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프랑클의 ‘무의식의 신’과 불교의 ‘유식사상’
8. 양자의 상이성
7식이 8식을 ‘나’로 간주한다. 이 때문에 망식(妄識)이라 볼 수 있다. 불교는 무 아설이므로 이런 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반대로 보자면, 7식은 자아의 근거를 찾 는 것이다. 이는 프랑클이 의미를 찾음과 비슷하다.
프랑클은 무의식의 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의식의 신에서 궁극적 의미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구유식과 화엄에서는 9식에서 우주적 의미를 발견한다. 이점에서 양자는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상이점은 무엇인가?
첫째 프랑클의 ‘무의식의 신’ 개념에서 의미 발견은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 라 무의식이 자신에게 부여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즉 인간은 신이 자신 에게 부여한 의미를 찾아서 발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미 정해진 어떤 것을 찾 는다는 것은 신이 결정한대로 행한다는 의미가 있다. 무의식의 신이 자기 자신이라 고 말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는 것으로 의심해볼 수 있다. 이미 주어진 의
미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선택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것은 의미가 주어지는 원인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식에서의 업을 행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상이성이 있다. 알라 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업은 스스로 행한 행위의 결과이다. 자업자득 자작자수이다.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과보를 받는 것으로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업의 원인을 바꿀 수 있다. 악을 저지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자신 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다.
둘째 프랑클의 ‘무의식의 신’은 인과(因果)의 개념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순 간에도 어떤 일에도 의미가 있으며, 심지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유식의 알라야식은 철저하게 인과응보, 원인과 결과, 연기의 법칙을 따른 다. 현재의 현상은 과거 여러 생에 걸쳐 내가 행한 업의 결과로 나타난다. 어떤 현 상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씨앗이 되는 인(因)과 조건이 결합하여 생기는 과(果) 를 중요시 하는 불교의 연기설을 말한다.
파울크너(Faulkner)가 한때 “과거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과거도 아니다”
라고 했듯이 과거는 결코 실재 과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속될 뿐만 아 니라, 또한 동시에 연속적이고 끊임없이 되먹임(feedback)하는 과정에 있다. 어떤 일은 다른 일의 조건이나 결과가 되기도 하고 그것들에 의해 또 다른 조건 지어지 기도 하면서 우리의 모든 의식 영역내의 작용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223) 프랑클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 을 말하였다면, 불교 유식사상은 인과로 이어지는 연기의 법칙을 잊지 않고 매 순 간순간 행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고통에 대한 관점에도 차이가 있다.
프랑클은 고통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한 다. 인간은 자신이 왜 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고통의 의미를 알면 그 어떤 고통 도 이겨낼 수 있다고 하였다, 고통은 태도를 변경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였다.
반면 유식에서는 고통은 인연화합에 의한 것으로 고통의 실체는 없다. 단지 고통 이라 생각되는 현상을 인식하는 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 그 자체도 무상한 것 이고 인연생기하며 매 순간 흘러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 고 통의 원인은 대부분 ‘나’라는 것에 집착하여 번뇌하는 것이므로, ‘나’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가아(假我)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면 당연히 고(苦)도 사라진다. 유식에서는 고의 실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223) 윌리엄 월드론, 「불교 심층의식-인도불교사상에서의 아뢰야식(ālaya-vijñāna)」, 105-106쪽
고(苦)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연기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아차리고, 그 현상은 매 순간 변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면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다
프랑클의 고통은 괴로움을 뜻한다. 프랑클의 고통이 슬프고 괴로운 일을 뜻하는 것이라면, 유식에서는 즐거움마저도 고통이다. 사람들은 즐겁고 행복한 상태가 지 속되기를 원한다. 행복한 상태가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이 고통이다. 붇다는 행복조 차도 계속 변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변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행복한 상태에 머 물기를 원한다. 태어난 모든 것은 늙고 병들어 소멸되어 지속적이지 않다. 순간의 현상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간에 집착하여 번뇌할 것이 아니라 순간순 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 존재는 스스로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절망의 순간에도 의미를 발 견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은 차원적 접근법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가장 높은 가치가 태도의 가치이다. 시련 특히 자신의 의지로 해결하기 힘든 불가 항력적인 시련의 의미는 가장 심오한 의미이다. 프랑클의 ‘무의식의 신’에서는 지 금 현재 주어진 여건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태도의 자유를 중요 하게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나 성공을 원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욕망은 바로 그의 운명이다. 욕 망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는 유익한 방향의 욕망이 있어야 발전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의지이자 행위이며, 이는 인 (因-원인을 이루는 근본동기)의 종자가 된다. 욕망은 성공을 이끄는 것이지만 그릇 된 욕망은 실패의 원인이 된다. 인(因)은 인간이 욕망하고 집착하는 것에 따른 행 위에 의해 연(緣 -원인을 도와 결과를 낳게 하는)을 만들고 그 결과인 과(果-원인 에 따른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잘못된 욕망을 벗어나고 집착을 줄임으로써 운명 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성격이 운명이다. 행복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인간의 유일무이함에 대한 상이성이다.
프랑클은 인간은 자신만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각 의미에는 한 가지 답이 존재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은 고유한 자신만의 의미를 추구해야 하고 유일무이를 인정한다.
유식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부정한다. 그것은 7식이 꾸며낸 것이다. 붇다가 주장 한 무아설을 충실히 따른다. 따라서 나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부정한다. 나는 연기 속에서 존재할 따름이다.
다섯째 불성은 사람에게 가능태로 주어진다. 이를 현실태로 만들어야 한다. 반면 무의식의 신은 가능태가 아니다. 불성(佛性)은 붇다가 될 성질, 혹은 가능성이다.
목표는 붇다가 됨이다. 반면 무의식의 신은 키운다고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