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허구적 대상에 대한 양상 문장의 해석 /170
2. 일반적인 양상문장에 대한 해석 /174
2.1. 분석성 자료 비판 /174
다른 식으로 행동했더라면, 즉 문제의 체하기 행위-타입의 사례화를 야기하지 않았다면 홈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가 작품이 의존하고 있는 물리적 대상과 인과관계를 맺음으로써-텍스트 를 이루는 의미론적 표현들을 물리적 수단을 통해 기재함으로써- 작품을 창조 하며 캐릭터는 이 작품의 스토리에 의해 이러저러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규 정된다는 점, 다시 말해 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작가와 허구 캐릭터 간에 일정한 인과적 연결이 성립된다는 점을 지적했을 때(II장 2.2.3 절), 우리의 이론은 이미 허구적 대상을 경험적인 인과 사슬 가운데에 들여옴 으로써 이 대상의 존재가 우연적임을 암시했다고 하겠다. 그것은 일상적인 세 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은 하나의 철학적 논변으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허구 인물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커리의 지적이다. 초본질주의는 볼토리니가 ‘분석성 자료’라 고 부른 생각과 일치한다.
관련 이야기가 허구적 존재자가 어떤 속성을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다고 말 하거나 그걸 함축한다면, 그 존재자가 문제의 그 속성을 가지는지 아닌지 물 어보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이 분석성 자료가 말하는 바이다. 이야기가 해당속 성을 가졌다고 말한다면 문제의 속성을 가지는가에 대한 대답은 사소하게 ‘그 렇다’가 되고 그런 속성이 없다고 말한다면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사소하 게 ‘아니오’가 될 것이다. 결국 허구 속에 나오는 ‘F가 P이다’란 문장은 전부 분석적 참이거나 분석적 거짓이 된다. 이에 따르면 다음의 양상문장들도 모두 거짓이 된다.
(7) 홈즈는 탐정이 아닐 수 있었다.
(8) 햄릿은 폴로니우스를 죽이지 않을 수 있었다.
허구 속에서 제시된 아무리 사소한 사항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9) 홈즈는 베이커街 221C에 살 수도 있었다.
도 거짓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직관은 이와 다르다. (6),(7)이 거짓인 게 자명한 것 만큼이나 (9)가 참임도 확실한 것 같다. (8)에 대해서는 일단 판단을 보류하기로 하자.
분석성 자료는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상한 결과를 가져온다. 즉, 이 생각이 맞다면, (8)을 말하는 것이 원이 둥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원이 결코 둥글지 않 을 수 없는 것처럼, 햄릿이 폴로니우스를 죽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즉 햄릿이 폴로니우스를 죽인다는 것은 필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필자는 물론 이 사건이 <햄릿>의 핵심적 줄거리를 구성하며 따라서 앞장에서의 기준에 따라 본질적 속성집합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8)은 참이 아니다. 그 럼에도 많은 비평가들이 의미 있게 이런 말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IV장 3 절에서 그 해법을 찾아볼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8)을 말하는 사람이 거 짓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결혼한 총각’ 같은 의미상의 모순을 일으키는 것으
로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36) 분석성 자료는 우리가 허구적 캐릭터에 대한 어떤 종류의 반사실적 가정들도 모두 거짓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허구적 대상에 관한 양상문장들이 전부 동일하게 처리되어야 한다는 주 장은 부당해보인다.
물론, 필자가 햄릿이 이러저러하다고 한 말에 대해선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 의미가 있어도, 셰익스피어가 햄릿이 덴마크 왕자라고 썼다면 그에 대해 정말로 그렇냐는 물음은 아예 제기되지도 않는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237) 그러나 ‘분석성’이란 말은 이런 직관을 넘어 허구적 이름을 특정 대 상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닌 ‘책상’이나 ‘원’ 같은 보통명사로 생각하는 함축을 가질 수 있다.238) ‘분석성’이란 말이 한 용어의 의미, 개념에 대한 것임을 생 각할 때, 분석성 자료가 “햄릿이 덴마크 왕자다”란 문장을 “책상은 공부할 때 에 앞에 놓고 쓰는 상이다”처럼 보통명사의 뜻을 분석하는 문장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허구적 이름들은 결코 뜻이나 관념 에 대한 것이 아니며, 또한 보통명사처럼 뜻이나 관념을 거쳐야만 지시할 수 있는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고유명들처럼 대상에 직접 부착된 이름이 다.239)
236) 칸트의 분석/종합판단의 구분에 따르면 '분석판단'은 '물체는 연장(延長)을 갖는다'와 같이 주어의 개념에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판단으로, '종합판단'은 '물체는 무게를 갖는다' 와 같이 주어의 개념에 술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판단으로 정의된다. 즉 주어의 의 미를 분석함으로써 술어 개념을 이끌어낼 수 판단이 분석판단이다. 결혼한 총각’이란 말은
‘총각’이란 말이 가진 개념-결혼하지 않았음-을 부정하는 술어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의미상 모순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볼토리니는 분석성 자료를 옹호하면서, 이 분석성이 문장이 그 의 미 덕분에 참이 된다는 콰인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위와 같은 칸트적 의미에서도 성립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볼토리니(2010), ch.1 한편 볼토리니는 불완전성과 분석성 자료가 서로 역관 계에 있다고 이야기한다(Ibid., p.21). 불완전성 자료는 관련 이야기가 해당 속성을 허구적 대 상이 가지는지 아닌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경우, 그 속성의 유무를 묻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 을 의미하는 반면, 분석성 자료는 이야기가 속성의 유무를 지정하는 한, 캐릭터가 그 속성을 가지는지 아닌지를 묻는 게 역시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237) 하크(1978, 번역본(1984)) p.94
238) 실제로 마틴과 샤츠(1974)에서 이런 생각이 제안된다. 그들은 허구적 이름이 일반용어 (general term)로서, 햄릿에 관한 문장의 참이 세익스피어가 이러저러하다고 썼기 때문이라 는 분석성이 그레이엄 벨이 만든 전화기에 대한 정의-음성을 전기적 파동으로 전환시켜 먼 곳까지 전달한 후 다시 음성으로 전환시키는 도구-로 인해 오늘날의 전화기의 정의에 대한 참이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소설 속에 나오는 햄릿에 관한 서술들 이 모두 ‘햄릿’의 의미에 대한 약정적(stipultive) 정의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카니(1977)에선 허구를 구성하는 모든 문장들을 약정으로 보게 되면, 그 문장들 간의 함축 관계나 비일관성 등의 논리적 관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 해명될 수 없다고 비판된다.
239) 추상적 인공품으로서의 허구 대상에 어떻게 고유명의 지칭 메카니즘이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II장 참조.
분석성 자료가 틀렸다는 것은 실제 비평의 관행을 비추어보아도 알 수 있 다. 예컨대 ‘홈즈가 모리아티와의 싸움에서 죽지 않았더라면’240), ‘이반 카라마 조프가 <대심문관> 이야기를 알료샤에게 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반사실적 가 정들은 단순한 공상의 재료가 아니라 문학작품의 캐릭터나 플롯을 분석하는 비평에서 실제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들이고 우리는 이것이 ‘작가가 해당사 항을 다르게 썼었더라면, 다른 방식으로 소설내용을 전개했더라면’을 의미한다 고 이해한다.241) 또한 보통은 작가가 쓴 서술이 캐릭터에 아주 이상한 성격을 부여하였을 때 그것을 작가가 가진 어떤 구상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지-아마도 전혀 새로운 성격을 창조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작가가 틀렸다고는 생각 지 않지만, 우리는 사실상 비평가들이 이런 캐릭터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점 을 상기할 수 있다. 정말로 허구 안에서 허구적 캐릭터에게 부여된 모든 속성 들은 그에 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분석적 속성들인가?
코난 도일 사후에 생전에 그의 허락을 받아 홈즈 이야기의 속편을 쓴 작가 가 있다고 해보자. 이 작가가 전혀 홈즈답지 않은 행동을 홈즈에게 귀속시켰 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의 작업이 ‘홈즈’라는 캐릭터의 동일성을 깨뜨렸다고, 즉 작가가 ‘잘못’ 쓴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요컨대 작가의 저작행위가 하나의 추상적 대상으로서의 캐릭터를 구축하므로 이 대상의 속성들이 궁극적 으로는 작가의 서술에 의해 부여된 것이긴 하지만, 일단 형성된 대상에 대해 서는 작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서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가령 전혀 개연성 없는 사건 발생과 성격 묘사에 대해 우리는 소설에 나오는 문장에 독 립적으로, “그는 결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 다.242). 즉 하나의 캐릭터에 관해 기술된 모든 속성이 그(것)에 대해 분석적인
240) 이 가정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것이다. 홈즈의 죽음이 <홈즈> 시리즈의 정체성에 있어 결정적인 핵심 사건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홈즈가 죽지 않고 계속해서 <홈즈> 시리즈 에 등장했을 수 있다고 말해도 된다. 물론 이때의 홈즈는 그전 시리즈들의 홈즈와 동일성이 아닌 유사성으로 묶인 홈즈이다. 다음 단락에서 홈즈의 캐릭터 동일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도 사실은 하나의 전체홈즈로 묶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는 의미이지 엄밀한 의미에 서의 동일성이 깨진다는 말이 아니다. 독립적인 각 에피소드들의 캐릭터간 관계에 대해서는 III장 4.3.1절 참조.
241) 가능세계 의미론의 관점에서 말하더라도, 이는 사람 햄릿이 이러저러한 차이를 보이는 특 성을 갖추고 있는 세계들이 결코 아니다. 허구적 대상에 대한 본고의 고정지시 관점에서는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각각의 가능세계에 조금씩 다른 속성들을 가지는 햄릿 캐릭터 및 이 캐릭터를 포함하는 작품 <햄릿>이 있다.
242) 허구작품에 직접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그 소유가 명시된 속성들로부터 함축되는 속성들을 가려낼 때 현실세계의 법칙들이 적용됨을 앞에서 지적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법칙들 에 어긋나는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사건전개를 비판하게 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 편에서 묘사된 알렉산드라 리플리의 ‘스칼렛 오하라’ 캐릭터에 대한 비평가들의 불만을 그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