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허구적 대상에 대한 혼합이론 /102
4. 혼합이론 2 /132
4.2. 허구내적 본질속성 /139
4.2.2. 퍼지적 본질 /143
4.2.2.4. 어려움들 /153
위에서도 보았지만, 허구 속의 모든 속성들을 위의 분류 기준에 따라 위계 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실제로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다. <트와일라잇>의 에드 워드의 머리색이 영화판에서 달라졌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204) 이 불평은 정당한 것일까? ‘붉은끼가 살짝 도는 어두운 갈색’ 머리칼이 그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에 결정적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이런 식의 의문이 위에 제시한 예들 전부에 대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필자 는 특정 속성이 본질적인지에 대한 여러 이론, 가설들이 나름의 논리로써 세 워지고 또 거기에 도전하는 반론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고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의들은 그 자체로 허구적 대상의 본질을 탐색해 가는 과정 이 된다. 고정된 경계가 아니라 퍼지적 본질을 가진 대상으로 허구적 대상의 정체를 이해하게 될 때, 탐구를 통한 이러한 변경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중요 한 것은 준-핵심 속성의 집합-pool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속하는 속성들 각각이 반드시 본래 그대로일 필요는 없다는 것, 그러면서도 이 속성 들이 한꺼번에 이탈을 보이지 않는 한 허구적 대상의 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 다는 것이 퍼지적 본질의 핵심이다. 반면 핵심적 속성집합은 문제의 속성이 빠지거나 변경된 특정한 허구 대상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필요한 속성들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필요조건인 것은 맞지만 핵심적 속성만으로 본 질적 속성의 집합이 닫히는 것은 아니다. 핵심 속성이 그대로이더라도, 준핵심 속성에서의 상당량의 변화는 동일성을 붕괴시킨다.
204) 소설 <트와일라잇>의 수많은 여성팬들이 영화판 동명작품에서의 로버트 패틴슨의 외모에 대해 불평을 했다.
핵심 속성과 준핵심 속성간의 관계가 어떤 것이냐를 이해하기 위해, 부품의 상당수가 변경되었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시계와 외관 및 부품이 거의 그대로 이지만 작동하지 않는 시계 가운데 어떤 것이 본래의 특정 시계와 같은 것이 냐는 유비적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이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는 소크 라테스가 철학자가 아닌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거북이일 수는 없었 다는 분명한 직관과 대조된다. 본고의 대답은 둘 다 원래의 시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이 필요충분 조건으로서의 특권적 속성인 한 동일성 문제는 하나 의 대상이 그 속성을 갖추었는지 없는지만 조사하면 해결된다. 그러나 인공품 의 경우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고 특히 허구적 대상에서의 본질적 속성의 실질적 구분을 위해서는 다소 복잡한 위계화가 필요하다.
특권적 속성이라고 했지만 이 속성이 철학자들에 의해 절대적으로 어떤 대 상에 부여되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특권적 속성이기 때문에 이를 보다 엄밀 하고 정확하게 고정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II장 1절에서 철학자 들이 자연물의 본질적 속성이 현미경적 구조 혹은 내부구조 상의 어떤 실체로 확인된다는 생각을 제시했음을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따라서 본질적 속 성을 찾는 작업은 자연과학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관찰과 실험, 가설의 정립과 논증 등 정교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물’이나 ‘산소’ 같은 표현의 지시 체가 결정되는 것이다. 즉 본질적 속성의 탐구를 위해 경험적 학문에 의뢰한 다는 것은 허구적 대상에만 해당하는 사정이 아니다. 스토리 전체의 흐름에 대한 면밀한 분석, 캐릭터 심리에 대한 연구, 또한 시대-사회적 배경에 대한 조사 및 필요한 관련 지식의 탐구 등 문학평론을 구성하는 갖가지 경험적 연 구를 거쳐야 비로소 위의 I, II, III 속성간의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여기 서 다루고 있는 속성들 뿐 아니라 허구외적 본질 속성에도 해당한다. 문학사 에서의 작품과 캐릭터들의 영향관계에 대한 연구, 이전 비평의 의견에 대한 참조까지 다양한 경험적 연구가 개입할 수 있다.
본장의
4.2.1절
에서 언급하였듯이 허구적 대상에 관한 묘사에서 함축되는 속성들을 뽑아내는 데에는 실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이용된다. 따라서 문학 적 탐구를 통해서 뿐 아니라 자연과학의 발달에 의해 새로운 본질적 속성이 가려지는 일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의학에 관심이 있는 어떤 홈지언이 <홈 즈> 시리즈를 완벽하게 분석한 후에 사실상 홈즈의 추리력이 그의 유전적 특 이성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 의학의 발전이, 홈즈 가 보이는 외모 상 혹은 심리구조 상의 특성들이 유전적 소인에 기인하는 하 나의 병리적 징후이고 이것이 그의 주목할 만한 집중력이나 추리력에 영향을끼쳤음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이 질병-그것을 Y라 하자-은 현대적 발견이므로 코난 도일은 그 자신도 모르는 채 이 질병을 앓는 인물을 묘사한 것이 된다. 이런 것이 가능할까?-실존인물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지만, 코난 도일이 천재적 직관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다). 이때에는 [제약 1-함축]에 의한 본질적 속성집합에 ‘질병 Y를 앓음’이란 속성이 속하게 될 것 이다.
하나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주장은 보다 면밀하고 설득력 있는 논거를 갖춘 다른 가설에 의해 논박될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가설의 도전 및 반박 가능 성에 열려 있다. 그러나 본질에 대한 주장이 논박당할 수 있음이 곧 그러한 탐구의 대상이 없음을 뜻하는가? 자연종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이라 는 자연종 명사는 어떤 본질을 지시하는가? 물이 H2O임이 밝혀지기 전의 사 람들과 중수가 발견된 1930년대 및 다중수가 발견된 1960년대에 사람들은
‘물’로써 각기 다른 대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205)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물 체의 본성, 본질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고 있고, 합리적인 검증을 거쳐 제시된 이론이더라도 항상 반박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물’이 라는 말의 지시체를 계속 바꾸는 것이라 한다면 고정지시어라는 개념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되고 만다. 본질주의의 기본적 논제는 형이상학적이다. 우리 의 인식 상황에 무관하게 하나의 대상은 그 대상이기 위해선 반드시 가질 수 밖에 없는 속성이 있다.206) 이 말은 본질에 대한 자연과학적 탐구가 의미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본질주의 논제가 대상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가능성을 제약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허구적 대상의 본질주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허구적 인물을 창 조해내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속성들 일부를 본질적인 것으로 가지는 객관적 인 하나의 대상으로 성립한다. 그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어떤 속성이 본 질적인가를 밝힐 수 있고, 또 그 주장이 반박될 수는 있지만, 이것이 허구적 대상이 본질적 속성을 가진다는 논제 자체를 허물어뜨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속성들이 본질적 속성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은
205) 중수(重水)는 산소와 보통 수소보다 두배의 질량을 가진 수소가 결합한 물로 보통 물보다 밀도가 높다. 다중수는 폴리워터로 불리는데 하나의 수소 원자에 산소원자가 2개 붙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끈끈하고 얼지 않으며 높은 비등점을 가지는 등 특이한 특성을 보인 다. 크립키는 이 물질이 보통의 물과는 외적 특성에서 다르지만 물과 동일한 실체라고 보았 다. 크립키(1972, 번역본(1986)), p.145
206) 직접지칭에 대한 비교적 간단한 언어적 사실로부터 출발한 크립키의 이론이 과연 어떻게 이러한 형이상학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지 자체는 물론 따져볼 만한 물음이다. 이에 대한 솔먼의 연구를 보라. 솔먼(1981, 번역본(2000))
분명히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대상인지 정체를 규명할 수 없는 대상 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본고는 실제 사물에서도 동일성의 결정이 퍼지적인 경우들이 있으니 허구적 대상에서의 모호함이 문제 가 되지 않는다는 정도의 약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207) 허구적 대상은 쓰레기 더미나 균류(fungi) 같이 동일성 조건의 제시가 특별한 어려움을 제기 하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우리는 본질적 속성 집합의 조건 및 상세한 목록을 제시하였다.
제시한 목록의 명세는 하나의 가정적 모형으로서 시도된 것이다. 명세는 훨 씬 더 정교화될 수 있다. 준핵심 속성들에 대한 설명에서 원래 속성들을 ‘상당 량’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변이를 보이는 항목의 숫자만으로 본래 대상의 동일성으로부터의 이탈을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 뿐 아니라 질 적인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최대한 후자의 요소 또한 객관적으 로 나타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각 요소가 얼마만큼의 변이를 보이는지 그 정 도를 수치화하거나, 또 각 요소가 대상의 동일성에 기여하는 정도를 더 세분 해서 위계를 정해 그에 따라 가중치를 분배하고 그 가중치에 변이의 정도를 곱한 수치로써 대상이 본질적 속성의 어느 정도를 인코드하고 있는지를 표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치상에 의미있는 변별점이 나타난다면, 이러한 방식 이 위의 9가지 분류보다 더 효과적으로 퍼지적 본질의 경계를 나타내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속성이 본질적 속성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할 방법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복잡하다거나 그 방법을 적 용하더라도 구분이 쉽지 않다는 것이 곧 그러한 구분 자체가 없음을 의미하지 는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철학자들의 복잡한 논의나 현실성 없는 공상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색가들은 각본을 위해, 원작의 인물, 플롯을 완벽 하게 분석해서 어떤 것을 그대로 살리고 어떤 것에 변화를 줄 지 고민할 것이 다. 중요한 속성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면서 그들은 캐릭터의 동일성을 확보 해주는 본질적 속성들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앞서 제시한 위계적 목록을 실제로 적용해보면 본질적 속성들과 그렇지 않 은 속성들과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반대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I, II, III 속성 상호 간에는 이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면밀
207) “동일성에서의 그런 퍼지함은 확실히 허구적 캐릭터에만 특유한 것은 아니지만 식물 군집 의 다루기 곤란한 개별화를 근거로 그것을 우리의 존재론에서 허용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거 의 없을 것이다.” 토마슨(1999), p. 69. 토마슨은 주로 허구적 대상이 의존하는 존재자들에의 연결이 유지되는지를 캐릭터 동일성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즉 <혼합논제> 가운데 체하기 요 소에 치중한다. 토마슨, Ibid., ch.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