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한 선행연구의 검토에서 살펴본 바대로, 포스트식 민주의의 논쟁은 포스트(post)라는 접두사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진행되어 왔으며, 시대적 의미(‘이후)과 인식론적 의미(‘너머’) 어느 쪽에서도 기준점 에는 유럽 중심적 식민지관이 작동한다는 모순이 있다. 이 난관은 포스트 식민주의의 유명한 질문인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Spivak, 1988/2013)를 통해 요약된다. 관련해서 스 피박(1988/2013)이 자신의 이모할머니인 부바네스와리 바두리의 자살을 언급하는 부분을 주목할 만하다. 부바네스와리는 1926년 인도 독립을 위
한 무장 투쟁을 수행 중 자신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러나 자신의 자살이 당시 인도 사회 관념 속에서는 불륜으로 인한 임신으로 오 해 받을 것을 예측하고, 일부러 생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목숨을 끊 었다. 더욱이 이 행동은 힌두 문화에서 과부가 죽은 남편을 화장한 후 자 신도 불태우는 과부 희생 의례인 사티(sati)에서 과부가 생리 중에 불태워 져서는 안 된다는 공리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바네스와리의 의도는 제대로 읽히지 못하고 오랫동안 불륜에 의한 자살로 추정되었다.
이 사건을 토대로 스피박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위주체의 목소리가 사 회적으로 제대로 수용될 만한 언어나 배경이 없는 조건 속에서 하위주체 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부바네스와리의 말은 해독될 적절한 맥락 을 가져보지 못했고, 스피박은 또 다른 부바네스와리들의 의도를 가로막는 구조를 해체하고 그들의 말이 전달될 수 있는 맥락, 그 ‘상황성 (situatedness)’을 찾아내는 것을 지식인의 윤리적 소임으로 보고 있다.
이때 하위주체의 말이 해독될 맥락을 마련한다는 것이 지닌 함정을 주 의할 필요가 있다. 하위주체가 지닌 어떤 지정학적 특수성이 그를 ‘하위’
주체로 만들었는가를 부각하는 방식은 식민 구조를 탈피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하위주체의 “원래의 ‘맥락’과 ‘특수성’을 성급하게 제공하면 지배담 론과의 공범관계가 생길 수 있다”(Chow, 1993/2005, 65쪽). 이어지는 부 분에서 아시아인에게 부여되는 ‘진정성’의 덫에 대해 서술하겠지만, 어떤 하위주체의 진정한 맥락을 ‘복구’시키겠다는 노스탤지어적 접근은 자칫 하 위주체를 그 특정한 상황성 및 맥락 속에 가두는 효과를 지닐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적 또는 보완적 사유의 틀로서 들뢰즈와 가타리 (1980/2001)의 ‘유목론(nomadology)’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유목론은 두 가지 정신적 공간을 가정하는데 하나는 ‘홈 파인 공간(striated space)’이고 다른 하나는 ‘매끈한 공간(smooth space)’이다. 홈 파인 공 간에는 정해져 있는 홈을 따라 실재와 진리가 존재하며, 그것은 제국과 주 체의 원리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정신적 공간을 거부하고 유목적 사유의 공간을 제안하는데, 그것이 바로 매끈한 공간이다. 매끈한 공간은 무규정적인 열린 공간이다. 여기에는 ‘상위’도 ‘하위’도 없다. 따라서 ‘소위
하위주체’에 대한 더 해방적인 접근을 이 매끈한 공간 속에서 추구해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홈 파인 공간에 맞서는 요소를
‘전쟁 기계(war machine)’라고 부른다. 유목적인 전쟁 기계는 제국적 장 치들을 파괴하며 매끈한 공간을 추구하는 표현적 형식이다.38)
브라이도티(1994)는 들뢰즈의 유목론을 바탕으로 유목적 주체(nomadic subject)를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사고와 행동 양식에 정착하는 것에 저항 하는 비판적 의식”(p.5)을 함양한 주체로 정의 내린다. 유목적 주체는 정 상성으로 간주되는 주체의 언어에 편입되지 않고 영토화의 흐름에 저항하 는 다양한 차이의 힘을 통해서 나타난다. 차이의 힘에 기반한 신체 및 주 체 생성(되기)의 의미 때문에 유목적 주체는 ‘차이의 정치학(politics of difference)’을 주창해 온 포스트식민주의적 여성주의의 정치적 함의를 내 포한다. 이에 대해 브라이도티는 다양한 경험의 흐름들이 체화된 여성 신 체와 그 특수한 위치에 주목하자는 차원에서 “위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location)”(p.17)을 주창했다. 이 위치의 정치학이란 물론 앞에서 언급 한 하위주체의 상황성에 대한 강조가 지닌 함정을 지닌 교착적 의미로서 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배치 개념은 차이의 정체성을 논할 때 한계로 지적되는 정적인 의미로서의 차이(가령 백인여성‘으로부터의 차이’) 가 아닌 들뢰즈주의가 지향하는 의미로서의 차이(되기)를 지향한다. 이로 써 배치 개념은 대개의 소수자 주체성에 대한 연구가 주창해 왔던 차이의
38) 들뢰즈와 가타리(1980/2001)는 유목적 전쟁 기계에 대한 공리를 “유목적 전쟁 기 계는 소위 표현의 형식이며, 이것과 관련된 내용의 형식이 바로 이동적 야금술이 다”(797쪽)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동적 야금술(itinerant metallury)’이란 공간에 구멍을 뚫어 이동함으로써 구멍투성이로 만드는 기술이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론이 지닌 배치는 담론적으로는 유목적 전쟁 기계가 매끈한 공간을 만들고, 이동적 야금술과 같은 방법으로 구멍 뚫린 공간이라는 물질적 흐름을 만드는 것 이다. 이에 대해 9장에서 다시 서술하겠다.
내용 표현
실체 구멍 뚫린 공간 매끈한 공간
형식 이동적 야금술 유목적 전쟁 기계
표 3-4 유목론의 배치
출처: Deleuze, G., & Guattari, F. (1980). Mille Plateaux. 김재인 역 (2001). <천 개의 고원>. 797쪽.
정치학에 새로운 결을 더한다. 소수자 A가 억압 받는 위치의 차이성을 설 명하는 것이 아니라, ‘A-되기’를 통해 A와 관계하는 다른 주체 항들의 상 호변환, ‘더불어-되기’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되기의 정치학’을 통해 발견한 유목적 주체는 보다 탈중심화된 지평, 매끈한 공간에 위치한다.
제국주의의 권력 속에서 ‘하위’주체로 규정된 하위주체로부터 차이의 존재론을 내포한 유목적 주체를 이끌어 내는 것은 들뢰즈주의적인 탈식민 담론 생성 작업이다. 유목적 주체는 특정 단일 권력의 억압이 자신에게 남 긴 피해의 자국을 부각시키며 그것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다. 유목 적 주체는 여러 힘과 욕망이 교차하는 배치 속에서 체화된 신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미백 배치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인종색 언어가 만든 ‘홈’을 따라 움직이는 하위주 체의 모습이 아니라, ‘매끈한’ 미백 문화 속 여러 요소의 연결망과 각각의 국면 속에서 생성되는 유목적 주체, 또는 ‘미백 기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