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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존재부정문장의 문제 /20

3. 화용론적 해결 /37

3.3. 체하기 논제 /47

월튼의 저작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체하기’ 개념은 허구작품을 비롯하여 모 든 예술 감상에 핵심적인 태도 혹은 정신활동으로 이해되면서 반실재론 편에 서 허구 관련 진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진흙덩이를 파이인 체하기로 약속을 하고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들, 자전거와 창고를 각각 말과 마구간이라고 상상하며 노는 아이들의 일상적인 놀이방식에 착안한 이 개념은 우리가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행위의 분석에도 필 수적이라고 주장되었다. 즉 우리가 말과 마구간, 진흙 덩이를 소도구(프 랍;prop)로 사용하여 놀이에 참여하듯이 예술작품을 프랍으로 하는 체하기 놀 이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컨대 “홈즈는 탐정이다”라는 진술이 우리 에게 명백한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가 코난도일의 소설을 프랍으로 하는 체하기 게임 속에서 이 진술을 참인 것으로 상상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식으로 풀이된다.

에반스와 크룬, 또 월튼 자신에 의해 이 개념은 존재부정문장의 역설을 푸 는 데에 활용되었다.60) 이러한 해법을 넓은 의미의 화용론적 접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 것은 이들에 의해 (1α)형태의 문장들이 전달한다고 파악된 내 용이 문장의 진리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문장이 일상적 의미와 더불어 사용되면서, 그로 인해 해석적 긴장을 발생시킴으로써 전달 가능한 내용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아래에서 설명되겠지만, 이 입장 은 앞서 살펴본 화용론적 접근들과는 달리 (1α)에서의 α가 실제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용 요건을 만족시키는지 의심스럽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왜 냐하면 이들은 이런 문장에 쓰인 이름들에 진짜 지칭이 아닌 체하기 지칭, 지 칭의 시도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 이름들이 겉보기에 요구하

60) 에반스(1982),10장 3절, 크룬(2000), 월튼(2000)

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론적 개입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고 본다는 점에서 러셀의 전략에 가깝다. 크룬은 이에 대해, “설명은 용어의 존재부정문장에서의 사용이 체하기의 범위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허용하지 만, 이것으로 확실히 충분하다; 우리가 사용 요건을 주장할 때 이 이상을 요구 할 권리는 없다”61) 고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그것으로 충분한지는 의문이다.

에반스가 실제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E) x는 진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처럼 ‘진짜로(really)’가 삽입된 존재부정문장의 한정된 경우이다. 그는 이런 문장이, 그렇지 않은 존재부정문장과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 차 이는 ‘x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 즉 x의 부모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참을 표현했을 문장과 비교할 때 잘 드러난다. (E)는 말하자면 너와 내가 동시에 눈 앞에서 녹색의 작은 남자를 보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은 환각에 기인한 것임 을 말하려 할 때 사용하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x가 존재한다”

는 문장의 부정이 아니라 “x가 진짜로 존재한다”는 문장의 부정이며, 후자의 참은 공유되는 지각 정보가 진짜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이런 문장을 발화하는 상황에 체하기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물음과 대답을 상상해 보면 명백하다. “당신이 지칭하고 있는 게 누구인가요? 당신이 진짜로는 존재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죠?” “벽 꼭대기의 저 작은 녹색인간, 내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여기서 대답하는 사람은 작은 녹색인간에 대해 지칭하는 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발화들은 작은 녹색인간 에 대한 참과 거짓 사이에 구분이 주어지는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실제로 그런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맥락이란 바로 체하기라는 언어 게임의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각적 정보를 근거로 ‘이’나 ‘저' 같은 지시사를 사용하여 지칭하(는 체하) 고 있는 이러한 경우들에 대해 크룬은 ‘진짜로’라는 한정어가 사용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진짜로’란 말이 기대되는 것 혹은 기본 값으로 설정된 시나 리오와 정말로 일어난 것으로서 승인된 시나리오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는 데 쓰이는 실용적인 장치라고 볼 때, 생생한 우리의 관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없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 그러한 대조는 너무나 뚜렷하여 그러한 장치 없 이도 우리에게 원래의 해석을 수정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존재부정문장

61) 크룬(2000), p.103

일반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펴는데, 그에 따르면 (1α) 같은 문장들도 전부 뭔가 말이 안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적 긴장을 발생시키며 그 러한 해석적 긴장은 ‘진짜로’가 없이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진짜로’가 빠진 존재부정문장의 경우, 특히 (3) 같은 문장들의 경우에도 과연 “그 여자는 여자가 아니야” 같은 겉보기에 명백히 모순인 문장 이 주는 이상스런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지 의심스럽다고 생각한다. 크룬의 주 장과는 달리, (3)은 해석적 긴장을 일으키는, 따라서 그러한 긴장의 해결을 위 해 아래와 같은 공식을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문장이 결코 아닌 것 같다. 존 재부정문장에 대한 월튼의 해법을 차용한 크룬의 핵심 주장은 다음이다.

(3)을 발화하는 사람은 홈즈 스토리를 가지고 놀이하는 게임, 즉 "존재한다"

가 어떤 사물은 소유하고 다른 것은 그 속성을 결여한 그런 차별적 속성을 표 현하는 체하는 비공식적 체하기 게임에 참여한다. 이 비공식적 게임에서 "존재 한다"의 적용조건은 다음과 같다.

‘N적’ 지칭의 시도

62)

가 성공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지칭을 확보한다면 "N이 존재한다"가 참이라는 것이 허구적이고, 그것의 ‘N적’ 지칭의 시도가 무엇에 대한 지칭도 확보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 부정문 "N이 존재하지 않는다"가 참 임이 허구적이다.

다시 말해 (3)을 발화하는 사람은 사실은 허구적인 참을 말하고 있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술어에 해당하는 속 성이 있다는 허구 안에서의 행위일 뿐이다. 물론 존재부정문장과 관련하여 화 자가 참여하는 게임에 관해 에반스나 월튼은 모두 그 게임을 통해 화자가 허 구 세계 바깥의 실제 상황, 즉 ‘홈즈’란 이름의 지칭시도의 성공/실패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에반스는 존재부정문장을 체하기를 진지하 게 이용하는 경우의 하나라고 보았고 월튼도 그것이 허구적 참을 발생시키는 실제 세계의 사실들인 프랍에 주목하는 프랍지향적 체하기를 작동시킨다고 말 한다. 그렇더라도, 결국 (3)의 참이 허구 영역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은 이 해법의 심각한 문제로 남는다. 우리는 이런 문장을 결코 허구적 참으로 받

62) 주지하듯 월튼에게 있어 ‘N을 지칭하는’이라는 말은 체하기의 경우 쓸 수 없는 표현이다. N 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칭할 수도 없다. 따라서 그는 대신 'N적 지칭시도'라는 말을 쓴 다. 그러나 지시체 없이 N적 지칭시도의 사례들을 다른 지칭시도 사례들과 구분하거나 동일 시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설명해야 하는 부분은 월튼 이론이 가지는 부담이다. 이는 머리말에서 상세히 언급하였다.

아들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푸우는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곰이지, 진짜 존재 하는 곰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참을 말했다는 것이 어째서 허구적인 가?

같은 맥락에서 ‘존재한다’가 포함된 문장 전부가 체하기 범주에 들어가게 된 다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이는 사실상 체하기 논제를 주장하는 이들 스스 로가 요구하고 있는 바이다. 위에서 인용한 공식에서 월튼이나 크룬이 그러하 다는 점이 명시되고 있지만, 에반스도 (E)가 “x는 (진짜로) 존재한다”에 대한 일상적 부정으로 여겨지려면, “x가 존재한다”는 발화도 체하기 게임 안의 행 위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명왕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어떤 종류건) 체하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런 결정적인 약점을 가진 접근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