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존재부정문장의 문제 /20
4. 솔먼의 해법 /50
4.2. 홈즈적 홈즈2 /54
들어 “도일이 홈즈를 창조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허구적 캐릭터이지 존재하 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탐정 소설의 캐릭터와는 다르게....”라는 문장에 나오는 ‘홈즈’란 이름은 분명히 사용된 것으로 홈즈라는 캐릭터를 지칭 하고 있다. 월튼이나 크룬의 주장과는 달리 이때 존재부정문장에서의 이름 사 용은 체하기의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67) 그렇다면 솔먼은 (3)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런 것들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란 술어를 할당할 수 있는가? 이제 솔먼의 해법이 어떻게 사 용과 단순성이라는 두가지 한꺼번에 해결되기 어려운 제약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솔먼의 대답은 존재론의 철학적 주장을 일상어로서 의 ‘존재한다’라는 술어의 분석과 분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솔먼은 (3)에서의 ‘존재한다’를, '실제적이다(be real)'를 의미하도록, 즉 ‘단 지 이야기의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로 묘사된 종류의 존재자이다’를 의미하도 록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제 (3)은 ‘(캐릭터) 홈즈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 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달한다고 해석된다.70). 괄호 속의 내용은 그 표현이 생략된 채 문맥을 통해 제공되는 셈이다. 그 문맥이란 우선, 허구바 깥에서, 즉 실제 세계에서의 홈즈의 존재에 관해 이야기하는 상황이다. 이때
‘홈즈’의 지시체는 추상적 인공물이 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 는 우리의 사고습관, 언어사용의 경향이다. 국가나 음악작품 등의 다른 추상적 대상들에 대한 이름과 달리, ‘홈즈’의 경우에는 그것이 소설 안에서 보통의 이 름인 양 행세함으로써 우리에게 다른 지시체를 기대하도록 한다. 즉 우리는 피와 살을 가지고 바이얼린을 연주하며 복싱이 취미인 진짜 인간 홈즈를 그 이름의 지시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관련 집합, 즉 실제 인간들 의 집합 안에 추상물로서의 홈즈는 속하지 않는다. 학생들과 대화하지 않은 교수들의 관련 집합에 생활체육 강좌의 황선생이 속하지 못함으로써 위의 최 의 진술이 거짓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추상물로서의 홈즈의 존재는 (3)을 거짓으로 만들지 못한다.
이 점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홈즈2가 홈즈적이지 않다’는 솔먼의 (3) 해석 이다. ‘홈즈 2’는 앞서 II-2.2에서 크립키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이해한 대로 도 일의 작업 결과 생겨난 인공적 존재물을 지칭하는 이름을 표기한다. 크립키 설명에서 이러한 이름 사용은 보다 근본적인 사용에 기생하는데 그 근본적 사 용이란 바로 진짜 사람을 지칭하는 체하기에서의 사용이다. 그는 사람에 대한 허구적 이름, ‘홈즈1’에서 허구적 사람(추상적 대상으로서의 캐릭터)을 위한 이 름인 ‘홈즈2’로의 의미론적 이행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홈즈1이 존 재하지 않는다’를 허구 바깥에서 읽게 될 때 전통적 철학에서 역설로 간주된, 주어 자리에 비지칭어가 오는 존재부정문장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 리는 앞서 이 역설을 해결하려는 크립키의 시도가 무한퇴행에 빠지며 전혀 해
69) 이는 프리델리가 차용한 라이머의 예를 변형한 것이다. 라이머 논문명이 바로 “양화와 문 맥”이다(프리델리(2002), p.272) 본고는 이처럼 문맥에 따른 관련 대상 집합의 범위의 문제 로 보는 관점이 월튼이 유비하고 있는 은유의 모델보다 존재부정문장의 이해에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월튼은 raising hackles(화나게 하다), seventh heaven(최고의 행복), beyond the pale(경계를 넘어)을 사용하는 것이 화자로 하여금, hackles(닭깃털)이나 heaven, pale(말 뚝)의 존재에 개입토록 하지는 않는 것처럼 폴스타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폴 스타프라는, 존재를 결여한 어떤 것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 였다(월튼, 2000).
70) 솔먼(1998), p.293
결책을 제시하지 못함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이름을 단지 사용하는 체하는 것 은 빈이름 사용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체하기 사용은 실제 이 름을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다. 결국 홈즈2만 남게 된다. 코난도일에 의한 셜록 홈즈의 완전히 비지칭적인 사용 같은 건 없다는 것이 솔먼의 결론이다. 따라 서 (3)은 비지칭적인 이름을 가진 진짜 존재부정문장을 산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홈즈2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코난 도일은 홈즈 이야기를 쓰면서 스스로가 왓슨박사인 척하면서 홈즈를 지칭하는 체한다(실제로는 이 이름은 전혀 어떤 용법도 가지지 않는다). 캐릭터가 완성되는 나중 단계에서71) 이 이 름의 사용은 허구에서 실제로 유입되어 이야기에 따르면 그것의 이름인 것과 같은 것을 지칭하게 된다. 이 똑같은 하나의 대상이 이야기에 따르면 영리한 탐정인 인간이고 실제로는 코난도일에 의해 창조된 인공적 추상물인 것이다.
도일자신의 사용 뿐 아니라 문학평론가들의 사용에서도 이름 사용이 체하기 맥락에서 일어날 때가 많다. 줄거리를 설명하거나 주인공의 심리를 분석하는 문장들에서 사용된 이름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어떤 사용에서든 진짜로 그 이름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허구적 캐릭터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용은 그것이 이야기 안에서 가지는 사용과 구분되지 않는다. 즉 ‘홈즈’는 결코 애매 어가 아니다. 솔먼은 수정마개의 비밀 사건을 해결했지만 사실은 존재하지 않 는 홈즈1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객관적 홈즈는 홈즈2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단지 허구작품의 일부일 뿐이다.
자, 이제 (3)은 거의 모순에 가까운 (4)로 읽힌다.
(4) 홈즈는 존재하지 않는다: 홈즈는 (단지 허구적 캐릭터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적 형태의 명제 대신 앞서 솔먼이 존재 술어에 대한 특이한 읽 기를 제안한 것이지만, 이러한 읽기가 수용할 만한 것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3)이 홈즈2가 이러저러한 특성을 가진다고 이야기 하는 문장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크립키가 홈즈1과 홈즈2 사이의 애매 성을 주장하면서 홈즈1은 진짜로 빈이름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아마 이것일 것 이다. 그러나 솔먼의 독특한 독법을 지지해주는 직관을 찾아낼 수 있다. 그것 은 허구적 이름이 기술적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71) 캐릭터가 완성되는 시점을 어느 때로 잡아야 할 것인가? 작가의 머리 속에서 작품 구상이 끝났을 때인가,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인가? 아니면 홈즈의 속편이 다른 작가에 의해 계속된다면, 여전히 홈즈 캐릭터는 완성되지 않은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본고 II장 및 III장 4.3절에서 논의될 것이다.
우리는 가끔 보통의 이름, 특히 유명인의 이름을 다양한 기술적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러저러한 사람이 나폴레옹이라거나 또다른 히틀러라고 말하는 것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솔먼의 제안은 존재부정문장에서 바로 이 런 방식으로 ‘홈즈’란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에 의해 홈즈에 부여된 ‘베이커가 221번지에 살며, 왓슨의 친구이며,...’ 따위의 속성들을 축약 해서 간단히 ‘홈즈적’이라고 부를 때, (3)에 나오는 ‘홈즈’는 바로 홈즈2면서 홈즈적인 그런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문장은 사실상 홈즈적 홈즈2가 존 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홈즈2는 홈즈적이지 않다’는 명제를 나타낸다.72) 그러나 이러한 이름의 기술적 사용을 인정하는 것이 직접 지칭 이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생각될 필요는 없다. 기술적 사용은 논 리적 의미에서의 홈즈2 방식의 표준적 사용에 근거한, 거기에 의존하는 부차 적 사용일 뿐이다. 이는 내 주변의 누군가에 대해 “그는 나폴레옹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나폴레옹’이란 이름이 원래 가지는 직접지칭의 기능이
72) 허구대상이 전자(electron)처럼 자료의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 설정된 이론적 대상이라고 주 장하는 반 인와겐 역시 실재론이 공히 부담해야 하는 존재부정문장의 문제에 이와 비슷한 대 답을 짤막하게 제시한 바 있다. (3)을 말하는 사람이 어떤 대상도 홈즈 소설 속에서 홈즈에게 부여된 속성을 모두 가지지는 않는다는 명제를 표현한다는 것이다(반 인와겐(1977), p.308 n.11). 그러나 반 인와겐의 대답은 이름에 대한 기술론적 분석 일반에 주어지는 비판에 노출 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이 분석은 부당하게도 실세계에 우연히 홈즈의 속성을 모두 가진 누군가가 있다면 (3)이 거짓이 된다는 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솔먼 자신도 사실상 어떤 대 상이 홈즈2가 소설 안에 묘사된 바에 ‘충분히 닮았다’는 것이 관심에 상대적이라고 말하면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캐릭터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관심에 따라 참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솔먼(1998), p.317, n.48), 이는 본문에서 제시된 것과는 약간 상이한 분석을 보여준다. (3)에 대한 솔먼의 원래 분석은 ‘홈즈2는 홈즈적이지 않다’이 고, 이 명제의 참은 추상적 대상으로서의 홈즈는 (어떤 관심을 취하더라도) 구체적, 경험적 대상과는 닮을 수 없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드라큘라 캐릭터가 실존했다 는 주장이 참으로 이해된다고 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니 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홈즈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존재양상문장을 다루는 본고 IV장 1절을 보라). 한편 (1a) 형식의 모 든 문장의 존재술어에 대해 솔먼이 특이한 해석을 제안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야겠다. 이 를 간과할 때 프리델리의 다음과 같은 비판이 가능해진다. 그는 솔먼의 분석이, 톰 헐스가 연 기한 영화 <아마데우스> 속의 모차르트에 충분히 닮은 진짜 모차르트는 없다는 이유로 ‘모차 르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를 참으로 만드는 부당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짜르 트는 실존 인물이므로 그의 이름을 포함한 존재부정문장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존재부정문장은 단지, 발화된 시점이나 설정된 가정적 상황이 모차르트가 실존한 시 점이나 상황이면 거짓이고 그렇지 않으면 참이다. 그러면 이는 하나의 이름이 실존인물의 이 름일 때와 아닐 때를 분리해서 이 문장의 의미론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모차르트, 호머, 홈즈 등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쟁할 수 있으며 논쟁 을 위해 ‘모짜르트’, ‘홈즈’ 이름에 대해 하나의 통일된 의미론을 필요로 한다. 이에 대해 2차 원적 의미론을 다루는 IV장 3절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