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이의 형이상학은 존재의 기원이나 그 토대를 해명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아니다.
가지계와 형상, 예지계와 같은 초월적 대상을 구했던 형이상학은, 전통적 철학자들이 원 하는 바를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듀이에게 형이상학은 ‘존재의 일반적인 특 징’을 발견하고, 기술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의 참된 모습
49) Ibid., p. 369.
을 언급하고 기술하는 것이 듀이의 형이상학의 임무였다. 듀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존재하는 내용에 대한 모든 분석의 필수요건으로의 근본 범주를 선택한다.50) 그것은 듀 이에게 ‘사건’과 ‘관계’이다.51)
듀이의 자연주의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것을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을 ‘사건(events)’
으로 간주한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나의 사건이다’(LW1: 63). 다시 말해, 존재하는 것 은 그것이 무엇이든 시공 속의 어떤 일어남으로 간주되는 것이지, 불멸의 실재로 존재할 수 없다.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자기 동일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LW1: 63).
‘사건’의 관점에 서면 정신과 물질에 대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시각 역시 재검토될 수밖 에 없다. 정신도 하나의 사건이고, 물질 또한 하나의 사건으로 간주된다. 듀이에게 존재하 는 모든 것은 사건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면, 기존의 관념론과 유물론은 서로 대립 되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모두 존재를 관념이든 물질이든 불멸의 고정된 절대를 인정한 다는 점에서 동일한 형이상학에 토대해 있는 것이다(LW1: 64).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물 질이든 정신이든 이를 시간에 녹슬지 않은 존재로서 상정했지만, 듀이는 이 둘을 ‘관계적 이고 기능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같은 맥락에서 구조를 불변의 것으로 서 간주하는 시각 역시 ‘사건들의 성격’에 지나지 않는 존재의 성격을 간과한 오류에 지 나지 않는다(LW1: 64).
전통적 형이상학의 대상인 의식, 정신, 물질도 물론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두고
50) Ibid., p. 369. 듀이는 과거, 전통에 대해서 배척하지 않는다. 듀이의 『경험과 교육』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구교육을 무조건적으로 배제하지 않았고, 새교육이라고 해서 찬양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술에서도 듀이는 전통에 대한 충분한 소화의 시간을 갖는 것을 긍정한다. 중요한 것은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경 험 양식을 창출하는 것이다(LW10: 163).
51) 여기서 듀이의 형이상학적 범주, ‘사건’과 ‘관계’는 보이스버트가 그의 『듀이의 형이상학』
에서 제시한 것을 필자가 다시 취한 것이다(Raymond D. Boisvert, Dewey’s Metaphysic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88, pp. 136-145). 알렉산더는 듀이 형이상학의 단위로 ‘상황적 트랜스액션’을 들고 있는데(Thomas. M. Alexander, John Dewey's theory of art, experience, and nature : the horizons of feeling, Albany :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7) 이는 듀이 형이상학의 ‘관계’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듀이의 형이 상학을 평가하기 위해 경험 형이상학 혹은 존재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시 도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실체 대신에 ’사건‘을 제시하며, 유기체와의 환경 과의 상호작용을 경험으로 정의하는 듀이의 형이상학을 염두에 두면, 그의 형이상학은 인 식론적 경험의 형이상학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존재 형이상학과도 단절하고 있는 데, 이런 관점에 선 보이스버트의 평가는 타당하다. 존재와 경험의 관점에서 듀이 형이상학 에 대한 기존의 평가에 대한 간략한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John R. Shook, op. cit., pp. 7-11.).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듀이는 하나의 치료제로서 낱말의 쓰임에서의 전회를 제언한다. 즉, 이들 낱말을 명사로서 사용하지 말고, 형용사와 부사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즉 의식, 정신, 물질이라는 낱말을 ‘의식적, 의식적으로, 정신적, 정신적으로, 물질 적, 물질적으로’, 식으로 사용한다면 많은 문제들이 단순해질 것이라는 것이다(LW1: 66).
형이상학적 대상을 형용사와 부사로 바꿔 사용하라는 듀이의 제안은 탁견이다. 실제 우리 는 자연을, 그리고 자연의 대상들조차 명사화하여 사용하고 있다. 자연주의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자연을 인간에게서 독립된 환경 조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명사의 오용이다. 자연 은 ‘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인 복합적인 전체”(LW1: 156)로서 동사적 성 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자연은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작용의 결과로서의 전체 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실체화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대상을 명사화하는 것은 일 상언어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령, ‘비가 내린다’와 같은 경우, 이 문장에서 ‘비’
가 주어 자리에서 명사로서 기술되어 있지만, 참된 사태로서의 ‘비’는 ‘명사화된 비’가 아 니라, 내리고 있는 사태로서의 ‘동사적 비’여야 한다. 이는 우리 언어가 사태를 명사화해 버리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버릇의 영향인데, 존재하는 사태를 참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듀이의 제언처럼, 명사를 ‘형용사, 부사’로 읽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 듀이는 다른 곳 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명사로서 제시되는 ‘마음(mind)’이 세계와 사물과 분리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동사적이라고 한다. 즉, 마음은 ‘움직이고, 성정하는, 결 코 완결되지 않은 과정’으로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LW10: 224). 이를 염두에 두면 형이 상학의 대상을 명사로 사용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을 명사로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상 언어의 쓰임을 방해한다면, 적어도 듀이의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동사나 형용사 혹은 부사로 바꿔 읽을 수 있는 관점은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
또한 자아와 경험도 사건의 관점에서 기술될 수 있다.
‘나는 경험한다’ 또는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그것’이 경험한다 또는 경험된다, ‘그것’이 생각한다 또는 생각된다가 보다 더 올바른 표현이다. 경험,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속성과 관계를 가진 연속적인 일련의 사태 과정이 일어나고, 발생하며, 이는 존재하는 사태 그대로이다. 그것들 바 깥도 아니고, 그 기저도 아닌, 그 발생 한 가운데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자아라고 명 명되는 사건들이 존재한다(LW1: 179).
듀이에게 경험은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이지, 경험 주체를 상정한 경험 대상을 의 미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듀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경험한다’의 주어 자리에 ‘나’를 올려 둘 수 없다고 한다. 경험은 상호작용이며, 고유성과 관계를 가진 일련의 사태가 발생하는 동사이다. 자아 역시 시간의 변화 속에서 그 동일성을 담보하는 형이상학적 주체가 아니 다. 자아는 경험 발생 가운데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다시 말해 ‘나는 생각한다’ ‘나는 맏는다’는 것은 책임을 지고 확신하는 사건들이지, 자아가 사고와 감정의 근원이라는 것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아는 에너지의 중심 조직으로서, 결과를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신념이나 감정이다(LW1: 180).
듀이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면 범주인 제일 실체, 곧 술어가 되지 않고 주어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거부된다. 오히려 실체는 해체되고, 그것은 ‘사건’이 되 며, 관계를 기다린다. 왜냐하면 사건은 유기체와 환경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생한 것, 즉 과정의 결과52)이기 때문이다. 듀이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계의 방식을 취한다.
우선 모든 경험의 원천인 환경과 유기체의 상호작용이 시사하는 데서 관계는 존재의 일반적 특징을 담는 범주이다. 듀이의 경험의 원리 중 하나는 앞서 상호작용임을 밝혔다.
그런데 듀이는 훗날, ‘상호작용(interaction)’ 외에 ‘트랜스액션(trans-action)’53)으로서 자신 의 철학적 술어를 확보한다. 김무길은 테이어와 테이어(H. S. Thayer & V. T. Thayer) 를 따라 듀이의 트랜스액션은 초기 저작에서부터, 중기의 『민주주의와 교육』에 이미 그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하는데54), 그러한 평가는 정당하다. 그러나 트랜스액션이 듀이 저술 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는 『경험과 자연』을 들어야 할 것이다. 거기서 ‘트랜스액션’은 모 두 7회에 걸쳐 등장하며 대체로 일상언어 ‘거래’, ‘교환’의 의미로 사용되지만55), 일부는 거의 ‘형이상학적 술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가령, “현대과학에서 배움은 아무도 알
52) Raymond D. Boisvert(1988), op. cit., p. 139.
53) 트랜스액션의 우리말 번역어로 김무길은 ‘교호작용’을, 박철홍은 ‘교변작용’을 제시했다. 그 들은 모두 ‘trans’의 의미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원문의 ‘transaction’은 일상언 어와 형이상학적 술어로서 동시에 같은 낱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말로 교호작용 이나 교변작용으로 옮길 경우 원어의 동일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이 논 문에서는 원어를 음역할 것이다. 원어를 그대로 옮기면 ‘트랜잭션’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듀 이는 트랜스와 액션 사이에 하이픈을 넣어(trans-action), 그 변용의 의미를 부여한 바 있 기 때문에, 여기서 필자는 ‘트랜스액션’으로 음사한다.
54) 김무길, 『존 듀이의 교호작용과 교육론』, 서울: 원미사, 2005, 19쪽.
55) LW1: 137; LW1: 154; LW1: 155; LW156: 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