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밀주의에 기반한 허구적 대상이론 /73
2. 고유명으로서의 허구적 이름 /80
2.2. 추상적 대상에 대한 고정지시 /89
2.2.3. 허구적 대상에 대한 명명식 /95
허구적 대상에 대한 명명식은 명명식 이전에 미리 존재하고 있는 대상에 대 해 행해지는 보통의 명명식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잘타는 명명식에 대한 기
131) 크립키도 비슷한 구분을 한다. 사실상의 고정어와 규약에 의한(de jure) 고정어가 그것이 다(Ibid.,p.32, 각주21).
132) 이 개념에 대해서는 III장 2.2절에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133) 잘타(2003). .이 부분에서 잘타와 볼토리니의 생각은 기본적으로는 같지만 어느 정도 차이 가 있다. 잘타 설명에선 이야기와 캐릭터 간의 지시적 연결이 선험적인 형이상학적 원리-이 야기에서 기술된 속성들의 각 조합이 독특한 추상적 대상을 집어낸다는 것을 보증해주는-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면 인공품 이론에선 이야기를 쓰는 행위와 캐릭터 간의 의존을 통해, 지 시에 있어서의 인과적 특성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존의 철학적 관념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허구적 캐릭터에 대한 이름 짓 기에서는 대상을 가리키면서 이름을 말하는 대신에 작가가 허구 스토리를 이 야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특정 대상이 이야기하기의 문맥 안에서 지칭되고 있다는 사실을 수립하는데, 이것이 곧 허구 대상의 명명식에 해당한다. 이처럼 명명식이 이야기하기로 이루어지므로 이 명명식은 존재하는 사물에 단지 이름 을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사물을 존재토록 하는 과정 자체에 관련되며 따라서 허구적 대상의 정체성을 이룬다. 이러한 고유명의 작동 틀 안에서는, 현실세계 에서 아무리 홈즈와 비슷한 속성들을 가진 인물을 뽑아내더라도 그는 코난 도 일의 명명식, 다시 말해 코난도일의 창작 행위와 관련이 없으므로 홈즈일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이름에 대한 역사적, 인과적 이론이 허구이름에 적용될 때에 는 이야기하기에서 끝난다고 본 도넬란과 비교할 수 있다. 그는 산타클로스와 관련된 믿음들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 산타란 이름의 지시체로 간주되는 어떤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에서 끝나며 이것을 ‘단절(block)'이라고 불렀다.
즉 이야기의 도입은 이름 사용의 역사가 올바른 방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북극에 살면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마 음씨 좋은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우리가 산타클로스 전설로 알고 있는 이야기 를 통해 만들어지며 우리의 현재의 산타클로스란 이름 사용도 이 이야기에 근 거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 는 ‘산타클로스’란 이름의 지시체로, 이름 사용의 역사는 결코 단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발화들의 연쇄를 통해 보존된 이름 사용의 역사는 이야기에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이야기를 통해 추상적 대상에 대한 지칭이 일어나는 것이 다. 이 명명식이 표준적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해서 그것이 없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코난 도일이 홈즈를 명명하기 위해 이미 홈즈를 마음에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홈즈는 엄청나게 많은 속성을 가지며 따라서 도일이 애초에 완 전하게 그를 마음에 품었다고 생각하는 건 비합리적이다. 허구적 대상을 이루 는 속성집합은 소설이 완성을 향해가면서 점차 확장된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단순해 보였던 인물이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모순적이기까지한 복잡한 성격을 가졌음이 드러날 수 있다. 요컨대 작가는 소설의 완성 전까지 각 인물을 이루 는 속성집합을 닫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허구적 대상의 본질적 속성에 대하 여 이야기하였고, 따라서 해당 허구 대상은 작품 전체의 완성이 아니라 본인 의 본질적 속성이 모두 서술된 시점에서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
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물들은 허구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이나 대상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그런 인물이나 대상들의 정체성이나 존 재와도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홈즈는 ‘왓슨의 친구임’이란 속성을 가지 는데, 이때 왓슨의 본질적 속성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시점에선 홈즈의 정체 성도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왓슨도 홈즈도 본인과 관련된 서로의 정체성이나 존재가 이미 있지 않으면 거기에 의존하는 속성도 생겨날 수 없으므로 각자의 정체성이 순환적으로 끝없이 미결정의 상태로 남는다는 논리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에 대해 볼토리니는 ‘동시발생'이란 해법을 제 시하고 있다. 상호 의존적인 허구적 대상들이 동시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134)
소설의 첫머리는 명명식 과정의 첫 단계로 도일이 홈즈를 지칭했다고 말하 는 건 부정확하다. 여기서는 오직 지칭의 체하기만이 있다. 코난 도일은 홈즈 이야기를 쓰면서 왓슨박사인 체하고 또한 홈즈를 지칭하는 체한다. 그러나 실 제로는 이 이름은 전혀 어떤 용법도 가지지 않는다. 나중 단계에서 이 이름은 진짜 사용을 부여받아 하나의 추상적 대상을 지칭하게 된다. 이 대상이 이야 기에 따르면 영리한 탐정인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코난도일에 의해 창조된 인 공적 추상물인 것이다. 나중 단계란 바로 허구적 대상이 완성된 단계이고 본 고는 이 시점을 그 대상의 본질적 속성들이 모두 발현된 시점으로 본다. 이 시점을 정하는 것은 본질적 속성집합을 어떻게 잡느냐에 달려 있다.
캐릭터가 완전히 발전된 시점이 언제냐의 문제도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허 구적 대상의 명명식에서는 보통 명명식의 과정 가운데에 이미 그 이름이 사용 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명명식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지칭이 일어나지 않는다 고 볼 때 허구적 대상에 대한 지칭은 이야기가 완결되기 전까지(혹은 해당 캐 릭터의 본질적 속성이 완전히 발현되기 전까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 다(윗단락에서 지칭의 체하기만이 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명명식이 완료되 기 전까지의 문장들이 전부 비지칭적 이름이 등장하는 무의미한 문장들이 되 어 버린다. 솔먼은 이러한 때라도 이 이름 사용이 완전히 비지칭적이지는 않 다고 생각하는데, 금방 허구적 캐릭터-기대되는 지시체-가 존재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런 이름이 아주 약하게 비지칭적일 뿐이기 때문이다.135) 그렇더라도
134) 볼토리니(2010), p.87, n.46 그러나 파슨스는 이 해법이 적당하지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파슨스(1980),pp.195-197). 그는 다른 허구적 대상과 맺는 관계를 나타내는 관계적 속성들 을 전부 사소화시키는 제안을 내놓는다.
135) 솔먼은 존재하지 않지만 가능한 존재를 지칭하는 단칭어를 약하게 비지칭적(weakly nonrefering)이라고, 시각 t에 존재하진 않지만, 과거에 존재하였거나 존재할 대상을 지칭하
어쨌든 작가가 비지칭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 이다. 잘타는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 완결 전에 작가가 캐릭터 이름을 쓰면서 그가 지칭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적법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으며 어떻게 언 어가 작동하는 것지를 분명히 의미있게 물을 수 있다, 다음의 답변들이 시도 되었다. 커리와 토마슨의 제안136)은 허구 안에서 쓰인 ‘홈즈’ 같은 이름들이 체하기 범위 안에서 양화사에 의해 묶인 변항으로 회귀되는 전방조응적 지칭 을 만드는 하나의 라벨로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허구 안에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양화된 램지문장 안에 있는 변항이다. ∃x1...∃xn[F(x1...xn)]. 즉 다음의 체하기, ‘옛날에 홈즈로 불리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범죄를 해결하고 ...한 어떤 사람이 있었다-(암묵적으로) 바로 이 사람이 이 이름사용 연쇄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사람이다-’는 체하기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해법은 허구이름 과 진짜 이름을 전혀 다르게 다룰 것을 요구한다.
잘타는 프레게적인 뜻에 호소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도일이 소설의 첫줄을 쓸 때 그 문장에 의해 표현된 생각은 지시체가 아니라 이름의 뜻과 연관되는 de dicto적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쓰면서 작가는 새로운 세부사항들을 마음에 가져온다. 도일이 일정 시점에 이름 ‘홈즈’로써 어떤 생각을 표현했는 가는 그 시간에 그가 가진 인식적 그림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로써 홈즈 그 자신이 이야기하기의 매 단계에서 다른 캐릭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름의 지시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뜻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직 홈즈의 명명식 과정 안에 있다. 그러 니까 홈즈의 지시체는 단일하지만 이야기하기의 각 단계에서 도일이 마주하는 인식적 정보의 양이 다르고 이는 곧 도일이 마음에 품은 홈즈의 뜻이 다르다 는 의미이다. 고유명과 대명사의 뜻으로 기능하는 추상적 대상들이 이야기를 쓰는 도중 도일의 인식적 조작의 대상들이 된다.137)
물론 명명식이 완료된 시점에서 우리는 ‘홈즈’의 지시체를 가지게 된다. 이 시점은 곧 그 이름이 명명하는 캐릭터의 완성 시점이기도 하다. 본고는 본질 적 속성이 규정되고 나면 이야기의 완성 전이라도 허구적 대상은 이미 만들어 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허구적 대상이 자신이 등장하는 허구에 앞 설 수 있다는 솔먼의 생각에 동의한다. 크립키는 작품의 최종 원고가 출판되
는 단칭어를 아주 약하게 비지칭적(very weakly nonrefering)이라고, 끝으로 그 용어가 지칭 하는 바가 존재했을 수 없었을 때를 강하게 비지칭적(strongly nonrefering)이라고 부른다.
136) 커리(1990), 토마슨(2003), 137) 잘타(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