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허구적 대상에 대한 혼합이론 /102
2. 혼합이론의 도출 /113
2.1. 마이농주의의 한계와 추상적 실재론 /113
지금까지 마이농주의를 기반으로 허구적 대상의 실재론의 기본적인 아이디 어를 살펴보았으나, 주지하듯 마이농주의가 그리 만족스러운 허구적 대상의 이론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가진 이론으로 여겨 져 왔고 특히나 이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 즉 존재론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들 을 허용하게 된다는 비판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이에 대한 검토는 생략 할 것이다. 우리는 존재부정문장의 문제에 대한 솔먼의 해결책이 가지는 마이 농주의적 함축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이러한 비난에 대한 대응을 생각해 본 바 있다. 또한 본고는 대표적인 마이농주의자로 분류되는 파슨스 이론의 기술적 약점들, 가령 그가 마이농을 좇아 ‘존재하는 황금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원자적nuclear/원자외적extranuclear 속성의 구분이 일으키는 문제들 이나, 허구대상의 불완전성 및 허구 안에 나타나는 실제 대상에 대한 견해가 보여주는 비직관적인 면에 대한 상론도 피하려 한다.160) 이러한 비판은 본질 적인 부분보다는 기술적인(technical) 세부에 치중한 것으로 허구적 대상의 정 체성을 이루는 조건들을 탐구하려는 현재의 맥락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마이농적 대상은 어떤 대상인가? 그것은 그 대상을 기술하는 데 사용된 속 성들을 부여받은 대상이다. 가령 둥근 사각형은 둥글고 사각형이다.161) 그런데
160) 이에 대해서는 볼토리니(2010),ch.1 및 박영섭(1997) 참조. 이 가운데 원자적/원자외적 속 성의 구분의 문제는 본장 3.1.2절에서 다루어 보겠다.
161) 여기에 쓰인 ‘이다’란 표현의 애매성을 지적하는 것이 둥근 사각형 같은 반직관적 대상을
마이농적 대상은 어떻게 자신을 특성화하는 속성들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러 한 속성들을 기술하는 언어 덕분인가? 그렇다고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언어에 귀속시키는(ascriptive) 힘뿐 아니라 발생적(generative) 힘도 부여하게 되는 데, 이는 원래의 기술과 약간이라도 다른 기술은 원래의 대상과는 다른 대상 을 생겨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렇다 면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해 표현된 생각이 그러한 힘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제 마이농적 대상은 지향적 대상이 된다. 모든 생각은 그것이 향해있는 대상을 가진다는 브렌타노의 지향성 정의는 생각이 발생적 힘을 가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허구적 존재자는 특별한 종류의 사고 행위, 즉 상상이란 행위에 의해 발생한 지향적 대상의 한 부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마이농이 정말로 이런 식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의심이 가능하다. 사실 어떤 생각 덕분에 대상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는 무 관하게 독립적으로 구성된 대상을 생각이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렇게 되면 마이농적 대상은 그 존재를 위해 생각이 아니라 속 성 그 자체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정의 자유 원리] 어떤 속성들 집단에건 그에 상응하는, 즉 그 속성들을 가지는 대상이 있다.
이 원리를 통해 생각이나 언어의 힘이라는 마술적인 요소가 제거되지만, 이 는 지향적 대상 일반에 대한 설명일 뿐 허구적 대상의 특수성을 밝히지는 못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제 허구적 대상을 시공간을 차지하지는 않지 만 실제로 존재하는, 일종의 추상적 대상으로 파악하는 추상적 실재론을 마이 농주의의 새로운 버젼으로 도입하자. 이 입장은 ‘존재하지는 않지만 있는’ 대
설정하는 악명높은 마이농의 주장에 대한 비난에 맞설 대안적 해석을 마련해준다고 잘타는 주장한다. 마이농이 둥근 사각형이 둥글면서 사각형이라고 한 것은 맞지만, 그가 이렇게 말함 으로써 어떤 존재하는 대상이 이러한 성질들을 예화(exemplify)한다고, 따라서 명백한 기하 학적 공리-어떤 대상이 둥글면서 동시에 사각형일 수는 없다는-를 침해하는 주장을 하고 있 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마이농이 기술적 용어인 ‘예화’가 아니라 일상어 ‘이다’를 사용한 것은 이 표현에 대한 다른 분석의 여지를 준다. 예화 논리학의 전통적 자원에서 철학자들은 서술의 ‘이다’를 단지 ‘예화하다’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따라서 둥근 사각형이 둥긂을 예화한 다고, 혹은 페가수스가 날개달림을 예화한다고 해석했지만, 이러한 해석이 마이농의 견해를 불가해하게 만든다. 이 표현을 ‘인코드하다인코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어 보라. “둥근사각형 이 둥글다”가 “둥긂과 사각형임을 인코드하는 대상이 둥긂을 인코드한다”로 해석되면 마이농 이 참을 말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잘타(1988)). 이 새로운 술어의 도입에 대한 설명과 exemplify와 인코드 술어의 대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상론하겠다.
상으로 막연하게 지향적 대상을 설명했던 기존의 마이농주의에서는 제대로 설 정될 수 없었던 허구적 대상의 지위에 대해 보다 일상적인 수준의 답을 마련 해준다. 국가나 음악작품, 수 혹은 SM5라는 모델이 추상적 대상으로서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이라면, 허구적 대상 역시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것 이다. 이런 대상들은 마이농주의에서처럼 약한 의미에서 존재(있음, 존속으로 번역되는 subsist)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상을 속성들의 집합에 짝지워진 (그 속성들을 가지는) 대상 혹 은 그 집합 자체로 보건, 아니면 예화된 구체적 대상들에 공통적인 유적 대상 혹은 일종의 플라톤적 타입으로 보건,162) 더 이상의 규정이 없다면 이 관점 역시 허구적 대상의 특수성을 밝히지 못하고 만다. 왜냐하면 일군의 속성들의 무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허구적 대상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멀로흐’라는 이름은 그동안 신화적 괴물의 고유명 으로 생각되었으나 현대 문헌학에선 그것이 왕이나 인간 제물에 대한 보통명 사로 쓰였음이 밝혀졌다. 이 경우 확실히 일군의 속성들 F,G,H,...이 있지만 거 기에 해당하는 허구적 대상은 없다고 할 수 있다.163) 또한 하나의 속성집합 혹은 속성 타입이 다른 허구 및 다른 캐릭터에 의해 형성될 수도 있다. 보르 헤스의 피에르-메나르 사례를 상기하라. 보르헤스는 우연히 <돈키호테>와 완 전히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쓰게 된 사람을 상상한다. 이때 이 이야기 안의 문장들이 가지는 함축들도 동일한 것으로 조절함으로써 하나의 캐릭터에 부여 된 모든 속성들이 동일한 것으로 가정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속성집합이나 일종의 타입만으로 허구적 대상을 동일시한다면 메나르와 세르반테스가 서로 를 전혀 모른 채 연관 없이 작업하였다는 가정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구분되 는 허구대상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 다. 우리는 메나르의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똑같은 내용 을 가지긴 했지만 서로 별개의 문학작품이며 거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같 은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수긍한다.164)
162) 전자를 주장한 이론가로 라파포르(W.J.Rapaport)와 파슨스를, 후자를 주장한 이론가로 잘 타와 산탐브로기오(M.Santambrogio)를 꼽을 수 있다. 볼토리니(2010), p16, n.36,37 163) 볼토리니(2010), p.32 이 예는 속성집합의 존재만으로는 그것이 고유명이 아닌 보통명사에
해당하는 대상의 존재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속성집합은 그 뜻으로 기능한다.
164) 속성집합 만으로 허구대상을 개별화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파슨스가 제시한 흥미로운 반례가 있다(원자적/원자외적 속성 구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본고 I장의 1절 각주 34참고).
이야기: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나를 납치하려는 괴한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말했 다, ‘조금 후에 경찰이 골목을 돌아나와 당신을 잡을 거요!’라고. 잠시 후 경찰이 골목을 돌아 나와 그를 잡았다. 끝”
방금의 멀로흐 사례에서 해당하는 허구적 대상이 없었던 이유로 우리는 성 경이, 특정 속성들이 한 개별자에 의해 소유되는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단순한 속성집합이나 타입 너머의 요소, 즉 이야기하기라는 요소가 도입된 것이다. 상이한 캐릭터가 똑같은 하나의 집 합 혹은 타입에 상응할 수 있을 가능성도 이런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설명된 다. 단순한 마이농주의적 추상적 존재자 이론 너머로 작가의 상상, 문학 작품 등의 요소들을 개입시키는 허구적 대상의 실재론이 바로 토마슨의 추상적 인 공품 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