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허구적 대상에 대한 혼합이론 /102
2. 혼합이론의 도출 /113
2.2. 추상적 인공품-토마슨 /116
방금의 멀로흐 사례에서 해당하는 허구적 대상이 없었던 이유로 우리는 성 경이, 특정 속성들이 한 개별자에 의해 소유되는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단순한 속성집합이나 타입 너머의 요소, 즉 이야기하기라는 요소가 도입된 것이다. 상이한 캐릭터가 똑같은 하나의 집 합 혹은 타입에 상응할 수 있을 가능성도 이런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설명된 다. 단순한 마이농주의적 추상적 존재자 이론 너머로 작가의 상상, 문학 작품 등의 요소들을 개입시키는 허구적 대상의 실재론이 바로 토마슨의 추상적 인 공품 이론이다.
우리는 이상적, 관념적 대상들,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영원불변의 플 라톤적 대상으로서의 추상적 대상만이 아니라 국가나 법률, 문학작품, 갤럭시S 따위 구체적 대상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을 지니면서도 일정한 시공간적 위치를 점유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인 대상들의 개념을 분명 가지고 있다. 이런 대상들은 시간적 기원 같은 시간적 속성을 가지기도 한다. 존재론 적 의존 관계는 후설이 'bound idealities' 개념-플라톤적 성격의 ‘free idealities’와 대조되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제시한 것으로 토마슨에 따르면 다 음이 그 기본적 형식이다.165) 만일 a가 존재한다면 b도 존재한다는 것이 필연 적일 때 a는 b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166) 제도, 국가, 대학 등 제도적 존재 자들이 전형적으로 이런 의존관계를 보이는 추상적 대상의 유형이고 생물학적 종도 여기 속한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란 종 자체가 아니라 그 사례란 점에서 종은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존재자이다. 그러나 그 예가 있는 동안에만 그런 종은 존재한다. 이러한 의존은 형이상학적일 뿐 아니라 시간적이기도 하다. 즉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가 능세계에만 존재하고 또한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시점 이후 혹은 존재하는 시점에만 존재한다. 토마슨은 개별화가 불가능한 막연한 추상적 대상 대신 분명하게 정체 확인이 가능한 구체물 및 일상적으로 이해되 는 정신 상태/사건 따위를 다양한 존재론적 범주들에 연결시킴으로써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대상들이 실재한다는 믿음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다.
이제 허구적 대상은 인간의 정신적 행위에 형이상학적, 시간적으로 의존하 는 존재자로 이해된다. 생물학적 종이나 수 따위와 달리 그것은 인간의 정신 적 행위에 의존해 만들어지는 추상적 인공품인 것이다. 이 논제에 따를 때 앞 의 멀로흐 사례에서 허구적 대상이 없었던 것은 성경 안에 멀로흐 이야기가 없다는 것, 즉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쓴 특정한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또한 세르반테스와 피에르-메나르는 각기 두 개의 구분되는
165) 토마슨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개념의 현대적인 기원을 후설의 저 작 Logical Investication(Logische Untersuchungen(1900-1901))이라고 밝히고 있다. 토마 슨(1999),p.25.
166) 이러한 기본적 형식이 인과성에 대한 반사실문 분석이 그러하듯 존재론적 의존의 형이상학 적 관계를 포착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물론 있다(이 형식에서 b가 만일 필연적 존재자이면 의 존 관계가 사소하게 성립한다). 토마슨이 구분한 의존관계의 다양한 양상을 보면 이러한 의존 관계의 특성이 보다 명확해진다. 고정적 의존과 유적(generic) 의존의 구분에서 전자는 특정 존재자에 의존하는 것이고 후자는 특정 타입type에 의존하는 것이다. 항상적 의존과 역사적 의존의 구분에서 후자는 의존적 존재자가 생겨나기 위해선 다른 존재자가 이미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항상적 의존은 본문에서 설명되고 있다.
정신적 사고행위를 하는 것이므로 특정 정신적 행위에 의존하는 캐릭터가 둘 로 구분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토마슨은 허구적 대상이 인간의 특정한 정신적 행위 뿐 아니라 문학작품에 도 의존한다고 본다. 그리고 문학작품에 대한 의존은 허구적 대상이 어떻게 계속해서 존재하게 되는지 설명해준다. 즉 일단 작품이 완성되고 나면, 작품을 있게 한 정신활동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더라도 작품이 존재하므로 거기에 의 존하는 허구적 대상도 계속해서 존재하게 된다. 허구적 대상의 작품에의 의존 은 한 대상이 의존하고 있는 대상이 문제의 대상이 존재하는 동안엔 항상, 모 든 순간에 있어야 하는 항상적 의존을 보인다. 이때 작품 자체는 또한 복사본 (copy)의 존재에 항상적으로 의존하는데, 복사본이란 의미론적으로 해석된 존 재자로 주어진 언어적 공동체에 의해 특정 방식으로 이해되는 물리적 아이템 을 말한다. 결국 허구적 대상은 소멸가능한 존재자로, 한 작품의 물리적 복사 본이 모두 파괴되고 기억조차 망각되면 작품이 소멸되고 허구적 대상 역시 따 라서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의존논제] 허구대상은 인간의 정신행위에 고정적, 역사적으로 의존하고 문 학작품에 유적, 항상적으로 의존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직관을 명쾌하게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토마슨 의 이론167)은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불분명한 부분들을 남기고 있다. 여기
167) 토마슨의 ‘의존 관계’를 받아들이는 본고의 존재론적 입장에 대해, 익명의 심사자가 추상 적 대상을 우연적인 구체물에 연결시키는 토마슨의 의존 개념이 갖는 철학적 부담에 대해 이 야기하였다. 이 비판자는 시공간내의 구체적 개별자와 비시공간적 추상적 존재자를 구분하는 전통적 서양 2범주 존재론을 무시하거나 모호하게 하는 제 3범주의 도입이 이론적으로 ‘너무 비싼’ 댓가를 치르는 것이라 지적하였다. 본고는 의존 개념에 입각한 다양한 존재론적 범주들 이 기존의 이분법적인 구도보다 더 정확하게 우리의 존재론적 직관을 반영한다는 토마슨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려 한다. 구체물에의 의존에 근거한 범주들을 보여주 는 다음의 그림은 A칸(특정 시공간을 점유하는 구체물)과 F칸(구체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이상적 존재자) 사이에 다양한 존재론적 양상들이 있다는 것, 따라서 전통적 의미에서의 구체 물과 추상물, 혹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해당하는 이 두 영역이, 존재하는 대상들을 모두 망라하는 소진적(exhastive) 범주들이 아니라 존재론적 스펙트럼 상의 양극단일 뿐임을 보여준다.
그림에서 GD RD HD CD는 각각 일반적, 고정적, 역사적, 항상적 의존을 나타내는 약어이다. 가 령 GCD는 일반적, 항상적 의존을 표시한다.
서도 앞서의 이론들에서 반복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부분, 즉 순수지향적 대상 과 허구적 캐릭터 간의 관계 설정이 명확히 처리되지 않고 있다. 그는 허구적 캐릭터가 문학작품에 항상적 의존 관계에 있음으로 해서 그 대상에 대해 생각 을 품는 행위를 넘어 지속되는 반면 순수지향적 대상은 정신활동이 사라지는 순간 사라진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사적이고 덧없는 존재로서의 순수지향적 대상이 문학작품에 의해 존재가 견지되는 존재자로 바뀌는지가 설 명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특정 정신적 행위가 어떻게 순수한 지향적 대상을 일으키는지가 애초에 불분명하다고 본다면 하나의 생각이 어떻게 허구대상을
<구체물에의 의존에 근거한 범주들>
A칸과 F칸 이외의 각 칸이 나타내는 존재론적 범주들은 다음과 같다.
B칸: 예술작품 C칸: 발명품 E칸: 아리스토텔레스/암스트롱 모델에서 의 보편자
그런데 같은 그림을 정신적 상태들에 의존하는 범주들로 보게 되면,
A칸: 정신적 상태 및 그 내용 B칸: 예술작품 C칸: 법률, 화폐 등 문화적 대상들 왼쪽 두 열: 인공품 일반
F칸: 물리적 존재자 및 수학적 존재자
들을 각각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술작품은 창조자의 특정한 정신 활동에 역사적으로 의존하 고 동시에 작품의 의미를 이해해서 미적 속성들을 구성해내는 감상자의 정신에 유적, 항상적 으로 의존한다(RHD와 GCD가 만나는 B칸을 차지하고 있다). 토마슨(1999), ch.8
일으키는지는 더욱더 불명확하다고 하겠다. 이로써 토마슨이 말하는 특정 정 신행위가 과연 허구적 대상의 발생에 관여하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순수지 향적 대상이 아닌 허구적 캐릭터의 경우엔 분명히 그런 행위보다는 어떤 과정 들-순간적 사건보다는 일정시간 지속되는-에의 의존을 말하는 게 맞는 것 같 다. 따라서 볼토리니의 관점을 따라 사적인 생각이 아니라 여러 주관들이 관 여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하기 과정을 거쳐 허구대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 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더욱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토마슨의 이론이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허구적 대상의 존재에 대한 필요충분 조건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탐정 임, 베이커가에 살고 있음, ...’ 따위 허구 안에서 부여된 속성들이 허구적 대상 의 필연적 속성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허구작품은 원래의 것과 다르게 쓰여진 가능세계에서도 여전히 그 작품 및 대상의 동일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168) 예를 들어 데스데모나의 ‘<오델로>에 따르면 손수건을 가지고 있었음’이란 속 성은 손수건이 아닌 다른 소지물이 언급된 <오델로>의 경우에는 같은 인물에 게 귀속될 수 없다. 이런 가능세계에서 데스데모나 캐릭터는 ‘<오델로>에 따 르면 손수건을 가지고 있었음’이란 속성을 더이상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토마슨은 [의존논제]를 제시한다. 속성들의 집합 대신 의존개념에 호소하여 특정 정신적 행위와 문학 작품이 함께 존재의 필요충분 조건을 이룬 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하나의 허구 캐릭터가 특정 정신행위에 고정적으로 의존하느냐가 의문시된다. 즉 특정 정신행위의 존재가 그 허구대상의 존재를 위한 필요조건인가? 토마슨 자신이 허구 안에서 부여된 모든 속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169) 그에 따르면 ‘탐정임’을 결여한 홈즈가 있는 가 능세계에서도 우리는 같은 홈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홈즈를 탐정으로 생각하지 않는 가능세계에서 이 대상에 대해 떠올리는 행위는 원래 의 홈즈에 대한 생각과는 다른 내용을 가지는 다른 생각 행위가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정신 행위가 달라졌는데도 같은 허구대상을 가지게 되었다. 토마슨 은 사실 생각이라는 특정 창작 행위가 어떻게 개별화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진 않는다. 어쨌든 세르반테스와 피에르-메나르의 경우에서 지지되었던 정신적 행
168) 토마슨(1999), p.110,
169) 토마슨은 허구 안에서 부여되는 속성들에 대해선 그것들이 허구적 대상의 필연적 속성도 우연적 속성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령, “그 이야기에 따르면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이는 걸 참았다는 게 가능한 그런 <이방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양상문이 참이라고 해도, ‘아 랍인을 죽임’이란 속성은 단지 이야기 안에서만 귀속되는 것으로 이 속성을 허구적 캐릭터의 우연적 속성으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IV장2.2절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