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허구적 대상에 대한 혼합이론 /102
4. 혼합이론 2 /132
4.2. 허구내적 본질속성 /139
4.2.1. 허구적 대상과 본질주의 /139
‘홈즈’란 이름이 고정지시어임을 보인 II장 2.1절에서 이미 본고는 일정한 대 상에 대한 여러 가능성, 반사실적 사태들에 대한 생각들을 다름 아닌 바로 그 개체에 관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즉 개체 홈즈를 확정해주는 속성들의 집합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생각은 크립키가 고유명에 관한 이론을 가지 고 이끌어낸 형이상학적 결론인 본질주의를 연상시킨다. 허구적 대상의 지시 를 결정하는 본질적 속성이 있다는 본고의 입장을 ‘허구적 대상에 대한 본질 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 대상이 그 자신이기 위해 필요한 속성들이 있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볼 때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본질주의가 콰인을 비롯 한 격렬한 반대자들의 논박에 부딪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본고의 입장에도 부담이 된다. 그러나 논쟁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부활 한 본질주의가 일반적인 직관에 호소하며 일정 부분 동의를 끌어낸 것은 사실 이다. 여기서 본질주의 논쟁의 논점들을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본질에 대한 현대의 사유들이 그 논의를 양상논리학의 의미론과 연관시켜 진 행한 크립키의 탐구모형에 기본적으로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고가 제 시하는 본질주의 이론도 그 논의를 가능세계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전개한 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본구조를 공유한다. 본질적 속성으로 이루어지는 허구 적 대상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곧 양상문장의 해석에 직접 응용될 수 있다.
이는 별도의 장(IV장)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홈즈’의 본질적 속성은 홈즈가 존재하는 어느 가능세계에서나 이 대상이 가 지는 속성으로,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우연적 속성들과는 달리 이 속성을 가지지 않으면 대상이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그러한 속성이다. 혹은 II 장에서의 표현대로 그것은 각각의 가능세계에서 ‘홈즈’로 지칭되는 하나의 대 상을 골라내는, 즉 통세계적 동일성을 확보해주는 속성들의 집합이다. 이 대상 이 우리 세계에서 추상적 인공품을 지시하므로, 어느 가능세계에서나 추상적 대상을 지시한다는 점에 유념하자(즉 우리가 고려하는 가능 세계는 전부 홈즈 가 코난 도일에 의해 창조된 문학적 캐릭터인 그런 세계이다). 본질적 속성 집
합은 허구내적 속성, 즉 허구작품에서 캐릭터에게 부과한 속성들 가운데에서 선별된다. 이 집합의 정확한 구성을 뽑아내는 것은 실제 작품의 감상을 거쳐 사례별로 결정될 문제로 간단한 작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개념이 무의미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에서 우리는 적어도 몇몇 핵심적 인 속성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본질적 속성임을 확신할 수 있다. 가령 <오델 로> 비극의 씨앗이 반드시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일 필요는 없지만, 이아고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는 오델로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이 절에서는 본질적 속성 을 가려내는 타당한 기준을 정립하려고 한다. 우선 떠오르는 기준으로 작품의 스토리 전개에 핵심적인 기여를 하는가, 성격의 일관성 및 사건의 박진성에 기여하는가 따위의 요소들을 들 수 있다.
[원리]
허구적 대상의 본질적 속성들은 사건 전개 및 사건의 사실감 구축, 성격 형성 및 성격의 일관성에 관여하는 속성들이다.
이러한 속성들의 소유가 전부 허구 안에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 다. 우리는 허구적 대상들에도 -실제로는 추상적 대상이지만 그것이 소설 안 에서는 구체물로 나타나므로- 우리 세계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물리적, 심리 적, 논리적 법칙들을 투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사를 통해, 그 소유가 명시적 으로 규정된 속성들에 의해 법칙적으로 함축되는 속성들도 본질적 속성집합에 들어갈 수 있다. 예컨대 “햄릿이 우유부단하다”란 문장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햄릿의 행동에 대한 기술 및 그의 대 사 등을 통해 그의 우유부단함을 타당하게 추론할 수 있다. 허구에 드러나는 정보들을 이용하는 이러한 추론을 위해 우리가 의존하는 법칙들은 다양하다.
가장 기본적인 논리학부터 상식에 기반하는 소위 통속심리학, 물리학, 생물학, 기계공학 등의 과학적 지식 및 지리,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에 이르기까 지 우리는 다양한 지식을 동원하여192)193) 표면적으로 명시된 것들 너머의 속
192)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지식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대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참을 가정하는 다양한 과학적 지식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의학 소설이나 고등 수학이론이 활용되는 수사드라마 <넘버스>처럼 전문적 배경 지식이 사건 전개에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지식의 세부사항을 잘 모를 때조차 실제 대상들 에 다양한 과학적 법칙들이 적용되고 있음을 당연시 하듯이 허구적 대상들에 대해서도 그렇 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얼마나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명시되지 않은 얼마만큼의 속성 들을 채울 것인가는 문제의 속성이 작품 전체, 캐릭터의 심리나 동기, 사건 전개를 이해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되느냐를 기준으로 해야 할 것이다. 가령 우즈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면서 채우기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다(우즈(1974), pp.64-65).
성들까지 합리적으로 캐릭터에 부과할 수 있게 된다.
[제약1-함축]
현실세계의 제약: 허구적 대상의 본질적 속성은 허구에 의해 부여된 속성들로부터 함축되는 속성들이다. 이 함축은 현실세계의 제법칙들을 적용함으로써 결정된다.
194)돈키호테를 위한 채우기 문제fill-problem는 누구의 물리학을 그를 위해 가정해야 하는가라는 문 제를 포함할까? 코페르니쿠스의 물리학, 세르반테스의 물리학, 우리의 물리학 중 어느 것인 가? 돈키호테는 두 부분으로 출판되었다. 첫 번째는 1605년, 둘째는 1615년에.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대한 처음의 두 법칙은 1609년 출판되었고, 세 번째는 1619년에 나왔다. 그렇다면 1 부의 돈키호테가 그 아래에서 잔 천체는 원형 궤도이고 2부의 돈키호테의 천체는 타원궤도라 고 해야 할 것인가? 이 위대한 소설에서는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거 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가? 케플러의 제3법칙은 소설완성 전에는 발표되지 않았다고 해서? 율리시즈는 어떻게 채울 것인가? ... 위대한 문학작품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채울까를 조언하는 게 아주 막중한 과제인 문화적 역사가들을 위해 문학적 주석의 필요성을 만들어낸다. 그런 참들이 어떻게 발견되는지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허구적 참 의 논리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채움-문제를 무시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필자는 문학 주석가들이 밝혀낸 지식이 허구의 이해를 돕는다면(어떻게 그런지를 주석가 는 밝혀야 할 것이다)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대의 잘못된 지식이 사건에 반영되 었다면, 반영된 대로의 속성을 허구적 대상에 적용해야 함은 물론이다. <얼룩끈>에서의 Russell's viper의 경우(이 종에 속하는 뱀의 생태는 소설에 묘사된 바와 같지 않다)처럼 명 시적으로 잘못된 지식에 근거한 사건이 묘사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당대 의 일반적인 믿음, 혹은 작가의 잘못된 믿음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양 이야기 속에 중국의 어느 마을이 분명히 일본의 전통문화로 해석됨이 타당한 문화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 었다면, 우리는 당대 서양 사람들이 가졌던 일반적인 오해를 감안하여, 이 마을을 일찍이 일 본 문화가 유입된 특별한 중국 마을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중국 마을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 다(이 예는 김세화(2000)에서 가져왔다). 요점은 어떤 속성이 함축된다고 보는지, 또 그 함축 을 판단하는 데에 동원할 수 있는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있다는 것 이다.
193) 앞서 홈즈의 화학적 지식에 관하여 설정한 가정적 상황, 즉 18세기에 <홈즈>시리즈가 쓰 여졌을 상황에서 우리가 그 함축을 찾아낸 홈즈의 속성 속에는 ‘대단한 화학천재임’이란 속성 이 포함될 것이다. 그렇다면 체하기 타입 동일성의 원리로 (T)를 따로 설정해주지 않아도 아 래의 [제약1-함축]만 가지고도 19세기 홈즈와의 차이가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본고 각 주 190및 각주 192의 설명에서처럼 우리는 이 경우 당대의 지식을 기준으로 함축되는 속성 들을 찾아내며 그 속성들은 (T)로 인해 허구적 대상이 인코드한다고 인정되는 속성들과 다르 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면 (T)는 허구외적 속성에도 관여한다는 점에서 따로 설정해주는 것이 분명히 의미가 있다. ‘다음 세대 화학자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줌’ 같은 속성 은 원래의 홈즈가 가질 수 없는 속성이면서 또한 가정된 상황에서도 함축되는 허구내적 속성 들의 집합에 속하지 않는다.
194) 비슷한 취지의 원리가 선행연구에서 언급된 바 있다. 라이언은 허구나 반사실적 조건문의 이해를 위해 최소이탈의 원리를 이야기한다. 픽션의 세계는 피할 수 없는 조절 외에는 우리 의 세계에서 특별히 변형되지 않은 세계이다. 박영섭(1997), p.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