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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 종교심은 현상학적으로 인간의 실존을 분석하고, 실존분석이 무의식적 영성으로 이어지며 무의식적 종교심이 된다. 우선 그 출발점이 근본적인 현상학적 사실이었다. 즉 인간 존재는 ‘의식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존재’이다.

인간은 이 두 존재의 종합인 자신의 책임성을 인식하는 존재이다. 다음 단계는 실 존분석이 무의식적 영성으로 과감히 뛰어들면서 이루어졌다. 1926년 의미요법은 정신학적 차원 또는 로고스를 포함시키기 위하여 심리학적 차원을 넘어서서 심리 요법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이 단계에서 무의식적 로고스는 본능적 무의식에 더하 여 영적 무의식이 발견됨으로써 노출되었다. 이 영적 무의식의 심층에서 위대한 실 존적 결단들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인간의 책임성은 무의식의 근저에까지 도달하 게 된다. 영적 무의식의 발견으로 실존분석은 심리분석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 곧 무의식을 ‘이드(id)’화시키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영적 무의식의 개념 덕분 에 실존분석적 의미요법은 인간에 대한 이론에서 어떠한 일방적 지성주의나 이성 주의도 피하게 되었다. 로고스(logos)는 논리(logic)보다 더욱 심오하다. 영적 무의 식을 내포하는 실존분석은 무의식적 종교심을 드러내 주었다. 현상학적 분석으로 나타나게 된 무의식적 종교심은 원래부터 인간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초월성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초월적 무의식’은 특별히 다르게 볼 것도 없이 단지 인간이란 존재는 무의식적 차원에서조차도 항상 초월과 지향적 관계 내에 깊 95) Fabry, 앞의 책, 126-130쪽.

게 뿌리 내리고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무의식적 관계가 지향하는 대상을 ‘신’으 로 간주한다면 그 신은 마땅히 ‘무의식의 신’으로 불러야 타당할 것이지만, ‘무의식 의 신’이란 말은 신 자체가 무의식적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며 신과 인간의 관계가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96)

‘무의식의 신’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무의식을 범신론적으로 잘못 받아져서 오해될 수 있다. 즉 무의식 자체를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무의식의 신으로 보아야 한다. 무의식은 단순히 신적인 것과 관련성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신과 무의식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신이 ‘우리 안에 (with us)’ 특히 우리의 무의식 내부에 ‘서식한다(inhabit)’는 의미와는 완전히 다 르다. 이러한 해석은 어설픈 신앙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무의식에는 의미를 추구하 는 의지가 있다. 프랑클은 의미를 추구하는 의지를 넓은 의미의 종교심으로 보았 다.

둘째로 ‘무의식의 신’이라는 개념을 논할 때 이를 혹시 신비주의적 의미로 취급 하면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 무의식은 신적인 것은 아니며 나아가 어떤 신적인 속성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무의식은 신적 전지성(全知性)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피상적 형이상학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셋째로는 인간의 무의식 그 자체로 신적이거나 전지적(全知的)일 수는 없지만, 신에 대한 인간의 모든 무의식적 관계는 심오하게 인격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의 신’을 인간 안에서 마치 신의 존재와 유사하 게 활동하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실제 이런 오해가 융97)을 희 생시킨 중대한 착오였다.

융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무의식 내에서 종교적 요소들을 분명하게 나타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은 무의식의 신을 인격적이고 실존 적인 종교 안에 올바른 위치를 배정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무의식적 종교심을 다 른 곳에 가져다 놓았다. 융은 무의식을 충동과 본능의 영역에 배치시켰는데, 이 영 역 속에서는 무의식적 종교심이 더 이상 선택과 결단의 문제로 남아 있을 수가 없 게 되었다. 융에 따르면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종교적일 따름이지 내 자신이 종 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나를 신에게로 밀고 나가기 때문에 나는 그것에 대해 선택을 하거나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융에게 무의식적 종교심은 집단 무의식에 소속된 종교적 원형들 중의 일부로 예속 된 것이며, 인격적 결단과 관련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본질적으로 비인격적이고 집단적이며 원형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클은 이

96) 무의식의 신 , 69-70쪽.

97) Carl G. Jung(1875~1961),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집단무의식 이론과 원형 이론과 결합되 어 종교심리학 연구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와 반대로 종교심은 절대로 집단무의식에서 생겨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종교는 무의식의 지평에서라도 인간이 결정하는 가장 인격적인 결단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집단무의식이 종교심의 발원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이러한 결단들이 단순히 인간의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다.

융에게는 종교적인 면들을 포함하여 무의식이 인격을 결정한다. 이 점에서는 프 로이트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프랑클은 종교적 무의식, 특히 영적 무의식을 무의 식에 의해서 충동되는 실재라기보다는 ‘결단하는 무의식 실재’라고 주장한다. 영적 무의식, 나아가 우리가 초월적 무의식이라고 불렀던 종교적인 면들은 본능적 (factor)이 아니라 실존적 동인(agent)이다. 또한 그것은 심리학적 사실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실존에 속한다. 그러나 융은 원형들이 ‘어떤 의미에서 뇌에 연결 된 마음의 특수한 구조적 자산 또는 조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여기에서 종교심은 전적으로 인간실존의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조건들의 문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종교심은 이 조건들 위에 서 있는 영 적 인격의 문제이다.

융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종교적 원형들이라는 것은 사전에 알려진 심리학적 사실들 로 볼 수 있는 집단무의식의 비인격적 형태들이며, 동시에 심신적(psychophysical) 사 실성에 속한다. 이 영역에서 종교적 원형들은 독자적 힘으로 활동하는데, 그 원형들 이 인격적 결단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클의 관점은 무의식적 종교심 이 인류에게 공통으로 부여된 표상들의 웅덩이가 아니라 개인의 인격 한복판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98)

실존분석은 프로이트의 종교관을 훨씬 뛰어넘어 발전되어 나갔다. 그것은 이미

‘환상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실재의 명백한 영원성, 곧 인간 고유의 종교심이 자체의 특성으로 드러낸 실재의 영원한 현존을 깊이 탐구하고 있 다. 그 실재는 엄밀한 의미에서 현상학적 경험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에 의미요법의 임무는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무의식적 종교심을 기억하게 하는 것, 곧 그것을 환자 자신의 의식적인 마음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결국 의미요법의 실존분석 과업은 신경증적 존재 형태를 자체의 궁극적인 지평에까지 끌고 가는 것 이다. 때때로 신경증적 실존의 지평은 초월성과의 인격적 관계가 억압을 당하는 경 우에 일종의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비록 ‘초월적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 할지라도 억압된 초월성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고 급기야 ‘마음의 불안’으로 뚜 렷이 나타나게 된다. 『의사와 영혼』(The Doctor and the soul)에서 프랑클은 ‘심 리질환적’ 마음상태 또는 ‘정신질환적’ 마음상태를 유발시킨 예를 소개하면서 무의 식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특별히 무의식 종교심의 진리이며 억압은 결국 신경증으 로 끝나게 된다고 하였다.99)

98) 무의식의 신 , 71-74쪽.

99) 무의식의 신 , 76-77쪽.

신학적 문제에 관여하는 일은 의학의 전문분야가 아니다. 프랑클은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외관상으로는 분명히 비종교인인 것 같은 환자 안에도 종교심이 반드 시 숨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고 하였다. 종교인 의사는 신을 믿을 뿐만 아니라 환자 편에서의 무의식적 신앙도 믿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이 환 자의 ‘무의식의 신’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동시에 이 무의식의 신이 환자에게 단지

‘의식화 되지 않은 분’이라고 믿는다고 하였다.100)

의미요법은 심리요법을 대신한다기보다 완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의미치료 에서 의미를 두 차원으로 나누어 보면, 첫 번째 차원에서는 궁극적 의미로서 우주 적인 질서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정해진 위치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차원에서는 우리는 의미를 실존적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 찾을 수 있고, 또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의미들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치료는 각 인간 개인은 유일무 이한 개체로서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순간순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만 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 매순간마다 반응하게 되고 인식하게 되는 독특한 의미를 제공하게 된다는 개념을 제의한다.

프랑클은 우리가 독단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그 상황에 원래부터 있었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정 보를 갖지도 않고 결단을 내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실들을 명확하 게 알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다. 우리는 무력하고 실수하기 쉬운 자체 그대로 의식적인 지식과 무의식적인 직관과 우리의 양심의 소리에 의존해서 결단을 내린 다.101) 상담자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도움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으로 인도해 주는 것으로 세 가지의 상황이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발견하는 상황이다. 통찰력은 경험이나 혹은 보고 듣고 읽고 상상하고 꿈꾸는 어떤 것에 의해 날카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래!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길이다. 그것이 내가 느끼고 반응하는 방법 이다. 이것이 나의 장점이고, 이것이 나의 약점이다. 이것이 내 자신에 대해 좋아하 는 점이다. 이것이 내가 변화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계속 즐겁기 위해, 실제로 있는 약점이든 상상된 약점이든 그 약점을 감추 기 위해, 거절당하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면을 써 왔다. 종종 우리는 가면을 우리의 진정한 자아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의 가면을 들여다봄으 로써 의미를 자각하게 된다. 그것은 명상 속에서, 현명한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 것 에서, 예술가의 작품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함에 의해서, 창조적인 활동을 통 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진솔한 대면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두 번째는 의미가 명백하게 된 상황으로서 제한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입장과 관 련된다. 절망은 구렁텅이(함정)에 빠져버린 느낌의 자각에서 온다. 의미치료로 우리 는 어떤 상황에서도 태도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궁지에 몰릴 수도 있지만 100) 무의식의 신 , 81쪽.

101) Fabry, 앞의 책, 18-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