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허구적 대상에 대한 양상 문장의 해석 /170
1. 존재양상문장의 해석 /171
크립키, 카플란의 견지에서 (1)은 거짓인 명제가 된다. ‘홈즈는 존재하지 않 는다’가 필연적 참이기 때문이다. ‘홈즈’란 이름의 지시체는 현실세계에 없으며 이 이름을 고정지시어라고 볼 때, 우리 세계에서 지시하지 못하는 이 이름은 다른 가능세계에서도 아무 것도 지시하지 못한다. 홈즈의 특성을 모두 갖춘 누군가가 존재하는 가능세계가 있다고 해도, 그 세계는 우리가 ‘홈즈’라 부르 는 개인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 이야기 세계 가운데 하나의 거주자가, 그들의 이름 ‘홈즈’가 우리 세계와 관련해서 우리 세계에는 없는 무언가를 지칭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이름 ‘홈즈’는 그들의 세계와 관련해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29) 그러나 보다 느슨하게 이해할 때 (1)을 참이라고 믿고 발화하는 화자는, 아마도 홈즈적 특성을 갖춘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 다시말해 홈즈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사건에 대한 보고인 그런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필자는 고유명의 고정지시에 대한 크립키나 카플란의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허구적 이름의 지시에 관해서는 다른 생각이다. ‘홈즈’는 현실세계에서 지시체 가 없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인공품, 문학적 캐릭터로서의 대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추상적 실재론의 견지에서도 방금 말한 의미에서, 즉 홈즈적인 개인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1)을 주장할 수 있을까? 물론 본고는 홈즈적 개인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홈즈’는 우리 세계에서 명명되었던 바대 로 실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추상적 인공품을 지시하며, 그러한 점에서 이 이름이 고유명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솔먼을 따라 보다 일 상적인 의미에서 (1)을 이해할 길을 탐색해 보겠다.
사실 (1)은 ‘홈즈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함축하는데, 우리 이론 에서 문학적 캐릭터로서의 홈즈는 분명히 존재하므로, 이 문장에 쓰인 ‘존재하 다’란 표현에 일정한 해석을 주지 않는 이상, (1)은 불가해한 말이 되어 버린 다. 솔먼이 제시했던 전략은 허구적 이름과 결합된 ‘존재한다’가 '실제적이다 (be real)'를 의미하도록, 즉 ‘단지 이야기의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로 묘사된
229) 크립키(1972), 카플란(1973), 특히 카플란, p.513이하
종류의 존재자이다’를 의미하도록 읽는 것이다. 이제 ‘홈즈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 ‘(캐릭터) 홈즈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달한다고 해석된다.230). 이는 우리의 사고습관, 언어사용의 경향에 기인하는 데, 국가나 음악작품 등 다른 추상적 대상들에 대한 이름과 달리 ‘홈즈’의 경 우에는 그것이 소설 안에서 보통의 이름인 양 행세함으로써 우리에게 다른 지 시체를 기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가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홈즈 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참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제 솔먼의 해석을 좇아 (1)도
‘홈즈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는 명제를 표현하는 걸 로 볼 때 그 뜻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231)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비 인식적 의미로, 그런 존재자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세계에서 ‘홈즈’란 이름은 이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므로 엄밀한 의미에선 그 가능성을 근거로 (1)이라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로의 ‘홈즈’란 말의 용법을 그대로 살리는 존재양상문장은 (2)가 된다.
(2)는 (1)과는 반대로 ‘홈즈가 존재한다’라는 명제, 즉 실재론의 입장을 전제 로 하고 있다. 이 입장에서 (2)를 참으로 본다는 것은 홈즈를 우연적 존재자로 생각한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실재론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2)를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 크리텐든은 ‘홈즈가 존재한다’란 명제가 홈즈의 존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232) 그는 이를 존재론이 아니라 순전히 언어적 문제 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홈즈가 존재한다는 것은 ‘홈즈 이야기를 만들 때 사용된, 지칭적 표현을 포함한 문장 집합이 있다’는 명제를 뜻할 따름이다. 동시에 이는 진짜로 존재하는 건 없다는 걸 함축한다. 따라서 (2)도 대상 홈즈에 대한 것이 아니고 단지 ‘특정 저작이 쓰여지지 않을 수 있 었다’라는 우연적 참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홈즈가 존재한다’란 말을 홈 즈의 존재와 분리시키는 그의 논의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2)에 대한 해석 으로서의 이 명제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추상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2)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크리텐든이 생각한 식의 매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토마슨과 잘타는 (2)를 참으로 생각하는 직관을 수용하는 데 필요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233) 구체성을 예화하지 못하는 대상으로서의 추상적 대상은 시 공간성이 결여되고 따라서 그런 대상의 존재는 전혀 우연적이거나 경험적 문
230) 솔먼(1998), p.293
231) 잘타가 이러한 해석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였다. 잘타(2006),n.35, 월터스토프(1979),p.129 에도 유사한 해석이 나온다.
232) 크리텐든(1991),p.101이하,
233) 토마슨(1999),pp.108-109, 잘타(2006),p.613
제가 아니라는 것이 통상의 생각이다. 그것은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영 원불변한 존재자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토마슨의 이론을 통해 다양한 방식 으로 구체적 대상들에 의존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그 자체가 일정한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추상적인 대상들이 있음을 살펴본 바 있다. 허구 적 대상도 바로 이런 종류의 의존적 대상으로,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문제의 허구적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홈즈의 존재는 코난 도일의 사고 행위 및 문학작품 <홈즈> 시리즈의 존재에 의존한다. 그것은 창조되는 것이고, 따라서 (2)는 ‘홈즈는 창조되지 않 을 수 있었다’로 읽힌다. 가령, 코난도일의 의료 직업이 성공적이었다면 홈즈 는 창조되지 않을 수 있었다.
잘타도 허구적 대상들을 저자의 체계적인 언어-행동적 패턴에 근거를 두는 대규모의 속성패턴들로 동일시하는 자신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2)를 해석한다.
<홈즈> 시리즈의 주인공인 추상적 대상은 단지 우연적으로, ‘x가 홈즈 스토리 에서 유래한다’234)란 정의를 만족시킨다. 아무도 <홈즈> 시리즈를 지어내지 않았더라면, 홈즈 이야기는 없었을 것이고 홈즈도 그 이야기에서 유래하는 캐 릭터로 확인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로써 허구적 대상이 우연적 존재자란 생각 이 추상적 대상 이론에 수용된다. 크리텐든은 (2)의 해석을 단지 말하기의 문 제로 축소시켰지만, 토마슨과 잘타는 말하기, 혹은 작가의 창작이라는 구체적 행위에 의존해서 실제로 추상적 대상이 생겨나는 것이라 보았고 본고도 이러 한 해석에 동의한다.
볼토리니 역시 허구적 대상이 체하기 행위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그 러나 단지 이러저런 특성을 가진 구체적 개별자가 있다고 체하는 것만으로 저 절로 허구 대상이 생겨나는 것은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그 생성은 일정한 체 하기 행위-타입이 일정한 속성집합에 관련된 것으로 적용되었을 때에 가능하 고 이러한 관련, 적용은 바로 문제의 체하기 타입이 예화되었을 때, 즉 체하기 과정(이야기하기 과정)이 완료되었을 때 일어난다. 이로써 속성집합이나 체하 기 행위-타입 등 허구적 대상의 구성이 시간을 초월하는 플라톤적인 것으로 생각되더라도 허구적 대상의 생성에 대한 설명에는 문제가 없어진다. 두 요소 자체는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만 두 요소를 관련시키는 작용은 어디까지나 우 연적인 사건으로 구체적 시공간 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의 관점 에서 (2)는 문자 그대로 이해된다. 허구적 대상의 존재는 우연적이다. 저자가
234) 잘타 이론에서 x가 스토리 y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x가 y의 등장인물이면서 앞선 어떤 문 학작품에도 이 캐릭터가 등장한 적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식으로 행동했더라면, 즉 문제의 체하기 행위-타입의 사례화를 야기하지 않았다면 홈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가 작품이 의존하고 있는 물리적 대상과 인과관계를 맺음으로써-텍스트 를 이루는 의미론적 표현들을 물리적 수단을 통해 기재함으로써- 작품을 창조 하며 캐릭터는 이 작품의 스토리에 의해 이러저러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규 정된다는 점, 다시 말해 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작가와 허구 캐릭터 간에 일정한 인과적 연결이 성립된다는 점을 지적했을 때(II장 2.2.3 절), 우리의 이론은 이미 허구적 대상을 경험적인 인과 사슬 가운데에 들여옴 으로써 이 대상의 존재가 우연적임을 암시했다고 하겠다. 그것은 일상적인 세 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