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최초로 기업화된 화장품인 ‘박가분’은 하얀 얼굴을 표현하기 위해 물에 개어서 사용하는 분으로, 1916년 가내수공업으로 제조되기 시 작하여 1922년 정식으로 제조 허가를 받았다. 1920년대 초 당시에는 기생 들을 중심으로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하루에 1만 갑이 넘게 판매되 었지만 1930년대를 안팎으로 몰락했는데, 박가분에 들어 있는 유해 성분 이 논란이 되면서부터였다. 박가분에 납 성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 지면서 사람들은 피부에 유해하지 않은 화장품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 었다.
어떤 분을 바를까
(문) 나는 이십 오세 된 여자인데 본래는 얼굴빛이 과히 흉하지 않았는 데 요즘 와서는 얼굴에 푸른 빛이 납니다. 어떠한 화장품을 써야 빛을 회복하겠습니까? 그동안은 박가분만 발랐습니다.
(답) 화장품을 쓰는 것은 얼굴을 예쁘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납이 섞인 나쁜 분을 쓰는 것은 오히려 얼굴을 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화장을 안 하면 안할 법이지 이왕 하려거든 좋은 분을 써야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얼굴 바탕을 잘 아끼니 나쁜 화장품을 안 씁니다.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젖은 수건으로 잘 문지른 다음에 양제 가루분을 바르는 것이 가장 좋다 고 합니다. (기자)
(동아일보, 1926년 7월 11일, 3면)86)
이후 화장품에 사용되는 유해 성분의 기준에 대한 단속안이 마련된 것 은 1969년 보건범죄 단속에 대한 특별조치법(약칭: 보건범죄단속법)이 제 정되면서였다. 보건범죄단속법으로 인해 당시까지 많이 광고되던 표백 크 림과 약용 크림 중 상당수가 피부에 유해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규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매일경제, 1969). 그리고 2000년에 화장품법이 제정 되면서는, 이전까지 약사법 속에서 화장품이 취급되느라 약사법의 미비함 을 통해 유통되던 유해 화장품들을 모두 규제할 수 있게 되었다. 1999년 화장품법 제정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제2조 화장품에 대한 정의다.
제2조 (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화장품”이라 함은 인체를 청결‧미화하여 매력을 더하고 용모를 밝게 변화시키거나 피부‧모발의 건강을 유지 또는 증진하기 위하여 인체에 사용되는 물품으로서 인체에 대한 작용이 경미한 것을 말한다. 다만, 약사법 제2조 제4항의 의약품에 해당하는 물품은 제외한다.
2. “기능성화장품”이라 함은 제1호의 화장품중에서 다음 각목의 1에 해 당되는 것으로서 보건복지부령이 정하는 화장품을 말한다.
가. 피부의 미백에 도움을 주는 제품 나. 피부의 주름개선에 도움을 주는 제품
다. 피부를 곱게 태워주거나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데 도움 을 주는 제품
(법률 제6025호 [시행 2000. 7. 1.] [법률 제6025호, 1999. 9. 7., 제정])
화장품에 대한 정의에는 “용모를 밝게 변화”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 다. 몇 차례의 개정 과정에서 화장품 정의에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용 모를 밝게 변화시킨다는 점은 변화가 없다. 이때의 “밝게”란 물론 단순히 인체의 색조나 명도 차원이 아니라 많은 화장품에서 표기하는 ‘안색 개선’
과 같이 폭넓은 의미라고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밝은 용모로의 변화 가 인체의 청결과 미화, 건강 등의 기능과 함께 화장품의 효과를 정의하는 필수 요소라는 점은 국내 화장품 시장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또 1999년 화장품법 제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한국이 세계 최 초로 ‘기능성 화장품’ 제도를 도입했다는 점이다(보건복지부, 2019). 미백 은 법·제도적 의미로는 기능성 화장품이라는 항목 하에서만 인정되는 특수 한 효과로 의미가 좁혀졌다. 이에 제품에 ‘미백 기능성 제품’이라고 명시 하기 위해서 화장품제조업체는 수 천만 원의 임상실험을 통과해야 한다.
임상실험을 통과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더라도 앞에서 제시했던 흑백 변신 이미지와 같은 극적인 표현을 제품이나 제품 광고에 사용할 수 없도록 엄격하게 규제를 받는다.
‘어제보다 더 하얀 피부’ 절대 못써요. 그런 거. 쓸 수 있는 단어가 있어 요. ‘안색 개선에 도움을 줍니다’, ‘미백 성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러니까 진짜 애매하게 써야 돼요. 직접적으로 보자마자 ‘아, 이건 얼굴 하얘지겠구나’라고 느끼는 단어를 절대 못 써요. ‘얼굴에서 광이 납니다’
절대 못 써요. 다 못 써요. (화장품A)
미백 배치 내에 이와 같이 다소 엄격한 법제도적인 지층이 마련됨에 따라 미백은 50~60년대의 미백 제품이 표방하던 “표백”과는 연결을 끊고
“기능”, “도움” 같은 새로운 영역과 접속한다. 화장품을 통해서 하는 미백 이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용모를 미화하고 개선하기 위한 보건의 신체기 술이 된 것이다.
오늘날 미백을 한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피부의 건강함이다. 표적집단면접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 하는 미백을 표현하기 위해 ‘창백’하다는 것과 구분을 했다.
창백이 약간 하늘빛? 하늘색 같이 약간 쿨톤들이 하야면 약간 창백해 보 이잖아요. 에메랄드빛도 아니고 하늘색빛 살짝 나면서 실핏줄 같은 거 보이고 이런 사람들 약간 창백해 보이고. 정말 약간 아이보리톤? 그런 거는 약간 하얗게 깨끗한. 건강한 하얀 피부톤. (가연, 37세, 주부)
예를 들어 창백한 피부는 아예 핏기가 없어 보이고 생기가 없어 보이는 그런 느낌인데, 이게 미백이 된 피부는 뭔가 뽀샤시하게 광채가 난다고 해야 되나. (세준, 26세, 대학생)
저도 잠깐 외국에서 좀 있었을 때 전 별명이 심슨이었어요. 한국에서는 하얗다고 얘기를 했었는데 외국 애들한테는 제가 되게 노란 거예요. 바 트 심슨 가족 있잖아요. […] 제가 아니라고 그랬는데. 진짜 딱 이렇게 댔더니 걔는 창백하게 하얀 거예요. 그 창백함이 예뻐 보이지 않고 제 피부가 더 예뻐 보인다고 생각을.. (미영, 41세, 회사원)
미백 이미지 배치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빛이 나고 투명한 미백의 속 성은 신체기술적 배치에서 피부를 건강하고 생기 있게 가꾸는 실천과 연 결된다. 특히 미백의 신체기술적 배치는 환경오염이라는 지층을 포함한다.
표적집단면접 참가자들은 자외선이나 미세먼지에 대해 종종 언급을 했다.
특히 자녀가 있는 참가자의 경우에는 자녀의 미백을 이러한 유해 요소들 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실천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최근 환경 관련 이슈 들이 대두됨에 따라 피부 유해 요소에 대한 경계도 커졌고, 이에 피부 건 강을 위한 신체기술로서의 미백에 대한 인식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 다.
한편 미백이 건강의 신체기술로서 구성되는 데에는 화장품 소비자들을 위한 정보 플랫폼이 주요한 행위능력을 발휘했다. 각 매체별로 소비자 내 에서의 ‘알음알음’으로 유통되던 내용을 ‘정보’로 바꾸어 매개하는 플랫폼 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국내 화장품 정보 플랫폼 어플리케이션 ‘화해’는 700만 건의 다운로드가 이루어졌으며, 2020년 3월 기준 16만 개 제품에 대해 490만 건의 리뷰가 공유되어 있다. 화해는 각 제품마다 성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며 20가지 주의 성분의 포함 유무, 알레르기 유발 성분, 피 부 타입별 특이 성분 등을 나누어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TV 프로그램인
<겟잇뷰티>(ONSTYLE, 2016~)는 뷰티 예능을 표방하며 방영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진행하는 ‘블라인드 테스트’는 브랜드명을 공개하지 않은 채 그 사용감과 효과를 시험해 보는 것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좋은
평을 받은 제품은 방영되자마자 화제가 된다.
이러한 정보 플랫폼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와 의존도가 높다 보니 화 장품 생산과 마케팅 자체가 이 플랫폼에 의존하여 이루어질 정도다. 기능 성제품으로서 과대광고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받는 미백 제품은 ‘운 좋게’
이러한 정보 플랫폼을 통해 선택될 필요가 있다.
기초에서 제일 큰 변화는 사실 ‘화해’ 같은 안 좋은 성분을 가려내는 앱 들이 나오면서. 화해에서 빨간 불이 뜨면 일단 안 팔리는, 그게 기본이 됐어요, 거의. 근데 이게 웃긴 거거든요, 사실. 연구소에 가면 되게 뭐라 그래요. “화해에서 초록색이 뜬다고 좋은 게 아니다”라고 다 얘기를 해 요. “왜 화해 처방에 맞추느냐, 피부에 오히려 더 안 좋은 성분도 있고, 화해 초록색 맞춰도. 화해에 빨간 성분이 나와도 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주는 데 있어서는 그 성분이 꼭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빼자고 하면 제품 의 특징이 없어진다” 이런 얘기도 많고. 그래서 연구원들은 화해 진짜 싫어하는데 고객들은 화해만 보니까 결국엔 맞춰 가야 되더라구요. 그래 서 최근에 나온 제품들은 다 화해에서 초록색 뜨는 걸로 다 되어 있고.
(화장품A)
[어떤 제품을 방송에서 다룰지] 자기들이 알아서 다 정해요. “언제 방송 나갈 건데 그쪽 제품이 있어요”까지만 얘기해줘요. 몇 등인지도 얘기 안 해줘요. “보시면 알아요” 얘기하고. 끝나고 우리가 보고 1등이면 “1위 하셨으니까 앰블럼 사실 거예요, 말 거예요?” (화장품A)
이러한 양상은 정보 채널들이 얼마나 공신력이 있고 신빙성이 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미백이 아름다운 효과를 내기 위한 미용 차원만이 아니 라 건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여러 정보와 시험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신 체기술로 유통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