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치의 횡단적 연결의 측면을 문화적 단위로 가져와 보고자 한다. 세계 화가 서구 제국주의의 힘과 관련한 동질화의 차원에서 많이 논의되었다면, 배치는 보다 이질적인 문화의 연결과 미시적인 변동에 주목하게 해 준다 (Reddy, 2013). 최근 K-뷰티를 통해 한국인 특유의 미백 미학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유통되고 있을 뿐 아니라 뷰티산업의 인력과 기술, 상품 수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미백 배치는 문화 간 횡단의 차원을 포 함하여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문화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제시된 개념들을 배치 이론과의 연계 속에서 짚어 보고자 한다.
문화제국주의론은 국제적 흐름 속에서 서구 문화의 강력한 지배에 의한 전 지구적인 문화적 동질화에 주목한다. 그러나 포스트식민주의의 이론적 지형이 마련되고 복수의(plural) 세계화에 대한 주목이 이루어지면서 (Pieterse, 1994), 문화제국주의론은 힘을 잃는다. 그 과정에서 ‘문화횡단 (transculturation)’이 대항적인 개념으로 제시되었다.29) 문화횡단은 문화
29) 문화횡단은 쿠바 출신의 사회인류학자인 오르티즈(Ortiz, 1995[1947])에 의해 고 안된 개념으로, 오르티즈는 쿠바의 역사 자체가 문화횡단의 과정이었다고 설명한
제국주의적 관점 내에서 고정되어 있던 문화의 수신-발신 관계를 해체시 키고 이질적인 문화가 다방향으로 교차하는 양상을 일컫는다(이동연, 2006).30) 아파두라이(Appadurai, 1996/2004)가 포착한 전 지구적 ‘탈구’
가 이에 해당한다. 아파두라이는 오늘날의 문화가 중심-주변 모델로는 이 해할 수 없는 복합적인 탈구적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오 늘날의 사람들은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말한 ‘상상된 공동체’에서 더욱 확장하여 “상상된 세계들”(62쪽)에 살고 있으며, 그가
‘풍경(scape)’31)으로 명명하는 각종 문화 흐름들은 문화지리적 경계를 넘 나드는 유동적이고 비규칙적인 양상을 의미한다.
문화횡단의 층위에서 중요하게 대두한 개념이 ‘혼종성(hybridity)’이다.
혼종성이란 “분리된 형식으로 존재해 온 불연속적 구조나 실천들이 새로 운 구조, 대상, 실천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서로 결합하는 사회문화적 과 정”(Canclini, 2001/2011, 14쪽)을 의미한다. 칸클리니(Canclini, 2001/2011)는 오늘날의 혼종성을 새로운 양상으로서 바라본다.32) 오늘날
오면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개인이 특정한 지배적 문화를 습득하고 이에 적응해나가는 것(acculturation)이 아니라, 이전 문화가 사라지기도 하고 (deculturation)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기도 하며(neoculturation) 복잡다단한 변 화가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30) 이동연(2006)은 국제적 문화 교류의 개념을 세 층위로 구분하고 이를 단계적인 발 전의 방향으로 바라본다. 첫 번째 층위로서 문화 지배(cultural dominance)는 문 화수탈론, 문화종속이론, 문화제국주의론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문화 교류의 양상이다. 두 번째 층위인 문화 교환(cultural exchange)은 중립적 입장에서 상 호 간의 문화 소통을 의미한다. 세 번째 층위가 바로 문화횡단이다.
31) 아파두라이는 탈구를 탐구하는 기초틀로서 다섯 가지 흐름인 에스노스케이프 (ethnoscapes), 미디어스케이프(mediascapes), 테크노스케이프(technoscapes), 파이낸스스케이프(finacescapes), 이데오스케이프(ideoscapes)를 제시한다. 이는 각각 사람, 미디어, 기술, 자금, 이념이 전 지구적인 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면서 유 동적으로 이동하거나 영향을 주고받는 양상을 일컫는다.
32) 혼종성이 최근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특성인 것만은 아니다. 버 크(Burke, 2009)는 수백 년 전 개신교인들이 이교도의 문화를 부분적으로 취하거 나 유럽 국가들의 언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뒤섞이는 역사를 형성하는 등 혼종성은 문화의 기본적인 조건처럼 늘 존재해 왔음을 보여 준다. 칸클리니 (2001/2011) 또한 식민주의자와 원주민들 간의 인종적 혼합인 메스티사헤 (mestizaje)와 종교적 융합인 신크레티즘(syncretism)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의 혼종성은 경계지대와 대도시를 그 조건으로 한다. 이질적인 문화 접촉 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소비 대중이 존재하는 경계지대와 메트로폴리스는 혼종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공간이다. 전통적인 공동체 개념이 사라지 고 탈영토화된 배경 속에서 모순적인 것들이 공존할 수도 있고 보다 유연 한 문화의 유통이 일어날 수도 있다. 더욱이 혼종성은 초국적 산업 지형 속에서 대중문화의 소비층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문 화생산 전략의 산물이기도 하다(Kraidy, 2002; 김수정·양은경, 2006).
포스트식민주의적 흐름 속에서 혼종성 개념은 문화제국주의론에 대항해 설명력을 갖는 주요한 비판적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혼종성의 정치학 에 대한 주목이 이루어지고 있다(Lowe, 1991; Pieterse, 1994; Canclini, 2001/2011). 혼종성이 지닌 정치성이란 본질주의적인 담론으로부터의 해 방에 있다. 혼종화의 과정 속에서 낭만주의적인 민족 및 인종 개념은 힘을 잃는다. 피에터스(Pieterse, 1994)는 혼종화로서의 세계화는 “‘자아의 원 천’의 다양화 및 확대”(p.167)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근대 사회에서 국 민국가 기준으로 정체성이 구획되었던 것과 달리, 세계화로 인한 혼종화 과정에서 개인은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들을 콜라주처럼 자아 안으로 기 입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즉, 개인 자체도 여러 문화적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배치물인 셈이다.
혼종화 과정에서 권력은 재구성된다. 혼종성의 힘에 대해 칸클리니 (2001/2011, 2006)는 수직적이고 양극적인 권력 개념에서 벗어나 탈중심 화된 ‘사선적 권력(oblique powers)’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혼종성에 대 한 일반적인 논의가 특별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에 기대고 있지는 않 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사선적 권력은 배치 이론에서 정동의 역학과 공명 하는 부분이 있다. 앞서 레디(2013)가 분석했던 줌파 라히리 소설을 보자 면, 백인 미국인 미란다가 조우한 발리우드 배우 딕시의 이미지는 초국적 뷰티 배치 안에서 탈주선을 형성한다. 그 탈주선은 서구 백인의 세계를 지 방화하고 인도 여성의 인종화된 몸을 코스모폴리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 써 문화제국주의 힘의 방향을 비껴가는 사선적 권력을 일으킨다. 즉, 문화
횡단은 사선적으로 작동하는 탈주선을 만들어 내는 움직임이고, 그로 인해 혼종적인 문화적 배치가 생성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아시아의 문화를 사유한다면 어떠할까? 1970~80 년대 홍콩 영화와 90년대 일본의 트렌디 드라마에 이어 한류에 이르기까 지, 동아시아가 형성해 온 초국적 대중문화는 동아시아 문화횡단 현상을 방증한다. 이에 동아시아 문화의 혼종성에 대한 사유가 확장되고 있으며, 특히 한류에 대해서는 혼종성의 측면에서 접근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예 를 들어 김수정·양은경, 2006; Shim, 2006; Yoon, 2017 등). 더욱이 한 류가 동아시아를 넘어 서구권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문 화제국주의론은 물론 같은 문화권 내의 문화 유통을 설명하는 ‘문화적 근 접성(cultural proximity)’이나 ‘문화적 할인(cultural discount)’ 개념으 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가운데 혼종성이 유효한 설명력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대중문화물이 지닌 혼종성은 한편으로 이와부치(Iwabuchi, 2002)가 말하는 “문화적 무취(culturally odorless)”(p.27) 또는 “무코쿠세 키(mukokuseki/무국적)”(p.28)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와부치는 일본 망가나 게임 등이 세계 시장에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이유가 일본의 국 적성이 많이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일본 망가와 게임 속 캐 릭터들의 외양은 일본인과 닮지 않았을 뿐더러 인종 및 국적에 대한 단서 가 뚜렷하지 않다. “다양한 ‘국지적’이고 ‘낯선’ 요소들의 문화적 혼합과 병치의 과정에서 의도적으로건 비의도적으로건”(Iwabuchi, 2014, p.48) 만들어진 이 무국적의 배치란 문자 그대로 ‘탈영토화’된 형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탈영토적인 혼종성의 미학은 K-팝 스타의 외양 등 한국 대 중문화에서도 공유됨으로써(홍석경, 2013)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횡단에 기 여한다. 앞서 카와시마(2002)의 논의를 통해 부분적으로 확인된 바 있듯, 미백 또한 이와 같이 탈영토화된 무국적성의 한 요소로 해석 가능하다면, 이것이 지닌 사선적 권력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더불어 여기서 제기되는 정치적 질문들이 있다. 탈영토화는 늘 재영토 화를 예비한다. 혼종성 개념이 문화제국주의의 일방향적 영향력에 대한 설
명을 다소 무화시킨 반면, 아시아 역내(intra-regional)에서 형성되는 혼 종성은 또 다른 형태의 영토화하는 힘을 내포할 수 있다.33) 문화횡단이 반드시 평화로운 상호교류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새로 운 영토화의 힘에 제국적 권력이 작동하지는 않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 다. 그리고 ‘혼종성’이라는 힘이 한 영토를 분절할 때 포섭하는 것과 배제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다민족·다인종을 향해 가 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다.
제 3 절 미백인 되기
앞서 배치는 ‘A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보다는 ‘A는 무엇을 하는가’를 질문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배치가 던지는 질문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 게’, ‘어디서’, ‘언제’와 같은 의문사를 수반하는 질문이고, 이는 ‘본질’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질문이다(Nail, 2017). 단일하고 영구적 인 상태를 부정하는 배치는 곧 본질주의에 대항하는 관점을 드러낸다.
이 절에서는 배치 이론을 통해 정체성과 주체성을 어떻게 논의할 수 있으며 그 의의는 무엇인지를 짚어 보고자 한다. 우선 사회구성주의적 관 점의 주체와 구조 논의에서 욕망과 생성의 관점으로의 전환에 대해 살펴 본다. 그리고 욕망과 생성의 배치에서의 주체란 체화된 주체이며 “부정 없 는 차이의 개념”(Deleuze, 1968/2004, 19쪽), 즉 탈중심화를 통해 이루어 지는 ‘되기(becoming)’를 의미한다는 점을 살펴본다. 이 절의 이론적 논 의를 통해 미백하는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구조적 권력에 종속된 것으로 정의하지 않고 보다 해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한다.
33) 예를 들어, 김수정·양은경(2006)은 2000년대 초반의 한일 합작 드라마를 살펴봄으 로써 동아시아 대중문화물의 혼종성이 권력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한일 합작 드라마가 지닌 혼종성이란 범아 시아적 문화물을 통해 소구 시장을 확대하려는 산업적 전략임과 동시에 역사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