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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으로서 독립교과화: 이야기 텍스트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44-155)

아마도 듀이가 어린이에게 철학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간접적 이유 중 하나는

6. 듀이의 페다고지는 다음의 것을 적극적 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참으로 진보적이다.

(a) 정서. 어린이의 정서 요청은 그들의 탐 구 참여를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b) 사회성. 어린이는 본성상 함께 작업하 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형성을 위해 준비된 그들의 상태는 억압해서는 안 되고 장려해야 한다.

(c) 습관형성. 습관은 추론, 판단 및 그 밖 의 탐구 기술 발달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d) 상상력. 어린이의 반성과 상상력은 이 능력들을 상쇄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 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e) 흥미. 어린이의 의미 탐구는 흥미가 전 개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6. 어린이철학의 이야기 텍스트를 갖고서 어린이철학을 가르친다. 이 이야기는 이야 기가 전개될 때 탐구패러다임과 대응되는 것을 드러내 주는 하부구조를 가진 이야기 를 사용한다.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다양 한 철학적 탐구 방법의 모델로 기능할 수 있다. 이들은 여러 사고 형식으로, 즉 경험 적, 분석적, 직관적, 합리적, 현상학적 사고 로 교실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적 관념을 제공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전통적 철학과 반대로, 이 전체적인 이야기는 진 행 중인 철학적 사례로서 기능한다. 이 이 야기는 탐구에 대한 생활의 극화를 제공한 다.

그의 도덕교육이 가리키듯, 탐구는 전 과목에 걸쳐 교수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다. 그는 철학적 탐구를 별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필요하다 생각하더라도 철학 적 탐구가 지향하는 논의를 굳이 특정 과목을 두어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 을 것이다. 듀이는 도덕교과를 별도로 두어 학교에서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 니라,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한편으로 도덕교과가 이루 고자 하는 목표를 교과 전체, 학교에서의 총체적인 경험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본 데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경험한 도덕교육의 지평은 전통적인 덕목중심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과 경험이 도덕교육의 독립교과화에 대한 상상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어린이 철학에서의 듀이 철학의 또 다른 도덕교육적 변용은 도덕교육의 독립교과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듀이에게 도덕교육은 교육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경험의 성장을 의미한다. 충동과 습 관을 조정하는 도덕교육과 함께, 보다 나은 것이 선임을 표방하는 듀이의 자연주의 윤리 학은 사회적 삶과 가치를 품은 지적 판단과 도덕적 발달을 동시에 강조했다. 그러나 듀이 는 특정 교과로서 시행되는 도덕교육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도덕교육이 특정 교 과의 수업이 아니라 학교의 전체적 교육과정을 통해서 전개되어야 할 총체적 교육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전기에 제시한 『비판 윤리 이론 개요』나 터프츠와 공 저한 중기 및 후기 개정판의 『윤리학』에서는 도덕교육을 위한 교과 논의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듀이는 1909년 출간된 중기 저서 『교육에서의 도덕원리』(

Moral Principles in Education

)에서 본격적으로 교과로서 도덕교육의 문제를 다룬다.

『교육에서의 도덕원리』는 1897년 발표한 「교육의 기저를 이루는 윤리적 원리」

(

Ethical Principles Underlying Education

)를 퇴고한 것이라는 점에서 도덕교육 및 윤 리학에 관한 전기 듀이의 중심 생각이 흡수되어 있다. 이 작은 책은 출간된 뒤 학교 도덕 교육에 관한 저서로 세인에 의해 크게 주목받았는데(MW4: 353), 거기서 듀이는 특정 교 과로서의 도덕수업을 문제로 삼는다. 도덕교육의 독립교과화에 대한 듀이의 비판을 살피 기 전에 먼저 듀이가 문제로 삼는 도덕적 관념(moral ideas)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도덕적 관념이란, 이후에 보다 나은 행위를 야기할 수 있으면 그것이 어떤 관념이 든 모두 ‘도덕적 관념’이 된다. 거꾸로, 보다 더 못한 행위를 야기한다면 그러한 관념은 모두 ‘비도덕적 관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특정 교과로서 도덕수업이 도덕에 관한 관념 을 가르치는 수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때에 따라 도덕적일 수 있지만, 얼마든지 비도덕

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도덕에 관해 가르치는 것, 다시 말해 전통적인 도덕수업은 그 자체로는 도덕적 관념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덕적 관념의 여 부는 이후의 행위를 보다 낫게 만들어주는지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듀이의 문제의식은 그것이 도덕적 관념인가, 아니면 도덕에 관한 관념인가에 있지, 도덕수업을 실시하는지 여부에 있지 않다(MW4: 267-268).

부모든 교사든 교육자의 임무는 어린이와 청년에 의해 습득되는 관념이 가능한 한 행동을 이끄는 추진력, 움직이는 관념이 될 수 있도록 활력 있게 습득되는가를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요구와 기회로 도덕적 목적은 그 주제가 무엇이든 모든 수 업에서 지배적이고 보편적이게 된다. 이런 가능성이 없다면 모든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인성형성이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진술은 한낱 위선적인 가식이 될 것이다.

주지하듯 교사와 학생들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주의는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지적 인 문제에 기울여야만 한다. 직접적인 도덕적 고려를 항상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학습방법, 지적인 힘을 획득하는 방법, 그리고 내용을 동 화시키는 방법을 만드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는 행위를 보다 계 몽되고, 일관되며, 힘차게 만들어줄 것이다(MW4: 267-268).

위 인용문에서 듀이는 관념이 이후의 행위를 이끄는지 주의해 보도록 한다. 만일 도 덕적 관념이 이후의 행위를 야기하지 못한다면 모든 도덕적 구호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 라 무책임한 것이다. 그 때문에 듀이는 도덕적 관념을 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제언한 다. 학습방법과 지적인 힘을 얻게 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후의 행위를 보다 도 덕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습득하는 관념이 행동을 야 기하는 추진력이 되는가 여부에 있다. 학생들이 획득한 관념이 이후의 행위를 야기할 움 직이는 관념(moving ideas)이 된다면, 그것이 다름 아닌 인성교육이다. 직접적인 도덕적 고려를 언제나 가장 앞세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학습 방법을 잘 고려 하여 행위를 일관되게 하고 활기를 넘치게 하자고 제언한다.

그러나 듀이의 주장과 별도로, 인성함양을 고려하는 동시대의 교육비판가들은 학교 교육과정의 도덕수업 여부에 관심을 더 갖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듀이의 동시대 비판 가들은 학교에서 도덕수업 시수를 확보하지 않았을 경우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비판하고, 반면 학교 현장의 일반 교사들은 자신들은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도덕 교육을 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대립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도덕수업의 부재를 지목한 교육비판가의 비판에 대해 듀이는 도덕에 관한 관념을 가르치는 수업이

필연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야기 시키는지 묻는다. 듀이는 지식이 행위를 필연적으로 함축 하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을 수업의 직접적 대상으로 삼으려 는 시도 혹은 제안은 검토되지 않은 것이라고 하며, 일단 일반 교사들의 입장을 두둔한 다.

학교 밖 교육비판가들은 학교교육과정, 학교수업과정을 살펴보지만, 거기서 윤리 수업이나 ‘도덕 수업’을 위한 별도의 시간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 때 그들은 학교가

‘인성 함양’에 아무 것도 혹은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공 교육의 도덕 결여에 관해 강하게 강조한다. 반면에 학교교사는 이런 비판이 부당하 다고 분개하며, 그들은 “도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5일을, 그것도 하루 종일 쉼없이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에서 교사는 원리적으로 옳다. 그들이 그르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도덕에 관한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 어떤 것을 위해 시 간을 따로 마련해 놓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의 인성이, 학교의 분위 기와 이상이, 혹은 수업방법이나 가르치는 내용이 세부사항에서 지적인 결과를 행 동의 작용력이 될 수 있도록 인성과 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MW4: 268).

듀이가 도덕에 관한 수업, 다시 말해 ‘직접적 도덕교육’을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 교육의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직접적인 도덕교육은 도덕적 행위를 필연 적으로 야기하지 못하고, 행위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 성장의 변화는 적고, 그 교육 강 도도 약하다는 것이다(MW4: 268). 도덕수업을 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어떤 수업 방법으 로 도덕적 관념이 도덕적 행위를 야기했는지에 주목하라는 것이 듀이의 비판의 요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교사가 언제나 도덕교육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듀이는 그러한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할 것이 있다고 했다. 즉, 교사의 인성과 학교 분위기 와 학교가 추구하는 이상, 혹은 가르치는 방법이 학생들의 도덕적 행동에 동인이 될 수 있도록 수업의 결과와 학생들의 인성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듀이에 따르면 이런 조건을 만족시킬 때 학교교사들은 언제나 도덕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듀이의 요구사항을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교사 개인의 변화는 물론 학교 전체의 새로 운 재건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수용한다 하더라도 도덕교육의 독립교 과화에 대한 듀이의 비판은 언제나 정당한가?

립먼은 윤리적 탐구를 별도의 교과로 가르치는 것은 듀이의 비판과 무관하게 정당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고려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44-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