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허구적 대상에 대한 혼합이론 /102
4. 혼합이론 2 /132
4.1. 체하기 타입 동일성 /133
이에 관하여 토마슨의 [의존논제], 즉 작가의 특정한 정신적 행위가 허구적 대상의 존재를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이야기하였다. [혼합논제]는 체하기 행위타입을 제안하는데 이는 때때로 이야 기하기 과정으로서의 창작 행위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엄밀히 얘기하자면 이 둘은 같은 것일 수 없다. 체하기 행위 타입의 동일성은 어떻게 마련되는가?
체하기 행위 타입과 이야기하기 과정으로서의 창작 행위와의 관계는 무엇인 가?
본고는 월튼을 따라 이야기하기 과정이 전체로서 하나의 체하기 행위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성격을 가진 구체적 존재자가 이런저런 행 동을 하였다고 보고하는 체하기이다. 이러한 이야기하기 과정은 특정한 정신 적 사건과 달리 그 발생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결정할 수 없다. 때로 그것은 중단되었다가 재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본고는 이야기의 내용이 작가의 배경 지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 그리고 작가의 지식이 작가의 작품 창작 시점까 지의 해당 분야에서의 지식 축적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략적 인 경계를 갖긴 해도 발생 시점을 이야기하기 과정의 동일성의 조건으로 포함 시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가령 19세기 말까지의 화학지식은 홈즈 스 토리 전개에 필요하다. 따라서 만일 <홈즈> 시리즈가 18세기에 쓰여졌다면, 그러면서도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이 시리즈는 시대를 앞서 대단한 화
종(kind)개념으로써 허구적 대상의 존재론을 주장하는데, 사용하는 개념들, 설명방식은 다르 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본고의 추상적 대상론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는 인코드 개념 대신 ‘종 K 안에서 본질적essential임’으로써 허구내적 소유를 이야기한다.
학적 업적을 선취한 보기 드문 예가 된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캐릭터 홈즈에 ‘기적적인 화학 천재’라는 새로운 속성을 (인코드하는 속성으로 서) 부가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속성은 홈즈의 동일성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 한 속성임에 틀림없다(아마 홈즈를 대표하는 속성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홍색 연구>가 1887년보다 조금 더 일찍, 혹은 조금 더 늦게 나온 것이 홈 즈 캐릭터의 동일성을 깬다고 보기는 힘들다. 즉, 홈즈의 동일성을 이루는 이 야기 과정이 적절한 시점에 발생해야 한다고 봤을 때, 이 적절한 시점은 분명 히 특정 시점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발생 시점이 그 과정의 우연적 속성이 라고 보기는 힘들다. 특정시점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요한 조건은 이 야기하기, 혹은 체하기라는 행위의 토큰이 아니라 타입이지만 이 타입의 동일 성은 발생 시점의 제약을 받는다.
볼토리니가 이야기 과정의 토큰들을 하나의 타입으로 묶는 필요 충분조건으 로 제시한 것은 다음의 두 조건이다.
(CI) 이야기하기 과정의 두 토큰들이 인과적-의도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야 한 다. 즉 하나의 agent는 의도적으로 나머지 다른 하나의 agent가 우리에게 상 상하도록 한 바를 상상하도록 해야 한다.
(S) 이야기하기 과정의 두 토큰들이 정확히 같은 명제를 상상할 것을 명시 적, 함축적으로 규정한다.
186)위의 두 조건은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고 볼토리니는 설명한다. 두 체하기 행위는 상상해야 할 바에 대한 지시만 같다고 해서 같은 타입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데, 이는 피에르-메나르 사례가 잘 보여준다. 한편 (CI)만으로도 충분 하지 않은데, 누군가 홈즈의 속편을 의도해놓고 원래의 탐정 이야기와 전혀 다른 줄거리를 늘어놓는다면 이 또한 기존 홈즈와 연관된 체하기 행위와 동일 한 타입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86) 볼토리니가 제시한 이 조건(S)의 원래 형태는 다음이다.
그 체하기가 de dicto 혹은 de re 동일하다, 즉 그들은 전형적으로 구체적인 개별자, 이러저런 일을 한 개별자가 있다고 상상하도록 하는 같은 지시이거나(de dicto적 동일성), 전형적으로 구체적인 어떤 개별자에 관하여, 그 혹은 그녀가 이러저런 일을 한다고 상상하도록 하는 같은 지시이다(de re적 동일성).
본고는 허구적 대상에 관한 체하기를 전부 de re 체하기로 보는 입장에서 볼토리니의 원래 규정 을 바꾸었다. 볼토리니가 주장하는 에반스의 존재론적으로 창조적/보존적 체하기 게임과 de dicto/de re 체하기 간의 상응에 대한 필자의 비판은 본장 각주 158을 보라.
그러나 이 두 조건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홈즈의 화학적 지식에 관한 위 의 예에서 보았듯이 체하기 행위의 발생 시점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이 발생 시점은 단순한 시각이 아니라, 문학작품의 정체성에 관련된 사항들을 반영한 다. 가령 개인사적 속성의 차이가 아니라 문학사적 정황에서의 차이가 시점의 차이를 고려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다른 예술작품보다 문학작품의 경우 작 품의 의미내용의 전개 및 파악에서 작품 바깥의, 예술 행위 너머의 지식-정보 들이 더 많이 작동하기 때문에 해당 문학작품 이전의 문학사만이 체하기 행위 를 하나의 타입으로 묶는데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187) 가령 문학사적으 로만 정확히 우리의 실제 역사와 동일하고 다른 모든 상황이 현실과는 다르게 발전한 가능세계를 상상해 보자. 이 세계에서 현실세계의 어떤 작품 w와 동일 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 w'은, 작품을 둘러싼 시대 상황 및 작품 내용에 관 련된 수많은 지식, 정보들의 발달 수준이 현실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결 코 원래의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 창작 시기 가 작품의 의미에 주는 영향력의 정도는 작품마다 다를 수 있다. 또한 관련된 지식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따라 의미가 있는 시대 구획도 다를 수 있다.
중요한 배경 지식이 별로 시기에 구애를 받지 않는 이야기도 있고, 반면 의미 있는 시대 구획이 매우 짧거나 아주 긴 그런 역사를 가지는 지식의 분야에 깊 숙이 관련된 소설도 가능하다. 이런 모든 경우들을 포괄해서, 이야기하기 과정 타입의 동일성 조건으로서의 행위의 발생 시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T) 이야기하기 과정의 두 토큰들은 관련된 배경 지식의 수준이 같은 시점에 발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야기하기 과정의 두 토큰들은 그것들이 상상하도록 규정하는 명 제들이 같고, 관련된 배경 지식의 수준이 같은 시점에서 서로 인과적-의도적 으로 연관되어 있는 두 작가에 의해 생겨났다면 같은 타입에 속하게 될까? 필 자는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무시되고 있는 중요한 직관이 하나 있다고 생각한 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권에서 예술작품의 정체성은 작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민담이나 전설, 또 볼토리니가 염두에 두고
187) 가령 음악작품이나 미술작품의 경우, 특별히 사회적인 성격의 작품을 제외하고 나면 한 작 품의 의미-내용은 대체로 작품 자체의 특성 및 음악사나 미술사적 맥락에서 그 작품이 지니 는 의미, 영향력 등을 통해 결정된다. 작품의 의미-내용에 예술 바깥의 상황이 거의 관련되지 않는 특성은 추상적인 음악의 경우에 보다 강하다.
있는 신화처럼 불특정 다수에 의해 이야기하기 과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라면 위의 (CI) 조건이 제대로 작동하겠지만 이는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허구의 표 준적 범례라 할 수 없다. 특정한 작가가 하나의 이야기를 써냈다면, 우리는 그 작가가 본질적으로 그 이야기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코난 도일과 동시대에, 그와 동일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문제의 작품에 필요한 지 식 수준을 도일만큼 갖춘 누구라도 <홈즈>란 작품을 써냈을 수 있었을까? 우 리의 직관이 향하는 방향이 뚜렷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상황을 발견 의 경우와 비교해보라. 미분법은 라이프니쯔와 뉴튼에 의해 완전히 독립적으 로 발견되었다. 또한 케플러의 법칙과 뉴튼의 법칙은 (그 각각에 그들의 이름 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과학사를 공유한 다른 누구에 의해서라도 발견되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대조는 예술 작품은 작품의 창조자 고유의 것이라는 우리의 직관을 반영한다. 하나의 이야기에 포 함된 개인적인 독창성, 창의성 등은 어떤 식의 기준이나 수치로 환원되기 힘 들다. 따라서 간단히 작가 그 자신을 그 동일성의 조건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코난 도일 그 자신만이 <홈즈> 시리즈의 이 야기하기 과정에 책임이 있다. 이렇게 보면 홈즈를 코난 도일이 아닌 다른 사 람이 창조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해야 한다.188) 또 피에르-메나르 사례가 보여주는 직관도 사실은 아주 단순할 수 있다. 이야기를 쓴 사람이 세르반테 스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돈키호테는 우리의 돈키호테와 다른 허구적 대상으 로 생각되는 것이다.189)
물론 작가가 다르다는 것은 각 작가가 속해있는 시대 배경이 다르다는 얘기 고 따라서 똑같은 허구 속 문장도 함축하는 문장들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게 된다.190) 그러나 여기에서 작가를 거론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우
188) 이는 코난 도일이 <홈즈> 시리즈를 전혀 쓰지 않았을 가능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두 논제가 모순 관계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도일은 문학에 아예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홈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홈즈>를 다 른 누군가 만들어낸 상황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189) 커리 역시, 캐릭터의 유일성을 보장하는 정의적 특성으로 텍스트에 책임이 있는 작가를 든 다. “캐릭터 그(혹은 그녀)는 그에 관해 이 텍스트의 (허구적) 작가가 쓰고 있는 그런 사람이 다.” 커리(1990), p.179
190) 가령, 돈키호테가 역사에 대해 어떤 언급을 했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17세기의 돈키호테에 게는 단순히 ‘역사에 대해 찬양함‘이라는 속성을 귀속시키는 반면, 메나르의 돈키호테가 말한 똑같은 문장은 실용주의적이거나 철학적인, 보다 현대적인 역사에 대한 태도를 그에게 부여 한다(비슷한 예가 보르헤스의 책에 나온다).
한편 원래의 돈키호테에게 프로이트 심리학을 적용해서 함축되는 속성들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 능하지만 현대 작가 피에르-메나르의 돈키호테에게는 이것이 가능하다는 예는 어떤가?(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