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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성에서 합당성으로의 전환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95-101)

전통적인 진리 개념 중 하나는 토대주의에 있다. 듀이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확실성 에 대한 탐구로 나타난다. 토대주의적 진리관은 진술과 신념이 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것이 지시하는 사태, 다시 말해 대상과 사건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진리대응론으로서, 우리의 일상언어는 대체로 대응론에 기초하고 있 다. ‘여기 있지 않은가?’ ‘내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해 보면 알 것 아닌가?’라는 문제 제기는 ‘대상’을 전제로 한다. ‘비가 온다’고 말할 때, 그 진위 여부는 실제 비가 내리고 있 는지 그 ‘사태’를 확인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대응론이 언제나 타당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을 확인할 수 없는 진술의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역사학이나 수학이 그러하다. 가령, 과 거에 대한 역사적 기술은 경험적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밖의 문헌과 비교하여 그 정합적 관계를 확인하고, 수학자들 역시 공리를 받아들인 뒤, 이로부터 타당

137) Ibid. p. 78.

하게 추론될 경우 옳은 것으로 정당화한다. 이렇게 진리를 사실과의 대응이 아니라, 기존 의 다른 진술들과의 정합성 여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이론을 정합론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 정합론 또한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가령, 역사학에서의 진술은 정합성을 충족하더 라도 여전히 사실과의 대응을 필요로 하고, 수학 역시 정합성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주장 은 특정 공리 체계 내에서 효용적 가치를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138)

비판적, 논리적 사고를 강조하는 어린이철학은 페다고지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철학’

이라는 점에서139) 진리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린이철학이 추구하 는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확실성에 대한 탐구로서의 대응설도, 내용들 사이의 정합성 검토에 충실한 정합론도 아니다. 립먼은 자신의 진리 논의를 합리성에서 합당성으로 전이 시키며 제시한다.

오늘날 ‘합리성(rationality)’이라는 낱말을 대할 때, 우리는 많은 경우 도구적 합리성을 떠올린다. 도구적 합리성은 목적을 상정한 뒤 목적 그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목 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알맞은 수단을 찾는 이성을 의미한다. 도구적 합리성은 암중모색 할 수밖에 없는 문제의 삶에서 수단을 찾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도구적 합리 성은 목적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수단에 대한 모색에 머물기 때문에 그것은 때 때로 도덕성을 침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구적 합리성을 추구할 경우, 필요에 따라 자 신의 이익을 위하여 도덕적인 행동을 쉽게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140) 립먼은 이러한 도구적 합리성을 수단-목적으로서의 합리성이라고 규정한다.

립먼은 다른 한편으로 위계 조직에서의 권위 분배와 관련된 합리성을 제시한다. 이는 위계적 조직을 갖추고, 그로부터 발현되는 권위와 관련한 합리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 제 현실 사회의 대부분의 조직들, 가령 군대를 위시한 교회, 정부는 도구적 합리성이나 권위 분배의 합리성 중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두 가지 합리성을 혼재된 형태로 받아들인 다. 이를테면 군대는 위계적인 조직이면서도 승전을 준비한다.

138) 넬 나딩스, op. cit., 148-151쪽.

139)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의 알렉스 안도노프 교수가 어린이철학의 특징에 대해 물었을 때, 립먼은 “어린이철학은, 철학을 뒤집어 놓은 것(inside-out philosophy)이다”고 했다. 즉, 립 먼은 어린이철학을 전통철학의 인사이드아웃으로 규정한 것이다. Matthew Lipman(2008a), op. cit., p. 106. 그러나 어린이철학은 하나의 철학으로서만 존재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은 결 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페다고지(Ibid., p. 116), 즉 철학적-교육적 퓨전을 촉진 하는 페다고지로서 자리매김 될 수 있다(Ibid., p. 118.).

140) Niko Kolodny and John Brunero, “Instrumental Rationalit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http://plato.stanford.edu/entries/patriotism, 검색. 2019. 3. 3.

한편 학교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합리성의 일변도에서 벗어난다. 다시 말해, 학교는 행 정기관으로서 권위의 합리적 분배와 관련된 관료 체제이지만 언제나 관료주의적 합리성 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는 한편으로 이른바 ‘교육받은 인간’을 기를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141) “행위, 즉 자신이 헌신하는 활동, 판단 및 감정에서 나타나는 것 같은 삶의 형식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된 사람”142)이라는 피터스의 ‘교육받은 사람(educated person)’의 정의와 같이, 립먼 역시 학교는 여러 가지 사정에 밝은 지적인 사람일 뿐만 아 니라 합당한 사람을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143)

그러면 립먼이 강조하는 합당성(reasonableness)이란 무엇인가? 그는 합리성과 대조시 키며 합당성을 설명한다.

과학은 가능한 한 합리성의 모델이 되고자 한다. 그것은 일어날 것을 예측하거나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을 형성하고자 한다. 과학은 과학에 대한 도덕 적 역할을 인식할 수도 있고, 세상을 보다 더 낫게 바꾸기 위해 요청된, 그러한 개입 이 없었으면 될 수 없었을 변화를 시도하고자 하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측면들, 특 히 인간의 행위를 다루는 것들은 과학의 특징인 정확성(precision)으로는 다뤄질 수 없거나 표현될 수 없다. 세계의 많은 측면에는 근사치(approximations)가 필요하며,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사물의 형상이 정확하게 대응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적절함 (the appropriate)의 감각을 발달시켜야 한다. 우리는 모든 세부사항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공정한 해답을 얻는 데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엄밀히 말해서 ‘합리적’인 결 과가 아닐지라도, 그것이 분별 있거나 합당한 결과라면 이에 만족해야 한다. 특히 윤 리적인 논쟁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경우의 논쟁들은 대부분 정 확하게 해결될 수 없고, 또한 각 집단들이 체면을 세우고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균형을 찾고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육을 합리성을 위한 거대한 실험실로 간주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이 합당한 시민, 합당한 동료, 합당한 부모로 성장할 수 있는 맥락으로 보는 것이 더 실재적이다.144)

립먼은 과학이 다루는 정확성을 특징으로 하는 합리성 대신에 근사치, 적절함의 감각 을 특징으로 하는 합당성을 강조한다. 그 때문에 립먼에게 교육은 합리성의 실험실이 아 니라, 합당성을 갖춘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맥락’으로 재개념화 되었다. 립먼에서 진리란

141) Matthew Lipman, Thinking in Education (2nd ed.), New York, 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 11. 필자는 다음의 우리말 번역서를 참고하되, 인용 시에는 원서 를 직접 참고할 것이다. 박진환·김혜숙 역, 『고차적 사고력 교육』, 경기: 인간사랑, 2005.

142) R. S. Peters (ed.), The concept of education.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7, p. 9.

143) Matthew Lipman(2003), op. cit., p. 11.

144) Ibid.,. p. 11.

사실 그 자체를 전제로 한 대응설도, 내용들 간의 일치에서 참을 찾는 정합설도 아닌, 이 와 같이 맥락에서의 합당성에 있다. 합당성은 언제나 근사치 주변의 것으로, 학생들에게 키워야 할 것은 적절함에 대한 감각이다. 립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빌려 와서 확 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현되어야 할 개연적 이고 근사치적인 지식을 보다 더 나은 것으로 정당화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염두에 두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때로는 정의(justice)보다 근원적 공정성(equity)으로 번역되는 ‘에피에이케이아(epieikeia)’가 더 낫다고 한다. 왜 그 러한가?

여기서 문제는 근원적으로 공정한 것이 정의로운 것이긴 하지만, 법에 따른다는 의 미에서의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법적 정의를 바로잡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정의로운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법이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것들과 관련해서는 보편적 규정을 올바르게 말할 수 없다는 데 그 까닭이 있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규정 을 세워 놓기는 해야 하는데, 올바로 할 수 없는 경우 법은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은 채, 대부분의 경우에 맞는 것을 취한다. 그렇다고 법이 덜 올바른 것은 아니다. 잘못은 법 안에 있는 것도, 입법자 안에 있는 것도 아니라 사태(pragma)의 본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의 재료(hylē)가 바로 이 러하니까(NE: 1137b).145)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은 보편적이지만, 그 법을 보편적으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 사 태 그 자체의 본성을 짚고 있다. 행위 주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따라야 할 법도 알 고, 행위자 본인의 덕도 흠결이 없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 법을 보편적으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그 규정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가 미정의 사태로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문 제는 법을 규정할 사태가 확연하지 않은 구체적 상황이기 때문에 근원적 공정성 (epieikeia)이 더욱 더 요청된다. 근원적 공정성은 보편적 정의를 바로잡아 준다는 점에서

“정의로운 것이면서 어떤 종류의 정의로움보다 더 나은 것이다.”146) 립먼에 따르면, 아리 스토텔레스의 근원적 공정성은 판단, 즉 ‘적절함의 감각’에 다름 아니다.147) 결국 보편적

145) Aristoteles,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서울: 도서출판 길, 2018, 197쪽.

146) Aristoeles, op. cit., p. 197.

147) Matthew Lipman(2003), op. cit., p. 208. 매킨타이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피에이케이아 (epieikeia)를 공정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합당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고, 그것은 법 의 적용 범위를 넘어선다고 하였다(MacIntyre, Alasdair C., Whose justice? Which rationality?, London: Duckworth, 1988, p. 120)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피에이케이아 (epieikeia)와 프로네시스(phronēsis)는 어떤 관계의 것인가? 주지하듯 phronēsis는 실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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