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미국 정교관계의 역사적 형성
3. 중립성에 대한 재옹호
1) 위 비판들에 대하여
생각건대, 비판론자들의 관점은 ‘정당성원칙’과 공유된 근거로서의 중립성은 둘 다 폐기되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다만 수정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정 치적 자유주의라는 기획과 국가의 중립성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105) Kis(註 81), p. 325.
106) Larry Alexander, “Liberalism, religion and the unity of epistemology,” San Diego L. Rev. 30 (1993) pp. 776 참고.
자유주의적 가치다원주의가 사회 내의 가치들을 동등하게 지지하지는 않는다. 하지 만 자유주의 사회가 자율성과 관용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만큼, 비자유주의적인 가 치들의 사회적 실현 가능성에 대한 제약과 이들에 대한 조정 및 동화의 요청은 사회 의 안정적인 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최소화될 것이다. 이러한 성 격을 바탕으로 자유주의적 접근은 가치다원주의를 지지하는 다양한 입장들 중 특색 있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이는 철학적 자유주의(혹은 자유민주주의라고 일컫는) 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 헌정체제와 호환되는 것이다. 즉, 중립성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철학적으로 그리고 대한민국과 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 헌정체제 내에서 옹호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립성은 실천적으로 옹호 될 수 있다.
사실 여러 학자가 주장하기를107) 중립원칙은 다른 시스템의 신념과 체계 및 개념에 대해서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비자유주의자들보다는 자유 주의자들에게 잘 어울린다고 했으며 ‘비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자신의 전망에 처음에 자 유주의의 큰 복용량을 주입하지 않고 중립성의 원칙을 받아들일 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108) 그러나 이것은 중립원칙이 운용될 수 없다거나 그래서 중립 원칙이 원론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특히 본 논문의 제2장 과 제3장에서 보듯이 특히 미국과 독일의 판례법과 법해석학은 오랫동안 큰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 이러한 일을 하는 데 관여해왔으며 그 결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립이 요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발전적이고 대안적인 이해를 계속 추구해 왔다. 다만, 이것은 실제의 세계에 있어서는 중립원칙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자 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논쟁과 담론을 통해 계속 그 중립원칙을 발전시켜 나가야하 며 그들의 입장에 부합하는 사례들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중립국가의 개념 자체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별론으로, 중립국가의 개념 자체가 허상이거나 “신화(myth)”라고 거부하는 흐름도 있다.109) 이 점은 위에서 논하지 않았는데, 아래에서 한번에 그 비판의 요지와 사견을
107) Brian Barry. “How not to defend liberal institutions,” British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Vo l.20, No.01 (1990) pp. 50, 54, 55. 이러한 논거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그의 저서로는 다 음을 참조. Brian Barry. Culture and equality: An egalitarian critique of multiculturalism (Harv ard University Press, 2002).
108) Barry(註 107), p. 55.
함께 논하고 곧 이어 본 절의 소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중립국가의 개념 자체가 허상이거나 “신화(myth)”라고 거부하는 견해들의 대표들을 꼽자면 공동체주의자들은 물론 포함되거니와, 특히 다문화연구자들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자들의 논지에 대해서는 위에서 다루었으므로 이하에서는 주로 다문화연구자들의 비판에 집중해 고찰해보도록 한다. 다문화연구자들은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에 영향을 받은 서술을 보이고 있는데, 그들에게 공평함과 보편성은 배타 주의 권력의 허상일 뿐이다. 예를 들면, 영(Young)은 보편적인 시민은 백인 남성이며 부르주아라고 서술한다.110) 킴리카(Kymlicka)는 자유주의 국가가 스스로를 종교로부터 분리할 수 있을 것(이런 분리는 사실 자유주의의 근간이기도 하다)이라는 것임을 시 인하면서도, 종교와 문화의 유사성은 잘못 알려져 있고, 국가와 민족성을 나누는 것은 똑같은 가능성을 가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중립성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든, 자유국 가는 항상 특정 언어를 선호하고, 공휴일 제정이나 공공 교육이나 설화나 축제는 항 상 다수 그룹의 사회 문화를 따르고, 이는 소수의 희생이 따른다. 따라서, “친절한 무 시”로 대변되는 중립성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본다. 진정 평등과 정의를 위한 다면 국가는 소수 그룹을 주도적으로 인지하고 찬성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111). 그밖에도 중립성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그 취지를 같이 하는 여러 학자들이 있다.112) 그리고 롤스적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그리너월트도 이에 만약 중립성 개념들이 실질적 으로 유용해야 한다면, 그것들은 (단순히 진공을 배경으로 한 개념이 아니라) 어떤 일 련의 “배경 신념들(background beliefs)”로 채워지기도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인정 하는 입장이다.113)
그러나 그리너월트(Greenawalt)가 대표적으로 주장한 바와 같이 중립성은 헌법적 그 리고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114). 비록 그 자체가 직접적
109) Iris Marion Young, “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Princeton N. J. : Princeton Unive rsity Press, 1990) p. 114.
110) Young(註 107), p. 110.
111) Will Kymlicka, “Multicultural citizenship,” (Oxford : Clarendon, 1995) p. 111.
112) 예를 들어 자유주의 프레임에 의존하지 않은 서술을 주로 해 왔던 Tariq Modood는, Charl
es Taylor에 의거해, 소수자들은 개인에게 개인으로서 주어지는 균등한 존엄성뿐 아니라 특
정 그룹의 소속원으로서 받을 수 있는 균등한 존중을 원한다고 논했다. 즉 집단으로서의 균등한 존중에 대해 강조하였다. T. Modood, “A defence of multiculturalism,” Soundings Vol.
29 No.1 (2005) p. 64.
113) Kent Greenawalt, “Religion, Law, and Politics : Arenas of Neutrality,” in Wall, Steven, and George Klosko, (eds.) Perfectionism and Neutrality: Essays in Liberal Theory (Lanham : Rowm an & Littlefield, 2003) p. 258.
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헌법과 정치철학 문제들의 해결에 있어서 적 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115)
중립성은 다문화론 방식의 개별 집단세력에 대한 중시보다는 더 많은 의미를 가지 고 있다. 사실 중립성의 고유한 보편주의는 그런 집단세력 논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방법을 취하면서도, 결국 소수자들의 평등권을 위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는 중립성 의 양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들이 원하는 삶의 양식을 추구하기 위 한 소수자의 편입을 위한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배제를 위한 장치가 될 수 도 있는데, 이는 경계를 어떻게 정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전체를 포함하는 경계가 설 립된다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집합 A가 소집합 a를 포함하는 경우를 상정해보자. 전 체(A) 중 일부(not a)를 제외하게 된다면 나머지의 집합(a)에서의 중립성을 지키며 결 속을 다지게 되더라도 전체(A)의 중립성은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뒤에서 살펴 볼 독일은 a만의 중립성을 추구한 결과가 된다.
요컨대 위에서 다문화연구자 등이 지적한 점들은 중립원칙이 운용될 수 없다거나 중립원칙이 원론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한다는 것으로는 되지 못하는 것은 앞서의 완전 주의자 등의 비판점들에 대한 대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미국, 독일 등 서구 각 국가 의 판례법과 법해석학은 오랫동안 큰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 이러한 일을 하는 데 관 여하여(특히 본 논문의 제2장과 제3장 참조) 그 결과로 중립성에 대한 발전적이고 대 안적인 이해를 계속 추구해 왔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다만, 이것 또한 중립원칙을 주 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실제의 세계에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논쟁과 담론을 통 해 계속 그 중립원칙을 발전시켜 나가야하며 그들의 입장에 부합하는 사례들을 주장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이러한 국가의 중립성에 대한 헌법적 근거가 있을까? 살펴보 면, 우리 헌법은 정당의 해산조건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해할 경우를 언급하고 있 으며, 기본권, 법 앞에의 평등, 행복권, 보장권, 사생활 보호권, 적법절차의 원리, 사상 과 언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적 가치를 기본적으로 옹호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114) Ibid., p. 258.
115) Ibid., p. 258.
그런데 무엇보다도 위 중립성의 직접적인 헌법적 근거는 헌법 제11조의 평등조항 이 라고 할 수 있으며,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으로 보자면 헌법 제11조의 평등조항 및 제
20조제1항의 종교의 자유 조항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제20조
제2항의 국교금지 및 정교분리의 조항이 함께 근거로 존재한다고 하겠다.
(2) 네 가지 영역
국가의 중립성 원칙은 그 주장자들이 실제의 세계에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논쟁과 담론을 통해 계속 그 원칙을 발전시켜 나가야하며 그들의 입장에 부합하는 사 례들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 대해 나는 이는 아래 의 네 가지 영역을 구분하여 고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다. 이 네 영역의 구분 은 Rawls의 정치적 자유주의 등 저작 및 전술한 그리너월트의 구분 등 그 후속학자들 의 연구로부터 종합하여 본 것이다.
1) 네 가지 영역의 분류와 고찰
철학적 고찰을 시도하는 학자들의 논의의 요점은, 개인은 누구나 좋음 혹은 좋은 삶(good, good life)에 대한 전망을 스스로 가질 수 있는데, 다만 이에 따라서 공적으로 강제적 법(coercive law)을 만들고 실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본다. 즉 좋음 혹은 좋 은 삶에 따른 행위자의 행위 및 국가의 행위에 대해서, 단계를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a. “내심의 단계”
좋음 혹은 좋은 삶에 대한 관점을 행위자 자신이 그저 보유하는 단계이다. 이에는 문제될 소지가 없다. 개인은 누구나 좋음 혹은 좋은 삶(good, good life)에 대한 전망 을 스스로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행위자 자신이 그러한 전망을 그저 보유하는 단계는 공적 이성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이나 문제가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헌법적으로는 이는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로 보호되는 내심의 영역이고, 기본권 제한이 가해질 수 없는 절대적 기본권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b. “사회 영역의 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