적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 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클은 인간이란 일차적으로 내적 평형과 같은 어떤 내적 조건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자기 밖의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더 기울이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실존은 적어도 신경증으로 잘못되지 않았다면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한다기보다는 완성시켜야 할 의미로서의 어떤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랑을 통해 꼭 만나야 할 대상으로서의 어떤 사람을 지향한다. 프랑클 은 이러한 인간 실존의 구조적 특징을 ‘자아초월(self-transcendence)’이라는 말 로 표현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아초월의 결과면서 자연적인 부산물이 자아실현 이라고 했다.87)
야스퍼스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고 자아실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자아실현은 ‘삶의 의도성에 의해 얻어지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위대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만큼 이 문제를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한 사람도 없 는 것 같다. 그는 “Was der Mensch ist, das ist er durch Sache, die er zur seinen macht” 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인간은 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은 바로 그 원인으로 인해 그와 같은 사람이 된다.” 88)
85) 무의식의 신 , 41쪽.
86) 무의식의 신 , 42쪽.
87) 무의식의 신 ,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