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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복지연금제도의 시행 유보

한국 사회정책 발달사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사회정책의 도입이 대부분 1960-70년대 권위주의시기에 관료주도로 이루어진 한편, 그것이 대부분 최소한의 재정지원 을 바탕으로 한 매우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일 것이다.

우선 그 동안의 연구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 사회정책의 기본 틀은 모두 1960년대 초반에 형성된다. 1960년부터 1963년 사이에 공무원연금법(1960), 군사원호보상법(1961), 군 10) 당시에는 농민들의 경우에는 추곡수매가 인상, 근로자들의 경우에는 소득세 감면이 가장 큰 관심 사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소득세 감면은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인연금법(1963), 산업재해보상보험법(1963), 생활보호법(1961), 윤락행위금지법(1961), 아동복 리법(1961), 재해구호법(1962),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1963), 의료보험법(1963) 등 무려 12개 에 이르는 사회보장 관련 법률이 제정된다(이혜경, 2006).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5·16쿠데타 이후 ‘최고회의’를 통해 결정된 것들로서 쿠데타 세력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취 한 조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1970년대는 현대 사회보장제도의 핵심적인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제도와 의 료보험제도가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의료보장과 소득보장은 복지국 가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조영재, 2008: 65), 소득보장을 대 표하는 것이 공적 연금제도라면, 의료보장을 대표하는 것이 공적 의료보험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제도들이 모두 유신체제 하에서, 그리고 별다른 사회적 투쟁 과 요구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관료들의 주도하에 도입된다(김영범, 2002; Kwon, 1999;

정무권, 1993; 정무권, 1996; 양재진, 2007; 양재진, 2008).

반면, 사회정책 도입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사회지출 수준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으 며, 국가의 재정부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조세감 면과 소득공제 제도 등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규모 자체가 크지 않았고, 대부분의 예산이 주 로 경제개발이나 국방비 등에 우선적으로 배정되는 상황에서 공적 사회지출에 사용할 수 있는 재정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연하청, 1987; 곽태원, 1991). 그러므로 사회정책이 정치 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폭넓게 도입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대부분은 정치적 제스처 이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권위주의 국가는 사회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재정지출보다는 정신개혁 을 사회정책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허은, 2010).

그런데 1970년대의 사회정책 도입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국민복지연금 제도의 경우 도입과 함께 그 시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점이다. 연기방식에 있어서도 1973년 국회에서 법이 통과된 후, 1974년 긴급조치 3호를 통해 행정명령 형태로 급작스럽게 취소된다. 그렇다면 왜 국민복지연금제도는 도입과 동시에 시행이 연기되었을까?

우선, 1973년에 도입된 국민복지연금제도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애초부터 내자동원이라는 목표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다(양재진, 2007). 70년대 중화학공업화 의 전망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73년의 ‘장기전망’ 문서는 국민복지연금제도의 도입 목적으로, 첫째, 노령, 장해 및 사망 등 장기적 위험으로 인한 생활의 불안과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복 지사회를 구현하고, 둘째, 이를 통해 국민연대의식과 참여의식을 제고하고 축적된 자금을 사회복지시설에 환원투자하거나 생산적 투자에 투입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즉, 국민복지

연금제도는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는 사회정책으로서의 성격과 투자재원의 조달이라는 경제 정책적 성격이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경제기획원, 1973: 87).

하지만 ‘장기전망’ 문서의 목적 자체가 어디까지나 내자동원 극대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적 조치들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정책적 목적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즉 내자동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회보장적 목적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정도에 국한된 것이 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정책관료들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으며(양재진, 2008), 사실 국민복지연금제도가 당시의 사회적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고 볼 근거도 별로 없다. 국 민복지연금제도의 도입과 관련하여 김종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제가 73년 당시 보건사회부에서 ... 복지연금을 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의 보건사회 부에서 실질적으로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관심이 컸으면 현시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사회보장제도 에서부터 개입을 해야지 먼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노령시대에 관한 내용을 추진하느냐, 이것은 순서 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인들 자체가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개념이 확실하게 잡혀있지 않은 사 람들이었습니다.”(기초자료 DB, 김종인 ‘국민복지연금제도 입법과 시행유보’ 녹취록)

그런데 국민복지연금제도는 이러한 내자동원의 목적으로 인해 그것이 사실상 강제저축 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국민복지연금제도는 사회적 차원에서는 대체 로 연금료 갹출로 인해 7% 정도 세금이 인상되는 정도로만 인식되었을 뿐, 연금제도의 도 입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전무했다(양재진, 2008: 116-9). 그러므 로 1974년 긴급조치 3호를 통해 대폭적인 소득세 감면조치가 취해지는 상황에서, 단순히 세 금인상으로 비춰지는 국민복지연금제도의 도입은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김도균, 2012:

181).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74년에 북한이 소득세를 폐지하고 이를 체제경쟁 차원에서 활용하는데, 증세 혹은 강제저축으로 인식되는 국민복지연금제도를 시행하기에는 정치적으 로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양재진, 2007).

그러므로 국민복지연금제도는 강제저축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시 행이 유보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국민복지연금제도가 다른 수단 들에 비해 내자조달 수단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고려도 제도 시행을 유보하는 중요한 근 거가 된다(김영범, 2002). 이 글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듯이 당시에는 내자동원이 가장 핵심적인 정책적 관심사였으며, 만약에 다른 뚜렷한 대안적인 자금조달 방법이 없었다면 국 민복지연금제도는 강제저축이라는 사회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 만 연금을 통한 재원조달 외에도 당시에는 민간저축의 장려와 정책금융을 통한 저축동원이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경제기획원에 있었던 이형구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연기금이 중화학공업의 재원마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기 업이나 여론의 반대에 상관없이 밀어 붙였을 것입니다. 기업이 공식·비공식적으로 청와대에 우려를 호소하는 상황에서, 굳이 시행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다른 대안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기초자료 DB, 이형구 ‘국민복지연금제도 초기형성 관련’ 녹취록(양재진, 2008: 118에서 재인용))

사실 1974년 국민복지연금제도의 시행 유보는 한국 사회정책 역사에서 중요한 에피소드 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들은 제도시행의 유보를 사회정책이라는 고립된 영 역에서만 파악해왔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반면, 자본동원의 관점에서 보면, 국민복지연 금제도의 무기한 시행유보는 ‘긴급조치3호’를 매개로 해서 대폭적인 소득세 감면조치 및 가 계저축 증대조치들과 동시에 취해졌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이것은 한국에 서 사회정책이 국가의 자본동원전략, 즉 저축동원 및 조세정책과 같은 내자동원전략과 얼마 나 긴밀하게 엮여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민복지연 금제도의 시행유보는 한국에서는 강제저축조차도 정치적 부담 때문에 쉽게 실행할 수 없었 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김도균, 2012: 181-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