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에는 부가가치세를 도입하게 됨에 따라 조세개혁에 대한 논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70년대 한국에서는 공적인 소득보장제도가 거의 전무한 상 황에서 소득세 정책이 불가피하게 사회정책적 역할을 떠맡게 된다. 하지만 근로소득세 면세 점의 급격한 인상으로 소득세의 세수확보 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세수증대라는 조세행정상 의 부담이 부가가치세의 시행으로 집중된다.
부가가치세는 조세저항이 상대적으로 적으면서 세수확보의 기능이 뛰어나 이상적인 세 제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정책당국은 1970년대 초반부터 EC형 부가가치세를 모델로 간접세 체계의 개혁을 준비한다(재무부, 1990; 유시권, 1995). 하지만 부가가치세는 세부담의 역진성 이라는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소득과 소비패턴이 평준화되어 있지 않거나 사회보장제도 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부가가치세를 도 입한 국가들이 대체로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진 유럽국가들인 반면, 미국이나 일본 등 공적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국가들의 경우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국가들이 별 로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그것도 소득불평등과 사회적 양 극화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세수증대를 목표로 부가가치세 도입을 고려함에 따라 당연히 사회적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1976년 세법개정 과정에서 집중
적으로 부각되고, 이와 관련 근로소득세 경감조치가 매우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게 된다.
정부는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한편 소득세 부담 완화 차원에서 소득공제 수준을 7만원 에서 8만원으로 인상하는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이외에도 보험료공제와 근로자의 복지후생 적 급여에 대한 비과세 조치를 신설한다. 하지만 이러한 소득세 감면조치들은 야당인 신민 당뿐만 아니라 여당으로부터도 매우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신민당은 76년 정부의 세법 개정안에 대한 수정안을 제출하면서 이러한 점을 지적한다.
“부가가치세를 실시하려면 직접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강화를 해서 ... 사회보장제도를 어느 정 도 확충을 시켜가지고 보다 비교적 소득이 고르고 공평한 과세가 되는 바탕위에서 부가가치세를 실 시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준비 없이 불과 인적공제를 7만원에서 8만원으로 올린다든지 ... 이렇게 형식적으로 조치를 하고 이것이 부가가치세를 도입하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이렇게 얘기하 는데 대해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 정부는 입만 벌리면 국민개세를 부르짖고 있지만 사실 갑근세형식이 아니지만 모든 국민들이 상당한 세부담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 리고 갑근세를 안내니까 국민개세를 해야 한다 이렇게만 주장한다는 것은 논리상 모순이 있는 것입 니다”.(1976년 제96회 재무위원회 회의록 14호, 신민당 진의종 발언, pp.10-11).
“문제는 이 세제가 소득의 재분배기능 특히 이 소득세에 있어서는 생활보장적인 기능이 이 세제 안에 담겨져야 된다 ... 저소득층의 소득부담이 경감이 되어가지고 생활보장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데 까지 적어도 소득에 있어서는 대폭 경감이 되어야 된다 ... 부가가치세를 실시하려면 더욱이나 소득세 법을 대폭적으로 고쳐야 됩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전부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만 은 유독 부가가치세를 실시하면서도 소득세법을 저소득층에 경감한다는 측면에서 고려하는 것이 아 주 미흡하다”(1976년 제96회 재무위원회 회의록 17호, 신민당 이중재 발언, pp.3-6)
이러한 야당의 비판에 대해 정부 측은 소득공제 규모의 대폭증가가 갖는 정책적 모순과 한계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오히려 공적 사회정책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재무부장관이 었던 김용환은 신민당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5인 가족 기준으로 해서 8만5천원, 월 소득을 받는 사람이 얼마의 세금을 내느냐 하면 440원을 냅니다 ... 9만원은 880원... 그러나 (소득공제규모를 증가시킬 경우) 400원 800원이 무세가 되지만 실 제 50만원 80만원 100만원 그 단계에 가서는 삼사만원 정도가 공제가 됩니다 ... 4차 계획으로서 저희 가 사회개발을 하나의 개발이념으로 지금 내세워가지고 여러 가지 사회복지지출을 정부지출 면에서 증대시키는 노력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 금년까지는 거의 없던 제도인 이른바 의료시혜예산만 하더 라도 명년도에 127억6,100만원을 지금 투입했습니다.... 정부의 입장은 과세인원의 폭을 늘 줄이는 것
만이 능사가 아니고 오히려 이러한 사회복지 측면에서의 정부지출정책을 가지고서 광범하게 보완을 하는 것이 ... 지금 월 소득이 너무 적어서 세금조차도 그야말로 안내는 것이 아니라 내려고 하더라도 돈이 없어서 못 내는 그런 계층이 있습니다. 이런 계층에 대해서는 교육비 의료비 넣어 보았댔자 혜 택이 없습니다.“(1976년 제96회 재무위원회 회의록 17호, 김용환 발언, 28-30)
공화당의 경우는 조세정책의 소득재분배 기능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 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번 세제개혁안을 ... 개발지향형세제로 성격을 규정지을 것이냐 ... 복지지향적세제로 성격지음 으로서 이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려는 것이냐? 또 아니면 개발과 복지후생의 양자를 조화시키려는 세 제라 할 것 같으면 ... 주개발 종복지형 세제냐 선복지 후개발 세제냐 하는데 대한 분명한 성격구별이 있어야만... 본위원의 견해로는 ... 주개발 종복지의 주종관계만은 분명히 한 세제로서 이것을 심의통 과 시켜야 되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물가상승율은 전적으로 세제면에서 만이 완전 흡수소화 시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 나라의 경제정책 물가정책 임금 노동정책 세제 등 서로 함수관계에 있는 이와 같은 정책을 복합적으로 조화시켜서 그 답을 구해야지 세법에서만이 이 답을 구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입니다.”(1976년 제96회 재무위원회 회의록 16호, 공화당 이병옥 발언, pp.7-8)
사실 정부 입장에서는 ‘4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앞두고 재정수요 확보가 중요했기 때문 에 소득공제 확대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재무부장관이었던 김용환은 소득공제액 을 11만원으로 인상할 경우 전체 근로소득자 중 3.9%만이 근로소득세를 내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반면, 신민당은 그 동안 기초생계비가 급격하게 증가해 왔기 때문에 지출이 수입 을 초과하는 적자 가계에 세금부담은 있을 수 없다는 점과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최소한 의 조치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인적공제액을 11만원으로 인상하고 교육비 공제 를 신설하여 총 12만원의 공제를 주장한다. 그리고 결국 실제 개정안은 정부안과 신민당안 사이의 타협으로 소득공제액을 월7만원에서 월9만원으로 인상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논란은 국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특히 1977년 시행을 앞두고 다양한 비판에 직면한다. 상공회의소·전경련·무역협회·중소기업협회 등 경제4단체장은 세부 담의 역진성을 강조하고, 물가인상 등 경제교란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부가가치세 시행을 강력히 반대한다. 여당인 공화당은 1978년 선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도 시행 을 연기할 것을 주장한다(강만수, 2005: 48-51). 신민당의 경우도 제도준비의 미흡을 빌미로 시행연기를 주장한다. 또한 정부 내에서 조차 관료들 간에 물가인상 우려를 근거로 제도시
행을 연기하자는 입장도 강력히 존재했다. 세계은행과 개발연구원도 시행을 앞두고는 제도 시행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출한다(김정렴, 2006: 359-371; 김용환, 2006: 139-141).
하지만 제도 강행을 주장하는 측은 현행 세제로는 세입증대에 한계가 왔다고 주장하면 서, 혼란을 무릅쓰고서라도 증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임을 들어 제도강행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또한 한국의 부가가치세 도입은 집권세력이 자의적으로 결정한 사안이 아니라 다 이그난, 테이트, 샤우프 등 IMF, IBRD, UN 등 국제기구의 조세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은 것 으로서 개발도상국의 세제 근대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개혁과제라는 점도 제도 강행의 근거로 작용한다(강만수, 2005: 21-32; 재무부, 1990: 95-102).
결과적으로 부가가치세는 광범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6년 법이 통과된 후, 77년 여 름에 곧 시행된다. 이는 정책결정적과정이 매우 폐쇄적인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최고의사결 정권자인 대통령이 제도시행을 선택했기 때문이다(김용환: 2006: 139-141).
<그림 3-1> 내국세 중 직접세와 간접세의 비중 변화, 1961-1982
자료: 한국개발연구원(1983: 84).
<그림 3-1>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전체 내국세 세수에서 직접세와 간접세 가 차지하는 비중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면 1960년대 초반에는 간접세 비중이 60% 이상을 차지한 반면, 국세청 신설 이후 1960년대 후반에는 직접세 비중이 50% 이상으 로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는 다시 간접세 비중이 점점 증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