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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미국의 국교부인과 중립성

1. 프랑스

32) 박단, 「프랑스의 문화전쟁 : 공화국과 이슬람」 (서울 : 책세상, 2005) 32면.

33) 2013년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최신 통계에 따름. Ministère de l'Intérieur (http://www.interi eur.gouv.fr/Archives) 참조.

34) 이에 대한 국내 문헌으로는 오영주, “불문화 : 프랑스 공화국, 왜 비종교성 Laïcité인가?,”

「佛語佛文學硏究」 제71호 (2007) ; 박단(註 32) ; 지규철(註 7) 등이 있고, 국외 문헌으로 는 대표적으로 J. Bauberot, Laïcité 1905-2005. (Paris : Seuil. 2004) ; J. Baubérot, Les mutatio ns actuelles de la laïcité en France après la Commission Stasi (2005) (http://jeanbauberotLaïcit é.blogspirit.com/archive/2005/04/19/Laïcité_2005.html 최종접속 : 2013.10.12.) ; Christian Joppke,

“State neutrality and Islamic headscarf laws in France and Germany,” Theory and Society, vol.

36, issue 4 (2007) pp. 313-342 ; John R. Bowen, Why the French don’t like headscarves: Isla m, the state, and public space (Princeton/Oxford :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등이 있 다. 아래에서는 주로 Gaudemet(註 30), pp. 221-254를 참조.

의 분리를 위한 법(Loi relative à la séparation des Églises et de l'État. 이하 1905년 법)”

이 강한 의미에서의 국가와 종교의 분리(소위 ‘엄격한 정교분리’ 내지 ‘적대적 정교분 리’)를 이룩하였고, 이러한 원칙은 “라이시떼(laïcité, 비종교성)”로 불리며 추후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제1조에 반영되었다. 이하에서는 이 1905년 법과 그 법의 원칙이 반 영된 헌법조항이 탄생하게 된 정치, 사회적 배경을 역사적 순서대로 고찰해보도록 한 다.

1. 대혁명과 정교관계

대혁명이 일어난 이후 1789년 8월 26일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은 제10 조에서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였고 1791년의 헌법(1장)은 종교 의식의 자유를 보장하 였다. 1789년 11월 2일의 칙령은 성직자 소유 재산의 국유화를 불러 일으켰고 국가는 이에 대한 보상 개념으로 목사들의 보수와 교회의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국가가

1790년 7월 12일에 일방적으로 제정한 “사제에 관한 민사기본법35)”은 종교 대표자들

과 가톨릭 믿음을 수행하기 위한 단체들을 공역무(service public)개념에 의거해 다루면 서 국가에 귀속시켜 규제하였고 교회재산의 국유화 등이 이루어졌다. 교황 비오 6세 는 1791년 3월 10일의 교서 ‘구옷 알리관툼(Quod Aliquantum)’에서 이를 규탄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혁명 후 국가는 1793년 5월부터 1794년 7월까지 체계적인 탈기독교 화 정책을 채택해 나갔다. 특히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는 부아시 당글라(Boissy d'Anglas)가 발의한 바를 통과시켜 1795년 2월 21일의 칙령(Décret du 21 février 1795) 을 선포했고 이는 국가와 종교가 분리된 시대의 시작을 열었다. 국가는 종교 의식의 자유는 허용하였으나 어떤 보조도 지원하지 않았고 어떤 구역도 제공하지 않았으며 어떤 목사도 공인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이 시기 교회의 종교활동은 혁명 이후 정부 의 강한 제재를 받고 있었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그 위상의 심각한 하락이 진행된 시 기였다.36)

2. 대혁명후기의 정교관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 Bonaparte, 나폴레옹 1세)는 1801년 7월 15일 교황 비오 7세

35) 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 12 juillet 1790.

36) Gaudemet(註 30), p. 228.

와 정교협약(Concordat)을 협상하고 맺으며 종교의 평화를 복구시켰다. 나폴레옹 1세 는 그 17개의 짧은 조항들 중에 몇 가지를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겨두었다.37) 그리고 이는 추후 77개 조항의 이른바 조직 규정들(Les Articles Organiques, the Organic

Article)들로 보충된다. 조직 규정들은 로마 교황청의 동의 없이 프랑스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밀어 붙여졌는데38), 그 규정들은 정교협약과 같은 시기에 공포되었고(“정 교협약에 의한 법 Loi du 18 germinal an X, 8 avril 1802”), 이후 19세기 전반에 걸쳐 들어선 정부들에 적용되었다. 이 조직 규정들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정립하여, 공권 력이 사제들과 종교생활의 추구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가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법에 나폴레옹 1세는 개신교 교회들에 관련된 44개의 조직 규정들을 붙였는데, 그 교회들 을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공권력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유대교는 1808년의 칙령 3개 이후 정비되었다.

목사들의 법적 위치, 봉급, 그리고 교회에 배정된 땅과 재산에 대한 규정들이 문구 화되어 추가되면서 이 법전은 완성되었다. 다만 몇몇 대중적 종교 단체들은 자신들에 게 주어진 힘과 조직이 1809년 12월 30일의 칙령에 의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습 재산을 지켜내는 데 성공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당시의 이른바 4대 공인 교회들은 특정한 혜택, 특히 재정적인 혜택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권력의 지속적인 감시 아래에 놓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입법적 결과물들은 이후 극도로 상이한 정치적 맥락 속에서 적용되었다. 가 톨릭교회나 심지어 다른 모든 종교들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서거나, 또는 정반대로 적대적인 정부들이 들어서는 일이 반복되며 그들이 길지 않은 간격으로 교체되며 이 어졌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정치와 관련된 근본적인 정책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 고 있었다. 대혁명으로 분출된 혹은 촉발된 정치적 갈등 하에서 이 1830년 7월 군주 제 이후 가톨릭교회와 정치계에서 형성된 의견들의 흐름은 크게 보아 두 경쟁적 그룹 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 그룹 중 하나는 구체제(Ancien Régime, 앙시엥 레 짐)의 부활을 바라는 전통적 질서의 열렬한 지지자들로서 성직자의 권력에 대한 무한

37) 예컨대 제1조는 “국가가 공공의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제정한 법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종교의 대중적 활동을 보장하였다. 종교의 범위는 국가 권력과 종교 권력 사이의 조율에 의해 재설정되었다. 주교들과 교구의 신부들의 봉급은 국가 자금에서 나왔다. 이러한 교회 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었고, 예배에 계속 필요하였기에 주교들을 위해 남겨졌다. 다만, 이 후 국사원(Conseil d'État)이 어느 것이 국가의 소유고 어느 것이 공동체의 소유인지 정하였 다.

38) Gaudemet(註 30), p. 230.

한 지지를 보내는 이들이었다. 다른 하나의 그룹은, 새로운 질서의 지지자들로 1789년 대혁명의 가치를 신봉하고 가톨릭교회와 그 사제들에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교회의 법적 위치에 대한 정치적 논쟁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39) 후자의 대표적 인 예는 공화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의 강화에는 개신교와 유대인 의 지원도 도움이 되었다.40)

결국, 공화주의자들이 1878-1880년의 기간을 거치며 다시 권력을 잡았을 때 반교권 주의(반성직자주의. anticléricalisme, anti-clericalism)는 이들의 정치적 목표의 중에서도 최우선의 과제가 된다. 그들에게 ‘공화국의 집권’과 ‘힘이 남아있는 교회’(특히 가톨릭 교회)는 공존할 수 없는 두 개념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공화국 정권은 1880 년에 일련의 반교회적 법들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이 법들은 현재까지도 효력을 발휘 하고 있다.41)

3. 드레퓌스 사건과 정교관계

보수적 반의회주의적 세력과 의회적 민주적 공화국의 신봉자들 사이의 투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전장은 바로 1894년부터 1905년까지 프랑스라는 나라 전체를 뒤흔들 었던 드레퓌스(Dreyfus) 사건42)이다. 이 사건은 결국 부당한 판결을 받았던 드레퓌스 가 완전히 복권되고 그럼으로써 공화주의자들의 승리로 종결이 되었다. 1902년에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정치적 좌파가 의원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앞에서 말한 새로운 질서의 지지자들의 그룹들 중에서도 특히 급진민주주의자들은 가톨릭교회를 공화국의 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부르주아적인 자유주의자들은 가톨릭의 반근대적인 태도를 비 판하였다. 이외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그 역사적·사상적 배경 속에 프랑스의 계몽주 의와 프랑스혁명 시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반교권주의(anticléricalisme)의 흐름도 존

39) Gaudemet(註 30), pp. 233-235.

40) Philippe Rigoulot, “Protestants and the French nation under the Third Republic: Between recog nition and assimilation,” National Identities Vol. 11 No. 1 (2009) p. 45 이하 참조.

41) Gaudemet(註 30), pp. 253-254.

42) 상세히는, 아르망 이스라엘, 이은진(역), 「(다시 읽는)드레퓌스 사건」 (서울 : 자인, 2002)

21면 이하 ; 임종권, “드레퓌스 사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회,” 「西洋史論」 Vol.102

(2009) 97-124면. 국외 자료로는,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Alfred D reyfus: Chronology, French Ministry of Culture and Communication”, (www.culture.fr 최종접속 : 2013.12.10.) ; “André Bach”. L’armée de Dreyfus: une histoire politique de l’Armée française de Charles X à “l’Affaire” (Paris : Tallandier, 2004) pp. 203-253. ; George R Whyte. The acc used: the Dreyfus trilogy (Bonn : Inter Nationes, 1996) pp. 15-76.

재하였다.

이런 배경 하에서, 일단 1901년의 결사에 관한 법(Association loi de 1901)의 새로운 규정들, 특히 제13조 이하43)는 종국적으로 교회의 사회와 특히 교육에 대한 영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고 동법 이후 다음과 같은 일련의 법률들을 통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었다.

① 1902년 7월 법을 통해 국가적으로 허가를 받지 않은 약 3000개의 모든 가톨릭

학교 폐쇄가 결정되었다. 이것은 매우 심한 대중적 반발을 불러일으킨 조치였는데, 74 명의 주교들이 항의서에 서명을 하여 명시적인 반대 및 항의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동 법을 통하여 정부를 통한 주교의 급여 또한 정지되었다.

② 1903년 3월 법을 통하여 모든 남성 수도단체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③ 1903년 7월 법에서는 모든 여성 수도단체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④ 1904년 7월의 법은 새로운 수도단체의 결성을 금지하였고 현재 또한 그러하다.

4. 1905년 정교분리법의 제정

1905년에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위한 법이 제정되었고, 이는 당시 수상인 Combe

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Loi Combe” 즉 Combe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위한 동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교분리원칙, 즉 교회와 종교의 완전 한 분리를 의미하는 ‘라이시떼’(laïcité)를 확립하였다.

동 법들로 인해 당시의 교황인 비오 10세(Pius X)는 그 교시인 사목서한 “프랑스 정교분리법에 관하여(Vehementer nos)”를 통해 공개적으로 강하게 종교적 비난을 하였 고 이후 수 년 동안 국가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04년 바티칸은 프랑 스와 국교를 단절하였다. 가톨릭에 충실한 시민들은 이들 법에 거센 저항을 하였다.

동법의 제정 이후 프랑스국가는 가톨릭 및 다른 종교단체에 일체의 재정지원을 하 지 않게 되었다. 한편 많은 종교단체의 재산과 건물, 특히 교회건물들은 이미 국가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재산과 건물들은 어떤 목적에 의해 관리하게 된다 하더라도 국가 스스로의 재산으로서 유지를 하는 것이지 종교단체에 대한 ‘재정지원’이라는 개 념과는 상관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국립 학교에서는 어떠한 종교수업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43) Article 13-17 (Le régime particulier des congrégations religieuses), Association loi de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