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진(43세, 주부): 있어 보인다고 느껴요.
지연(44세, 회사원): 좀 부유한 느낌?
효진: 네네.
지연: 옛날로 치면 마님은 하얗고 일하는 사람은 까맣고.
윤정(46세, 주부): 부티.
희수(44세, 주부): 네, 부티.
윤정: 일단 우리는 하얀 피부가, 왜 보면 부티 나는 느낌.. 좀 검고 이러면 안 그런 느낌.
표적집단면접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미백, 또는 흰 피부와 관련해 가 장 먼저 떠오르는 것에 대해 부유함을 언급했다. 이는 분명 미백이 계급적 욕망과 관련해 인식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피부색 담론에서 계급 상승의 욕망은 상당히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많은 국가에서 피부가 희다는 것은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이 적다는 것으로, 바깥에서 노동을 하지 않는 부유 층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서구 문화에서도 태닝 피부가 사 회경제적 여유로움의 지표가 되기 이전까지는 상류층은 더 밝은 피부로, 노동자 계층은 어두운 피부로 재현하는 식의 관습을 통해 피부색과 계급 의 관계에 대한 관념을 꾸준히 재생산해 왔다(Dyer, 1997/2020; Foster, 2012). 한국 또한 역사적으로 장시간 바깥에서 노동하는 계층과 그 노동 의 수혜를 받으며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계층 사이에 피부색 차이가 있 었을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희고 고운 살결은 부의 지표로 여겨졌을 것이 다. 계급과 공간의 문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피부색은 도시/시골, 또는 도시/지방의 위계로서 해독되기도 한다.89)
89) 박완서 작가의 <그 여자네 집>(1998)에서는 “곱단이는 시골 아이답지 않게 살갗 이 희고, 맑은 눈에 속눈썹이 길었다”라고 묘사는 피부색과 도시/시골의 이분법 을 보여 준다.
첫인상은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처음에 딱 보고 누 가 하얗잖아요, 그러면 그냥 저 사람 보고 ‘서울 사람인가보다’ 그런 생 각하고. 지방에 있을 때 주변에 친구들이 하얀 애들이 없었어요. 너무 지방도 아니고 거기서도 시, 진주시인데, 하얀 애들이 없었어요. 애들이 밭일하고 그런 건 아닌데. (지훈, 27세, 취업준비생)
이처럼 미백의 피부가 ‘부티’를 드러내거나 도시성의 지표처럼 곧잘 상 상되는 가운데, 본 연구는 피부색과 계급성 간의 직접적 상관성을 밝히거 나 흑인 노예제를 주요한 역사적 맥락으로 하는 백인성 연구의 계급적 논 의를 한국의 미백 문화에 성급히 대입하지 않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 밝히 고자 하는 것은 미백이 소비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신체기술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백 피부의 유무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경제력과 연결되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고 없고’를 직접적으로 말해 주기보다는 “있어 보이고”
“없어 보이는”(지연, 44세, 회사원) 지표로 기능한다. 그리고 ‘있어 보인 다’는 것은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전통적인 계급적 차원보다 미백 의 신체기술적 역량의 차원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있어 보인다’는 것은 미백의 피부로의 신체 변형을 위한 행위능력이 커 보인다는 것을 암 시한다. 화장품 광고(예를 들어 <그림 5-15>)에서 본 것과 같이 밝고 광 이 나는 투명한 피부는 비용과 노력을 수반한다는 인식이 공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용과 노력이라는 차원에서 미백은 한국에서 뷰티를 논할 때 그 맥락 적 특수성으로 동원되는 신자유주의의 차원에서 설명이 이루어져 왔다. 외 모를 가꾼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차원에서 자기 계발을 위한 소비로 의미화되곤 한다(Holiday & Elfving-Hwang, 2012; 태희원, 2012; Lee, 2018; Jang et al., 2019). 특히 이는 한국의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뷰티를 설명하는 주요한 맥락이다. 이처럼 성별을 불문하고 자기에 게 투자한 만큼 사회 및 시장으로부터 더 나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 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 담론이 미백 배치 내에서도 작동한다. 미백의 피 부를 가진 사람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미백에 대한 세분화된 지식/
정보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에게 시간이든 돈이든 특정 비용을 투자
함으로써 자신을 ‘있어 보이는’ 위치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통치적인 합리성의 차원 외에, 개인은 소비를 동반 하는 경험 자체에서 미백의 비합리적인 욕망 내지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 다. 피부 클리닉이나 에스테틱숍마다 제공하는 다양한 미백 관리 프로그램 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며, 그 수요자의 경제력이나 효용감도 다양하기에 비 용의 높고 낮음을 판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비자본주의는 ‘비용을 지불 한다’는 행위 자체와 연결된 자기역능감 및 신뢰감을 만들어 낸다.
제가 잘 모르고 그러니까 어느 날 ‘아 그래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까 좋은 걸 써보자’ 이러고 설화수를 쓰기 시작했어요. […] 사실 설화수 가 좀 비싼 라인이잖아요. 그러니까 ‘비싸니까 좋겠지, 그래 이왕이면 좀 좋은 거 바르면 노화가 그래도 1프로라도 늦어지지 않을까’라는 마음으 로.. (윤정, 46세, 주부)
비싼 게 좋아요. 비싼 건 이유가 있거든요. (수영, 29세, 회사원)
즉, 합리적인 자기 통치 전략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피부를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려는 태도 및 그 소비 과정 자체에서 자신의 신체를 고급화한다는 감각이 있기에 미백은 욕망되고 실천된다. 대부분의 미백 미 용 시술은 1회성이 아니라 5회, 10회와 같은 식으로 패키지화되어 있어, 고객들은 한 번에 고액을 지불하고 ‘일련의 과정’으로서의 미백을 구매하 게 된다. 연구자가 방문했던 피부과의원의 경우 미백 관리가 포함된 여러 패키지가 있었는데, 가장 저렴한 것은 각질, 기미 제거와 미백, 비타민 투 여 등을 통해 “지우개로 지운 듯한” 피부를 만들어 준다는 프로그램으로 10회에 35만원이었고 IPL90)과 토닝91), 미백관리로 “피부완성”을 목표로 하는 패키지는 8회에 85만원이었다. “물광힐러”, “미백힐러” 등 고비용의 주사를 동반하는 시술만이 1회(39만원)를 기준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물론 한 패키지를 끝냈다고 그 효과가 즉각적이거나 영구적인 것이 아니기 때
90) ‘Intense Pulsed Light’ 지칭하는 것으로, 피부에 광선을 조사하여 피부색소질환 을 치료 및 개선해 주는 방법을 뜻한다.
91) 레이저 등을 이용해서 피부 톤을 정돈하는 것을 뜻한다.
문에 소비의 한도는 정해져 있지 않다. 결국 미백은 ‘더 많이 지불할수록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소비자본주의의 기제를 통해서 고급화의 신체기 술로 작동한다.
한편 고급화의 신체기술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 외의 차원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피부과의원은 다른 진료과목의 병원들에 비해 사용하는 장비 나 약품명 등을 병원 내 공간이나 웹사이트에 전시하는 경우가 많다. “더 마블레이트”, “COSJET TR”, “CO2 레이저”, “리쥬란”, “아그네스 레저”,
“클라리티” “젠틀맥스 프로 레이저”, “PiQo4”, “제네시스” 등 비전문가에 게는 이름만으로는 용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언어들을 피부과의 온‧오 프라인 공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시된 장비명은 1년에도 몇 번씩 업데 이트된다. 이런 낯선 외국어로 된 각종 명칭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술 및 관리를 받으면서 신체가 얻을 잠재적인 효용을 느끼게 만든다. 비싼 최 신식의 장비라는 짐작, 용어의 비일상성, 그 비일상적인 것이 지극히 일상 적인 나의 신체와 접속할 것이라는 낯섦, 두려움, 설렘, 이런 것들이 피부 과에서 미백 관리를 받는 경험을 ‘있어 보이는’ 것으로 만든다.
실제 시술 및 관리에서도 하나의 단계만을 거치지 않으며, 여러 단계에 걸쳐서 여러 장비와 제품이 얼굴에 연결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연구자 의 경험을 예로 들자면, 첫 번째 방에서 세안 도구를 이용하고, ‘시술’이 이루어지는 두 번째 방에서는 눈가리개를 쓴 후 두 가지 장비를 경험한다.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생긴 장비가 어떤 식으로 피부와 접촉하 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소리나 열을 통해 서로 다른 두 개의 레이저 장비 가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피부의 자극과 열감을 완화하기 위해 냉찜질 효과의 도구가 사용된다. 세 번째 방에서는 ‘관리’가 이루어지는데, 압출기, 거즈, 주사바늘, 토너, 화장솜, 스크러버, 고무마스크, 정확한 종류 를 알 수 없는 몇 가지 젤 형의 화장품이 얼굴을 거쳐 간다. 그 과정에 손에 작은 스틱을 쥐어 주면 그것을 잡고 있는 동안 간호조무사가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고 또 다른 스틱으로 얼굴을 천천히 훑는 작업은92) 장비와 신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체험되는 경험이다. 1~2시간에 걸친 일련의 과정
후의 피부란 자연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통합되어 있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딱딱하거나 고통을 동반한 촉감의 장비들이 지나갔고 낯선 물질이 스며들어 있는 비일상적 신체로 변용된 상태다. 이와 같이, 피부과 시술을 통한 미백이 고급화의 신체기술로 여겨지는 것은 피부와 낯선 요소 간의 다단계에 걸친 접속을 하는 비일상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백의 방식은 이와 같이 고비용을 요하는 시술뿐만 아니라 오이 마사지를 하거나 태양을 피하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서도 이 루어진다. 그러나 피부과 시술과 뷰티 및 에스테틱 산업을 통해 미백을 구 매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현실에 서,93) 미백은 실제 어느 정도의 비용과 노력이 투자되었는가와 관련 없이 그러한 소비 영역에 관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시화하는 방식이다. 즉, ‘있 어 보이게’ 만드는 신체기술이다.
이러한 고급화는 뷰티산업 자체의 소비자본주의화 및 고급화와 맞물려 있는 부분이 있다. 선행연구에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본 연구가 ‘뷰티’라는 외래어를 채택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그에 가장 가까운 번역어인 ‘미용’과 는 다른 영토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미용의 역사는 곧 외모 치장 일반의 역사이지만 뷰티의 역사는 60년대나 들어서야 시작한다. 1960년 “월간지
<스타일>사에서는 여성들의 복장문화 향상을 시도하여 … <뷰티 쑈>를 열 리라 한다”(동아일보, 1960)고 서술된 기사는 ‘뷰티’라는 것이 소비주의적 이고 미디어 매개적이면서도 ‘있어 보임’의 맥락에서 도입된 단어임을 짐 작케 한다. 이후 뷰티는 80년대 후반에 들어서 ‘뷰티센터’, ‘뷰티아카데 미’, ‘뷰티가이드’ 등의 용어를 통해 그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특히 세분화 된 메이크업과 에스테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전문 기능인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뷰티아카데미’의 등장은 뷰티 개념이 ‘홈 케어’ 위주의 재래 식 미용이나 머리미용 개념과 다른 차원을 개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태평 양50년사편찬위원회, 1995). 그리고 90년대 중반부터 ‘뷰티산업’이라는 용 어로 일군의 영역을 비공식적으로 지칭하다가 한국보건산업진흥원(2007)에 서 정의를 공식화하고 “뷰티(미용)산업 발전전략”을 수립하면서 미용보다
93) 면접의 참가자 중 피부과나 피부숍을 언급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