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저축동원에 있어서 ‘계’와 같은 사금융 시장의 규제 또한 중요한 과제가 된다. 한 국의 경우에는 민간저축율이 낮은 것도 문제였지만, 이러한 민간저축이 반드시 제도금융권 의 금융저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데에도 문제가 있었다. 만성적인 악성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제도권의 저축상품은 실질금리가 보장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으며, 제도금융권을 통해 융자 등 소비자금융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일반 국민들은 ‘계’와 같은 전통적인 금융적 거래를 이용해 목돈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계가 급격히 증가한 건 한국전쟁 이후이다. 1953년 기준 계의 계약금 규모는 대략 100억환 정도로 추산되었는데, 당시 금융기관 예금액 총잔고가 166억환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계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60년대 초반의 조사에서도 전국 가 구의 48.2%가 계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계는 당시에 매우 일반화된 금융적 수단이었다.12) 뀌고, 저축운동에서 여성은 가사를 책임지는 가정주부로서 어머니로서뿐만 아니라 합리적 소비자 이자 저축담당자, 가정경제의 궁극적인 재무관리자로 규정된다. 또한 가정주부의 성공적인 가사관 리가 국가를 부강하게 한다고 선전함으로써, 국가는 여성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전략을 취한다 (Garon, 2010; 김도균, 2012: 183).
11) 일본의 저축장려운동은 19세기 후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다(Calder, 1990). 19세기 후반 소액저축장려를 위해 우편저축제도가 도입되는데, 이는 영국의 제도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Garon, 2002: 99-100).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소위 ‘1940년 체제’로 불리는 전시동원체제가 구축되면서 우편저축제도는 핵심적인 자본동원수단으로서 강화된다(Fujihira, 2000: 76-125; 野口悠紀雄, 1995: 53-62; 김도균, 2012: 170).
12) 당시에 사금융수단으로서 ‘계’는 마담뱅크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일반적이었다(김현주, 2008;
김도균, 2012: 183).
계가입 목적 비율 계돈의 사용도 비율 계찬성 이유 비율 친목 6.7 먹고사는데 써버렸다 13.9
저축이 되니까 17.5
상호부조 6.4 질병 치료에 1.1
집의 용돈 마련 10.7 관혼상제비 9.4 목돈을 쓸 수 있으
니까 64.1
결혼 및 학비 조달 19.8 자녀교육비 18.4
생업자금을 구할 수
있으니까 7.6
양복·시계·반지·광목
등의 구입 5.4 가재구입비 10.3
가옥을 사거나 수리
비용의 조달 7.7 주택구입비 5.6
은행을 이용할 수
없으니까 4.3
저축하기 위해서 12.0 기업자금 12.1 돈을 놀리기 위해서 3.1 부채청산 11.6
친목을 더할 수 있
으니까 6.5
영업자금의 조달 16.5 딴사람에게 꾸어줌 5.1 부채의 청산 11.0 그대로 가지고 있다 5.1
무응답 -
무응답 0.7 무응답 7.4
그러므로 적어도 한국전쟁 이후 계조직은 전자본주의적 유물이거나 공동체 조직으로 평가 하기는 힘들고, 화폐사회의 신용이 붕괴한 상황에서 은행을 대신한 자발적이고 자조적인 금 융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주기적으로 목돈이 필요한 자녀교육비나 결혼비용, 또는 영 업자금 조달을 위해 계조직이 활성화되었다는 점에서 계는 단순히 사치적이고 낭비적인 모 임이기보다는 서민들의 목돈마련을 위한 자기방위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창렬, 1970; 김 삼수, 1974).
<표 2-6> 계의 목적, 사용도, 찬성이유
출처: 이창렬(1970: 152, 155, 159)에서 재인용.
위의 표는 1960년대 초반 계가입의 목적, 계돈의 사용도, 계를 찬성하는 이유가 무엇인 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여준다. 이 표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당시에 계는 공동체적 조직이기보다는 경제적 목적 추구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친목이나 상호부조와 같은 이유
보다는 결혼 및 학비조달, 용돈 마련, 영업자금 조달 등 경제적 이유가 계가입의 주된 목적 이었다. 계돈의 사용도에 있어서도 자녀교육비와 일상적인 생활자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 하고 있다. 또한 계라는 조직의 특성상 계는 저축뿐만 아니라 융자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계를 찬성하는 주된 이유가 목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60년대 이후 국가 주도의 저축동원이 본격화하면서 정책당국은 계와 같은 사금융 수단을 제도금융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펼친다. 경제개발 초기에 계는 저축 켐페인 차원에서 국가경제에 해가 되는 대상으로 지탄을 받기도 하고(김도균, 2012: 183), 은행 차원에서 목돈마련과 같은 계제도의 장점을 제도적으로 흡수하여 계를 제도금융권으 로 흡수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이창렬, 1970). 또한 투자신탁이나 보험, 증권, 단자 회사, 종금사 등 제2금융권을 육성하고, 이러한 제2금융권에 대해서는 금융수익을 보장함으 로써 계와 같은 사금융시장을 대체하고자 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국가가 저축동원을 위해 민간의 자생적인 금융조직을 제도금융으로 대체하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4절 소결
이 장에서는 한국이 산업화초기 자본부족 문제에 직면하여 가계저축을 통한 자본동원전 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저축동원을 위해 국가가 가정경제의 미시적 차원까지 깊숙이 개입해 들어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국의 높은 저축률은 유교적 전통과 같은 문화적 요 인으로 설명되는 것이 일반적이다(White and Goodman, 1998; Jones, 1993).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설명방식은 산업화초기 한국의 가계저축률이 매우 낮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신광 영, 1999). 오히려 국가는 산업자금 조달을 위해 저축증진과 근검·절약하는 생활방식을 강조 하는 등 다양한 켐페인을 펼쳤다. 이 장에서는 한국의 높은 가계저축률이 산업화초기 국가 의 정책적 노력의 결과이며, 그것이 국가가 가계저축을 통한 자본동원전략을 구사했기 때문 이라는 점을 밝혔다.
첫째, 한국은 산업화초기 민간저축자금을 재정자금화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제도적 사 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산업화 이전에 이미 강력한 국가관료 조직이 형성되었고, 시민사회가 허약했으며, 토착부르주아 세력의 사회적 기반 역시 매우 미약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 직후의 대규모 원조자금은 국가가 자원배분에 대한 우선권
을 확보하고 민간엘리트에 의존할 필요 없이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었 다. 여기에 더해 5·16쿠데타 이후에는 부정축재자 처벌의 일환으로 시중은행을 사실상 국유 화시킴으로써 민간자금을 통제할 수 있는 완벽한 제도적 조건이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외자 동원과 조세동원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한계에 부딪히는 상황에서 민간저축의 동원은 매우 중요한 자본동원수단으로 부상하게 된다.
둘째, 저축동원의 성패는 실제로 저축률이 얼마나 증가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런데 민간 저축은 조세와 달리 강제성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가정경제에 대한 미시적 개입이 요구 된다. 따라서 국가는 가계저축의 장려를 위해 다양한 켐페인과 저축계몽교육, 저축장려운동 등을 전개한다. 국가는 저축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계획경제를 실현하는 주부되기’라는 구호를 내걸고 합리적 소비생활과 검약, 저축을 강조하는 등 가정경제의 책임을 맡는 존재 로서 가정주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가정주부를 합리적 소비자이자 재무관리자(financial manager)로 형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반대로 국가의 무상구호나 복지는 낭비적이고 비도 덕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저축에 기반한 자조적인 생활체계를 구축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의 복지국가 연구들은 대체로 한국에서는 사회정책이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렀기 때 문에 국가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처럼 간주한다. 또한 일반 가계의 입 장에서는 공적 복지의 부재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자조적인 생활보장체계를 구축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매우 당연시한다. 하지만 이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에서 저축 에 기반한 자조적인 생활보장체계의 형성은 절대로 자연스러운 현상도 아니고 비정치적인 과정도 아니었다. 국가는 저축장려를 위해 오히려 가정경제에 깊숙이 개입하여 가계행태나 행동 하나 하나를 규율하는 등 자본주의적인 생활규범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자조적인 생활태도 혹은 문화라는 것이 전통의 산물이 아니라 산업화시기 지배엘리트의 통 치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Kwon, 2011; Garon, 1998).
산업화 초기 한국의 저축동원전략과 자조적인 생활보장체계의 형성은 비교적인 관점에 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재정사회학은 국가의 과세행위가 복지국가 등장의 중요한 요인이며, 조세수입의 형태가 국가와 사회의 관계의 성격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지표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가계저축의 동원을 중요한 자본동원전략으로 활용해 왔으 며, 그 결과 국가복지보다는 개개인의 자립과 자조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리고 이러한 초기의 경로형성은 이후 재분배의 정치에 중요한 제도적 문화적 유산을 남기 게 된다. 산업화초기의 저축운동은 사회구성원의 의식과 생활규범, 가계의 행동패턴에 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