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인식론에서 안다는 것은 탐구에 앞서 존재가 선재하기에 이를 발견하는 것 에 지나지 않았다. 사물이나 사태와 판단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진리론을 대응설
상황에서 문제를 잘 설정하면 이미 절반은 문제를 푼 셈이다. 거꾸로 관련된 문제를 잘못 잡으면 이후의 탐구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 다음 단계가 문제 해결의 결정(The Determination of a Problem-Solution)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야 비로소 관찰과 함께, 문제 해결의 결정에 관념도 관여한다. 여기서 관념의 역할은 일어날 어떤 것을 예상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관념은 먼저 제안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니까 모든 관념의 기원은 제안에 있다.
그러나 제안이 필연적으로 관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의 관찰과 제안된 의미 혹은 관 념이 서로를 발생시키며 발전한다. 그 다음은 추론(Reasoning) 단계이고, 이는 사실-의미의 조작적 성격(The Operational Character of Facts-Meanings) 단계로 이어진다. 이 단계는 가설의 입증, 테스트 단계인데, 5단계의 제목처럼 이 단계에서 관찰된 사실과 관념적 내용 은 모두 조작적 성격을 갖는다(LW12: 109-118).
이라고 하며, 이는 스콜라철학에서 ‘사물과 지성의 일치’라는 진리의 정의를 갖기도 하였 다. 감각적 차원의 대응설이나 이성적 차원의 대응설은 그 대상의 존재 지위는 다를지라 도 그 무엇이 탐구 이전에 선재한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나딩스는 듀이의 인식론을 설명하면서, 먼저 듀이가 자연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 을 염두에 두라고 조언한다. 듀이에게 앎은 탐구의 과정을 가리키기에 ‘앎(Knowing)’을
‘지식(Knowledge)’보다 더 선호했다. 나딩스는 듀이의 인식론이 ‘지식’ 개념의 명사-해석 에서 동사-해석으로의 변화를 함축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수학적 예로서 제시한다. 학 생은 수학식, ‘√
x
+√y = √
x+y, x, y>0’ 을 사용하여 문제를 풀면서, 그것을 참이라고 간주하고 지식으로 삼았지만 이후에 학생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와 마주한다. 이러한 문 제상황에서 학생은 규칙 자체의 진위 여부를 다시 검토하게 되어, 그 규칙이 참이 아니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경우, 처음의 규칙은 수용되지 않을 것이며 지식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듀이의 지식은 실용적 차원의 것으로, 그 지식의 성립 근거는 사실 과의 대조가 아니라, 가설 형성과 검증을 견뎌내는 데 있다.77) 이러한 지식은 실용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상황을 해결하는 경험 양식이다(LW4: 234).이렇게 경험 양식으로서의 지식관이 듀이의 인식을 떠받치고 있다. 듀이의 인식론이 참다운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일 수 있는 것은 전통적 인식론의 고정된 불변의 실재도, 그리고 그러한 실재를 반영하는 지식도 상정하지 않은 채, 경험하는 세계 그 자 체를 대상으로, 탐구를 통한 도구적 앎을 취하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의미는 우리가 실재를 독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지식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실재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 험하는 세계는 그 주된 국면에서 알려진 세계, 이해된 세계, 지적으로 일관되고 확실 한 세계가 아니다. 앎(Knowing)은 경험된 대상에 형식을 부여하는 조작으로 구성된 다. 그 형식에서 사건의 진행 과정이 의존하는 관계들이 확실히 경험된다. 앎이란 실 재의 과도적인 변경과 재편을 가리킨다. 앎은 매개적이며 도구적이다. 즉, 앎은 현실 존재의 상대적으로 임시적이고 우연적인 경험과 상대적으로 확정적이고 정의된 경험 사이에 있다(LW4: 235-236).
듀이의 인식론에서 앎은 상대적인, 임시적 경험과 완결된 경험 사이의 과도적인 조작
77) Nel Noddings, Philosophy of Education (2nd ed.), Philadelphia, PA: Westviex Press, 2007; 박찬영 옮김, 『넬 나딩스의 교육철학』, 서울: 아카데미프레스, 2010, 43-45쪽.
으로서 존재한다.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여기서의 앎은 그 자체로 경험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듀이의 앎은 경험을 경험답게 하는 조작이다. 조작이라는 점에서 앎은 어 떠한 실재도, 그리고 그 실재를 반영하는 진리론도, 인식주관에 주어지는 감각자료도 상 정하지 않는다. 앎은 경험 그 자체로부터 확정된 지식이 아니라, 동사로서의 앎에 충실할 뿐이다.
물론 듀이가 비판적 대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지식’을 사용할 때 그것은 앎에 다름 아니다. 듀이에게 지식은, 특히 반성적 지식은 모두 도구적이다(LW4: 218). 그러나 여기 서 도구적이라는 것이 실재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도, 그렇다고 단순한 상대주의를 의미하 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탐구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아 프리오리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구 과정 중에 전개된,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된 것이다.78) 다만 도구적인 것으로 서의 반성적 지식을 그 결과물로부터 떼어 놓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것은 지식의 기원과 기능의 맥락을 무시한 접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LW4: 175). 반성적 지 식은 주어진 맥락 속에서 도구적 성격을 갖지만, 이를 단순한 수단으로 의미해서는 안 된 다. 왜냐하면 듀이 인식론에서 수단은 고정된 불변의 것이 아니라, 목적과 연동되어 그 지위가 변화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단은 또 다른 어떤 것의 목적으로 기능하고 있 으며,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 또한 또 다른 목적에 대해서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듀이에게 도구주의79)는 가설의 기대로 탐구의 매개 작용80)을 강 조한 것으로, 도구, 재료, 조건의 실험적 조작으로부터 기인하는 독특한 진리 이론을 낳는 다.
물론 명제적 진리는 명제가 가리키는 사태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듀이 인식론이 명 제표의 ‘진리’ 의미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듀이가 앎을 선호하지 만 ‘지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듯이, 명제적 진리 때문에 ‘진리’라는 표현을 아끼겠지만, 그 럼에도 우리는 듀이 인식론의 맥락에서 진리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보증된 주장 이다. 나딩스의 말처럼 탐구의 궁극적인 산물인 보증된 주장(warranted assertions)은 탐
78) Larry A. Hickman, Pragmatism as Post-Postmodernism: Lessons from John Dewey,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7, pp. 209-210.
79) 듀이가 ‘도구주의’로 명명하기 시작한 것은 1903년 시카고대학교에서 그와 학생, 동료들이 사상학파로서 도구주의를 천명하며, 그 함축된 바를 산출하고자 한 『논리 이론 연구』
(Studies in Logical Theory)라는 연구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Ibid., p. 209.
80) Raymond D. Boisvert(1998), op. cit., p. 41.
구에 의해 폐기되기 전까지는 지식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81) 듀이에게 탐구를 이끄는 모 든 진술 혹은 신념은 지식에 해당되고, 가설과 검증을 통과한 진술들의 경우, 지식 혹은 진리가 될 수 있는데, 한시적으로 보증된다는 의미에서 듀이는 이를 ‘보증된 주장’이라고 말한다.82)
그러면 듀이는 여기서 탐구의 통제를 통한 결과로서 ‘지식’이라는 낱말을 사용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낯선 ‘보증된 주장’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것일까? 게다가 듀이는 탐구 의 종언으로서 산물을 신념으로, 혹은 지식으로 명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듀이에게 신념 과 지식이 제한적으로 쓸 수 있는 기술어임에도 그것을 살려 쓰지 않은 것은, 일반적으로 신념은 주관적인 심리적 사태를 함의하는 문제가 있어서이다. 그럴 경우, 탐구의 종식을 가리키는 낱말로서의 그 의미가 흐릿해지는 문제가 생긴다. 지식 또한, 듀이의 인식론에 서는 만족스럽게 탐구를 마친 것이 지식을 의미하지만, 우리의 일상 언어 ‘지식’은 탐구와 무관하게 그 자체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어, 둘 다 충실하게 듀이의 의 도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 때문에 듀이는 보증된 주장을 선호한다. 보증된 주장과 관련되어, 중요한 것은 탐구의 속성이다. 그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 된 모든 분야에서 ‘지속적인 과정’을 가리키고 있다.
특정 탐구에 의한 특정 상황의 ‘해결’은 그렇게 해결된 결론이 언제나 해결된 채로 있을 것이라고 보증해 주지 않는다. 확고한 신념의 획득은 점진적인 문제이며, 추가 탐구가 필요 없을 정도로 확고한 신념이란 없다. 지속된 탐구의 수렴적, 누적적 효과 야말로 일반적 의미에서의 지식을 규정한다. 과학적 탐구에서는 무엇을 해결해야 할 지 혹은 무엇이 지식으로 간주해야 할지의 기준이 아주 확고해서 이 기준은 추가 탐 구의 자원으로서 이용될 수 있고, 추가 탐구에서 수정 대상이 되지 않을 방식으로는 확고하지는 않다(LW12: 16).
지속적인 탐구의 누적적 효과가 지식을 규정해 주지만, 그것 역시 절대적인 확고한 신념일 수 없다. 어떠한 탐구의 산물도 또 다른 탐구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 서 듀이는 ‘보증된 주장’이, 낱말의 애매성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장의 보증을 분명히 함의한다는 데서 신념이나 지식보다 더 나은 표현이라고 본 것이다. 듀이는 보증 된 주장 이외에도, ‘보증된 주장가능성(warranted assertibility)’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81) Nel Noddings, op. cit., p. 43.
82) Ibid., p. 149.
이는 추상적인 것에 대한 탐구와 관련하여 지식을 추상적 낱말로서 취한 것이다(LW12:
16). 중요한 것은 보증된 주장이든 보증된 주장가능성이든, 그것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결 론이 지속적으로 갱신된다는 것이다(LW12: 17).
지금까지 우리는 (1)과 (2)에서 탐구와 도구로서의 지식을 다루었는데, 이제 듀이의 사고개념이 갖는 그 함의에 주목하여 개념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사고는 탐구라는 활동 으로 전개되지만, 거기에는 도구적 차원 그 이상의 풍성한 의미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