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저축은 가처분소득에서 소비지출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으로 정의 된다. 따라서 가계의 조세부담이 증가할 경우 가처분소득이 줄어 자연스럽게 가계저축에 부 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70년대에 소득세 감면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 도 민간저축 중심의 내자동원 극대화 전략 하에서 소득세 감면이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증 가시켜 결국 민간저축률을 증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70년대 저축기반 생활 보장체계는 낮은 소득세 부담이 뒷받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76년 부가가치세 도입은 이러한 저축기반 생활보장체계의 형성에 매우 부정적 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부가가치세의 역진성으로 인해 부가가치세 도입은 저소득층의 생활 보장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림 3-6> 총조세부담의 소득계층별 귀착
출처: 한승수(1982: 87) <표> ‘조세부담분포’ 참조.
그러면 우선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해 소득계층별 세부담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도 록 하자. 앞에서 우리는 소득공제제도의 지속적인 확대로 인해 소득세부담 수준이 지속적으 로 낮아져 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소득계층별 총조세부담은 소득세 부담만으로 파악 할 수 없으며, 소득세 이외에 간접세 부담 등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특히 70년대에 세수 확보의 수단으로서 77년에 부가가치세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한 소 득계층별 조세귀착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림 3-6>은 소득10분위별 조세부담률의 변화를 70년, 76년, 78년, 80년 네 시기를 기 준으로 살펴본 것이다(한승수, 1982: 87). 그런데 위의 그림을 보면, 저소득층의 경우 조세부 담 수준이 70년대 내내 급격하게 증가하여 온 반면, 중고소득층의 경우는 지속적으로 하락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소득1분위 계층의 경우 총조세부담이 13%에서 28%로 70 년대 동안 2배 이상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비록 증가폭이 둔화되긴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소득5분위계층에까지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소득6분위 계층 이상은 70년대 동안 조세부담수준이 하락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세부담의 누진도가 지속적 으로 낮아져 78년과 80년에는 조세부담의 역진성이 뚜렷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78년과 80 년의 경우 소득6분위에서 소득9분위 계층은 전체 소득계층에서 가장 낮은 조세부담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소득10분위 최고소득 계층의 경우에도 조세부담은 지속적으로 하락해왔으며 78년과 80년의 경우는 조세부담이 소득1분위계층에 비해서도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가가치세의 도입으로 조세부담의 소득계층별 분배와 조세체계의 누진성이 70년대 후 반으로 갈수록 점점 악화되었던 것과 반대로, 사회정책의 계층별 혜택 수준은 반대의 경향 을 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970년대의 사회정책이나 저축우대조치들은 대체로 중간 층 및 고소득층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의료, 교육, 주거 등의 혜택은 주로 이러한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는 중간층 이상에게 돌아가고, 저축장려를 위한 다양한 저축유인제도 도 한계저축성향이 높은 고소득층에게 혜택이 집중된다.
이러한 제도상의 역진성은 결국 1970년대 후반 분배갈등의 폭발로 이어진다. 중화학공업 화의 추진과 함께 분배문제나 복지사회 구현이 강조되었고, 이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이 도 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배갈등이나 양극화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 으며, 그로 인해 노동이나 빈곤 문제, 그리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사회운동도 점점 더 격 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조세저항을 피한 세수확보 수단으로 도입되었던 부가가치세가 역설적으로 조세저항과 사회갈등을 더욱 격화시키게 된다. 김종인은 부가가치세 도입의 정 치사회적 결과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 부가가치세가 76년 말 국회를 통과해 77년 7월1일부터 10%의 단일세율로 시행이 되고 나서 서민들의 조세부담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공화당이 78년 선거에서 민주당한테 의석으로는 이겼지만 득표율면에서 1.2% 졌는데, 부가가치세 도입이 큰 역할을 했어요. 오죽하면 이만섭씨가 10대 국회에 나와서 부가가치세를 폐지하자는 얘기까지 나왔겠어요.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78년 선거 끝나자마 자 경제팀을 싹 갈아버리고 신현확 부총리 체제로 갔습니다. 그리고 부가세 개편 작업을 했죠. 그러 다가 80년 신군부가 들어섰고, 이들이 79년 부마사태를 조사하니까 부가가치세가 근본 원인이었어요.
학생들의 데모에 상인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사태가 커진 거였죠. 그랬더니 부가세를 폐지하자는 얘기 가 나오고..”(김종인, 프레시안 2009 “정권은 유한하나 관료는 영원하다”)..
위에서 김종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77년 부가가치세의 도입은 78년 국회의원 선거에 서 공화당의 패배와 79년 부마항쟁을 촉발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이만섭, 2009: 207-210). 78년 선거는 유신체제 등장 이후 처음 치러지는 직접선거로서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투표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공화당은 의석수에서는 신민당에 앞섰지만, 득표율에서는 신민당에게 진다. 게다가 서울의 경우는 공화당 의원들이 모두 차 점자로 당선되는 결과가 벌어진다(서중석, 2008: 189-190). 이는 당시 공화당 및 유신 집권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민심이반은 총선 이후 더욱 격화되어, 결국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으 로 폭발하게 된다. 부마민주항쟁은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과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직접 적인 계기가 된 것이었지만, 시위에 참여한 계층이 매우 광범위했고, 이들의 요구가 주로 빈부격차를 심화시킨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크게 반발하는 내용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이것은 부마민주항쟁이 경제적 요인이 매우 중요한 계기였음을 보여준다.
60년대부터 부마항쟁 이전까지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 중에 발생했던 대 부분의 민주화 운동들은 주로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고,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경 우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민들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호응하지 않았다. 하 지만 부마민주항쟁의 경우는 영세상인,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 노동자, 식당·접객업소·상점 의 종업원, 반룸펜층, 부랑자, 실업자 등 사회적으로 몹시 소외당했던 층이 많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회사원등 중간층 시민들도 참여한다(서중석, 2010: 325-340). 또한 부마민주항 쟁 당시에 시위대가 세무서를 습격했는데, 시위대가 세무서에 불을 놓은 것은 단순히 정부 시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 77년 시행된 부가가치세에 대한 저항, 즉 조세저항의 표출이었 다(조세일보 2006년 7월 3일 “부가세가 10·26 사건 낳았다(?)”).
이렇게 70년대 말 부산 마산 지역에서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한 폭발적인 투쟁이 발생하
게 된 데에는 표면적으로는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유신체제에 대한 불만이었지만, 그 이 면에는 경기침체 및 물가고와 조세저항 등 경제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서 중석, 2010: 315). 특히 부산지역은 경공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영세기업 인과 상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조세의 형평성에 어긋나는 역진적인 부가가 치세의 도입은 그야말로 목줄을 죄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이 영세기업인과 상인 등 자영업자와 결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전체 중간층의 심각한 이반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권적 차원에서 매우 심각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임현진, 2004: 300-308; 손호철, 2006). 당시 김재규는 1980년 1월 28일 ‘항소이유보충서’를 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부에 제출 하면서 부마민주항쟁의 성격과 폭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부산에는 본인 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읍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순수한 일반시민에 의 한 민중봉기로서...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그것은 체 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김재 규 항소이유보충서(1월28일), 김대곤(1985)에 수록).
이와 같이 70년대 말 부가가치세의 도입은 제도의 도입 이후에 매우 격렬한 사회적 저 항과 마찰을 초래한다. 당시 일본이나 대만 등 아시아 국가 중에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국가 는 한국이 유일했다. 하지만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하고 세제혜택 등이 주로 중간층 이상에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부가가치세 도입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78년 총선과 부마항쟁 외에도, 77년 제도 시행 직후 서울의 남대문, 동대문 평화시장 상인들이 문을 닫는 철시사 태가 벌어지는 등 납세자들의 저항이 거세게 일었다. 또한 당시에 세운상가에서 백주대낮에 세무서 직원이 피습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김영호, 2002b).
유신 권위주의 체제는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하기 위해 국민들의 탈정치화를 추구하고, 국가권력의 폭력적 행사를 통해 사회운동의 발언권를 극도로 억압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권과 관련된 사회적 투쟁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국가의 정책 이 오히려 사회적 양극화와 조세부담의 불공평성을 강화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국가와 사 회의 갈등은 더욱 격화된다. 일반적으로 부가가치세는 직접세에 비해 조세저항이 상대적으 로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의 경우처럼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는 부가가 치세와 같은 간접세의 도입조차도 매우 심각한 조세저항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유신정권은 생존권 투쟁이 민주화운동과 결부되는 것을 극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