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소프트웨어이며 사람들에게 이용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아무리 기능이 뛰어나고 안정적인 소프트웨어 네트워크를 갖추어도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글’이 20여 년 동안 존재해 온 이유는 그동안 꾸준히 이용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글’이 인간 행위자들과 형성한 네트워크가 있으며, 그 핵심 행위자는 불법복제였다.
“글 1.0이 나왔을 무렵부터 글 사용자들이 모두 정본을 구입했다면, 나는 떼부자가 됐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보급됐던 컴퓨터가 약 150만 대, 이 중 100만 대에만 정품 글이 깔려 있었다고 하자.(대부분 당시 국내 컴퓨터의 90% 이상에는 글이 깔려 있다고 봤다.) 제품 가격이 4만7천 원이었고, 1개 팔 때 1만 원의 이익만 돌아온다 해도 무려 100억 원의 순수익이 들어오는 셈이다.”(이찬진, 1995, 44~45쪽)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한 이찬진의 회고와 같이 ‘글 1.0’은 출시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끌었지만, 실제 정품으로 판매되는 비율은 굉장히 낮았다.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글’이 무료로 배포됐다는 인식까지 있을 정도로 불법 복 제가 횡행했다. 소프트웨어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던 시기로, 컴퓨터 판매업자들은 컴퓨터를 구매하면 서비스처럼 불법 복제된 ‘글’을 설치해줬다.
‘글 1.0’에는 복제 방지 장치를 설치했지만, 출시한지 얼마 안 돼 ‘락(lock)’
이 풀리면서 무제한 복제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1989년 ‘글 1.0’이 출시된 이후 정품으로 팔린 것은 4만 5천여 개였다. 불법으로 복제된 것은 그 25배에 달하는 약 120만 개로 추정된다.
‘글’을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100억 원의 순수익이 사라진 것이지만, 불법 복제는 ‘글’이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글’은 불법복 제를 통해 수많은 인간 행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다. 1989년 당시 전체 PC 150만 대 중 90% 가량에 ‘글’이 설치된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아직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측은 회사 설립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러브리 컴퓨터’19)라는 중소 유통회사를 통해 생산과 유통, 판매 까지 일괄적으로 담당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놀라운 결과다. 자발적으로 ‘글’
의 우수함을 선전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알린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했기에 가능 했던 일이다. 불법 복제판을 무료로 끼워 넣어준 컴퓨터 판매원들, 친구들에게 제품의 우수성을 홍보했던 학생들 등 이들 모두는 ‘글’ 네트워크에 수많은 행 위자들을 동원한 핵심 행위자들이었다. ‘글’은 불법 복제라는 불법적이지만 상당히 낮은 수준의 의무통과점으로 인해 수많은 인간 행위자들을 ‘글’ 네트 워크에 동원할 수 있었다.
구분 ‘글’ 매출 공공기관 비중 기업고객 비중 개인고객 비중 시장 점유율
2009년 382억 원 62% 33% 5% 18%
2010년 396억 원 62% 36% 2% 19%
2011년 422억 원 61% 28% 11% 18%
2012년 483억 원 63% 28% 9% 18%
<표 15> ‘글’ 제품의 부문별 매출 비중
※ 출처 : ‘한글과컴퓨터’ 사업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
<표 15>와 같이 현재 개인이 ‘글’을 구매하는 비중은 굉장히 낮다. 하지만, 개인 PC에서 ‘글’이 설치돼 있지 않은 경우를 보기는 힘들다. 불법 복제를 통해 기존에 형성됐던 ‘글’ 네트워크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며,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글’이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은 공식적 으로 국가 표준 문서 파일 포맷은 아니지만, ‘글’이 공기업과 관공서 등에서 널리 쓰이면서 사실상 국가 표준처럼 쓰여 왔다. 공공 문서 표준 정립을 위해 개방된 국제 표준을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배성 훈‧이승현, 2010), 이전 자료를 참고할 일이 많은 공공기관의 특성상 ‘글’은 여전히 필요하다. 1992년 출시된 ‘글 2.0’이 당시 행정전산망용 워드프로세 서로 사용되던 ‘하나워드’ 파일과의 호환 기능을 제공하면서 ‘글’이 행정전산 망용 워드프로세서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공공기관 문서의 대부분 이 ‘글’로 작성됐다. 윈도우용 ‘글’이 호환성에 문제를 드러내면서 일반 이 용자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공공기관은 ‘글’을 행정전산망용 워드 프로세서서로 꾸준히 사용했다. 여기에는 ‘글’이 순수한 국내 기술로 만들어 19) 원래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컴퓨터를 조립해서 판매하는 회사로 출발했으나, ‘글’ 출시
시점부터 소프트웨어 유통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진 워드프로세서라는 점과 국산 소프트웨어를 살려야 한다는 논리가 작용했고 이 논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리가 유지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글’이 ‘국어 정보화’와 관련한 인간 행위자들과 형성한 네트워크가 있었다. 국어 정보화는 “인간과는 달리 연 상 능력이나 추론 능력이 없는 컴퓨터에 인간의 다양한 언어 이해 능력과 생성 능력을 컴퓨터에 이식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언어 자료(말뭉치)와 언어 정보(단 어, 지식, 문법 체계 등)를 제공해 컴퓨터가 언어 능력을 갖게 하는 일”(홍윤표, 2012, 33쪽)을 말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을 모두 컴퓨터에 구현해 야 하는데, 컴퓨터 자체가 영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한국어 구현에 있어 서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옛한글 처리, 둘째, 구결20) 문자, 셋째, 한 국에서 사용되는 한자 처리, 넷째, 자주 사용하는 각종 기호 처리 문제다. 이러 한 문제들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하기에 국어 정보화와 관련된 사안은 정부 주도로 국어 학계, 소프트웨어 업체들과의 협업 을 통해 꾸준히 진행돼 왔다. 현재도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 국어원의 주도로
‘21세기 세종계획’이 국어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 중이다.
기능 제공자 및 소유권 기능 제공자 및 소유권
국어/영한/한영 사전
민중서림,
㈜한글과컴퓨터
제2수준 한자 및 글꼴
서울대 중문과 허성도 교수
한일/일한 사전 ㈜한글과컴퓨터 맞춤법 검사기 부산대 컴퓨터공학과
권혁철 교수 한글 유의어/반의어
사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김광해 교수
두벌식 한영 자동 변환 기능
항공대 컴퓨터공학과 이긍해 교수
인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세벌식 옛글 자판
부산대 컴퓨터공학과
김경석 교수
<표 16> ‘글 2010’에 포함된 기능과 소유권
‘글’은 국어 정보화와 관련한 인간 행위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문제를 해 결해 주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외국에 살고 있는 해외 동포들도 국어 작 성을 위해서 ‘글’을 익힐 정도”21)로 ‘글’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언어생활을 지배하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컴퓨터에서 쉽고
20) 한문을 읽을 때 한문의 단어 또는 구절 사이에 들어가는 우리말. 주로 문법적인 관계를 표시하는 형태들로 한자음을 차용하여 쓰기도 한다.
21) 홍윤표 연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와의 심층 인터뷰 내용.
높은 수준으로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글’이 선택된 것이다. 국어정보화와 관련한 인간 행위자들은 ‘글’의 개발 작업에도 참여했다. ‘글’의 개발자들은 프로그래밍에는 능숙했지만, 한글 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 2.0’이 대규모 성공을 거두는데 크게 일조한 맞춤법 검사를 위한 기능은 부산대 컴퓨 터공학과 권혁철 교수가 제공한 것이다. 한글 정렬 기능은 고려대 국문학과 김 흥규 교수가 제공했으며, HNC 20 코드에 추가된 옛한글 자료는 당시 연세대 국문학과 홍윤표 교수가 제공했다. 구결 글자 자료는 단국대 국문학과 남풍현, 이건식 교수 등이 주도한 구결학회에서 제공했으며, 한국에 자주 쓰는 한자 자 료는 서울대 중문학과 허성도 교수가 제공했다22). <표 16>에서 보듯이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2. 현재 시점에서 ‘글’의 인간-소프트웨어 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