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프랑클의 ‘무의식의 신’

프랑클은 인간의 심층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의미를 향한 궁극적 추구’를

‘무의식의 신’이라고 표현하였다.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이 꿈이라고 보았다. 프로이 트는 무의식을 성적욕망인 리비도의 고착으로 보았고, 프랑클은 의미에의 의지로 보았다. 신이 어디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내재신과 초월신으로 나눌 수 있 다. 내재신은 인간의 마음 속 무의식에 존재한다는 범신론과 관련이 있으며, 불교 의 여래장과 유사하다. 초월신은 신이 하늘에 있으며, 하느님(절대자, 유일신, 인격 신)으로 보는 것으로, 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주장한다.

프랑클은 무의식의 신 에서 종교와 정신의학은 배타적이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 서 상호 수용적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책의 영문판 『Man’s Search for Ultimat e』(인간의 궁극적 의미 추구)은 1985년 프랑클이 미국 정신과 협회의 연례 모임 시 오스카 피스터 상을 받는 자리에서 행한 수상 연설의 제목과 같고, 1975년 출

판된 『The Unconscious God』는 1945년 독일어로 처음 출판된 『Der unbewußte Gott』의 영역본이다.67) 이 책에서 종교적 주제들을 명시적으로 취급하 고 있으며, 종교심은 모든 사람의 무의식 심층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고 설명한 다. 스피노자는 개체 속에 신이 들어있다는 범신론을 주장하였고, 프랑클은 로고스 (의미)를 추구하는 “나”를 신이라고 보았다. 이 종교심은 정신병과 같은 극심한 정 신질환에서까지도 말살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 프랑클은 이를 명백하게 증언하 기 위해 인간의 의미 추구 와 의미를 향한 의지 를 저술한 것이다. 또한 종교와 정신의학 영역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높은 차원은 낮은 차원보다 포괄적이고, 수용적이다. 마치 숲이 나무를 귀속시키듯, 생물학은 심리학에, 심리학은 정신학에, 정신학은 신학에 귀속된다. 정신학적 차원은 인간 고유한 현상들의 차원이라고 정 의한다. 아인슈타인은 “종교인이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68)

프랑클은 ‘인간의 의미 추구’라는 말을 표현하면서 정신학적 차원의 정의를 인간 에게 고유한 현상들의 차원이라고 했으며, 그 속에서 인간 실재를 가장 뚜렷하게 대표할 수 있는 어떤 현상이라고 했다. 이 표현대로 인간이 ‘궁극적 의미 추구’를 행하는 것을 종교라고 정의해도 무방한 것으로 보았다. 이때의 종교 개념은 광의의 의미로 종파적 제도적인 종교의 대변자들이 주장하는 근시안적 신(神)의 개념을 초 월한 것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김진은 프랑클의 무의식의 신 개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프랑클의 무의식의 신은 신이 무의식적 존재라는 뜻이 아니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무의식으로 표현한다.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과는 다른 영 적인 존재가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 개념이 무의식이다. 충동 본능 억압의 세계가 아니라, 신이 들어올 수 있는 빈 자리, 울창한 나무 숲 사이에서 내려오는 따뜻한 햇살과 같은 빛의 장소를 말한다. 로고스는 언어 적 이성적 예수 그리스도 개념이 있지만, 프랑클의 로고스는 의미를 말한다. 하느님 과 내가 만나는 그 장소에서 내가 하느님을 부지불식간에 발견할 때, 교회에 다니지 않더라도, (신이 꼭 기독교 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장소에서 신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수 있다. 내가 자살을 하려는 그 순간에 영적 무의식의 영역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 자살을 멈추게 된다면,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이 일을 하라고 내가 여기서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이 의미 발견이다.69)

이는 의미 발견과 의미가 발견될 수 있는 장소를 강조하여 설명한 것이다. 프랑 클은 무의식의 신이 각 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하였다.

잘못된 신의 개념은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만약 어떤 종교에서 ‘믿기만 하면

67) 빅터 프랭클, 무의식의 신 , 10-11쪽. 이하 무의식의 신 으로 인용함.

68) 무의식의 신 , 15쪽.

69) 김진, 신필재 콜로키움 강의. 2018. 11.

만사가 잘 될 것이다’라는 말로 전도한다면 신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인간 의 행위는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 희 망 사랑 등 종교에서 사용되는 이 언어들은 특이하게도 ‘명령적 성격’에서 벗어나 있다. 즉 믿음이나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일방적이거나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명령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70)

자신이 믿는 신을 타인들에게 믿을만한 분으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 도 스스로 믿을 만한 사람으로 처신해야 한다. 어떤 특정한 종교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다. 자신의 종교가 최고라고 믿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 교파의 사명 때문에 다른 교파를 무시하게 된다. 종교 전쟁은 대부분 자신의 종교 가 가장 우수하고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침범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고 주입시킴으로 인해 발생한다.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이 개별화되어야 한다. 극단적인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들까지도 그들만의 상징을 완전히 추방해서는 안 된다.71) 온갖 상황 속에서도 종교는 소멸 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신 역시 죽은 분이 아니며 아우슈비츠에서 실제로 고통을 겪고 살아난 사람 중에는 깊은 종교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라 로스푸코의 사랑에 관한 말을 약간 변형시켜 프랑 클은 “폭풍 앞에서 작은 촛불은 꺼지지만, 큰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이처럼 곤경과 재앙 앞에서 약한 신앙은 약해지지만 강한 신앙은 더욱 굳세어진다”72)고 하였다.

프로이트 시대에 빈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는 실제 로 존재하는 덕은 세 가지 뿐이라고 하였다. 그 세 가지는 용기 객관성 책임감이 다. 용기는 아들러의 심리학에 적용된다. 아들러 심리학은 열등의식이 발병을 일으 키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여기면서, 자신들의 과정 전체를 통해 환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하였다.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목적은 환자 스스로가 자신의 열등 의식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73)

객관성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적용된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성적 에너지인 리 비도를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객관성에 굴복하고 말았다. 객관성이 인간을 대상화 하고 사물화 하여 인간의 인격을 일종의 대상으로, 그리고 인간의 존재를 사물로 만들어 버렸다.74) 정신분석은 인간 내면세계의 해부학으로 바뀌게 되고, 인간을 비 인격화 시킨다고 말한다. 심리분석은 인격의 통일된 정체성을 무시하고 파괴한다.

정신분석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부분 중에서 특히 개별적인 부분을 인격화하기 도 하고 악마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가

70) 무의식의 신 , 16쪽.

71) 무의식의 신 , 17쪽. 불가지론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신 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자는 입장이다.

72) 무의식의 신 , 19쪽.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1613~1680)의 사랑의 잠언을 활용하고 있다.

73) 무의식의 신 , 23쪽.

74) 무의식의 신 , 24쪽.

마치 서로 독립적인 것처럼 그 각각을 유사 인격적 능력으로 다루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자아를 초자아가 누르고 억압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라는 말을 사용한다. 내 뜻은 그게 아닌데, 내 뜻과는 상관없이 행동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력이라고 한다. 업력은 자신이 행한 업의 훈습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습관 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내 마음의 상태 가 어떤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지금 내가 왜 화가 나 있는지를 가만히 알아차리 면 문제를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억지로 억압하거나 누르거나 외면하지 않고 가 만히 화가 나 있는 상태를 알아차리면 모든 것들이 다만 순간에 지나가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을 서로 배척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 라 들여다보는 것이다.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자아는 궁극적으로 충동의 노리개이다. 프로이트는 자아 (ego)가 절대로 자기 집안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심리학적 현상들은 충동 과 본능으로 환원되어 버리고 그들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 서 규정된다는 것은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심리분석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처음부터

‘충동 존재(being driven)’로 해석된다. 이것이 바로 본래 따로 존재하는 자아를 충동의 재료로 하여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해부학적 역학적 기계적 개념을 반영하여 인간을 심리적 자 동기계장치로 본다. 이 관점에서 실존분석이 개입하게 된다. 실존분석은 심리분석 적인 개념에 맞서서 인간이란 심리적 자동기계장치가 아니라 고유의 자율성을 가 진 영적 실존(spiritual existence)이라는 점에 역점을 둔다. 이때 사용되는 ‘영적’

이라는 것은 단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인간의 독특한 현상을 지적하며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75)

마지막으로 슈니츨러의 덕목 중 책임감이란 덕은 실존분석에 적절하게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존분석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실존 곧 인간의 진면모를 ‘책임 존재’로 이해한다. 실존분석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한 1938년 당시 철학은

‘실존’이라는 말을 책임존재라는 특수한 존재양식을 표현하기 위해 개발해 냈다.

프랑클은 그의 저서 『의사의 영혼 지도』에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받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삶 그 자체 가 다양한 질문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그 삶에 답해야 하는 것이다.

책임지고 응답해야하고 필연적으로 ‘행동으로 응답’해야 한다. 행동으로 삶에 응답 한다는 것은 ‘여기서 지금’ 응답한다는 것이다.76) 예전에 어떤 이발사가 ‘내일은 공짜’라는 안내판을 걸고 영업을 하였다. 이발소를 지나가다가 이 안내판을 본 고 객이 다음날 다시 이발소를 찾았지만 여전히 ‘내일은 공짜’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 의 내일은 오늘이지만 오늘의 내일은 다시 내일이 되어도 불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75) 무의식의 신 , 26-27쪽.

76) 무의식의 신 , 27-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