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수준으로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글’이 선택된 것이다. 국어정보화와 관련한 인간 행위자들은 ‘글’의 개발 작업에도 참여했다. ‘글’의 개발자들은 프로그래밍에는 능숙했지만, 한글 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 2.0’이 대규모 성공을 거두는데 크게 일조한 맞춤법 검사를 위한 기능은 부산대 컴퓨 터공학과 권혁철 교수가 제공한 것이다. 한글 정렬 기능은 고려대 국문학과 김 흥규 교수가 제공했으며, HNC 20 코드에 추가된 옛한글 자료는 당시 연세대 국문학과 홍윤표 교수가 제공했다. 구결 글자 자료는 단국대 국문학과 남풍현, 이건식 교수 등이 주도한 구결학회에서 제공했으며, 한국에 자주 쓰는 한자 자 료는 서울대 중문학과 허성도 교수가 제공했다22). <표 16>에서 보듯이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2. 현재 시점에서 ‘글’의 인간-소프트웨어 네트워크
해 12월에는 ‘넥스젠 캐피탈’이 다시 인수했다. 그 뒤 불과 두 달 만에 ‘서울시 스템’으로 대주주가 바뀌었고, 한 달 뒤에는 ‘프라임그룹’이 다시 인수했다. 잠 시 안정을 찾나 했지만, 대표의 횡령 사건 등으로 2009년 7월 ‘셀런에이치’에 인수됐다가 2010년 9월에 소프트포럼에 인수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 서 ‘글’을 만들었던 많은 내부 구성원들이 떠나면서 ‘한글과컴퓨터’ 내의 ‘
글’의 인간 행위자 네트워크는 새롭게 형성됐다.
‘글’ 개발 측면에서 인간 행위자는 ‘한글과컴퓨터’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글’을 이용하고 있는 다양한 인간 행위자들도 ‘글’의 개발 측면에서 네트워크 를 형성하고 있다. <표 17>23)은 ‘글 2010’의 개발 과정에서 외부 전문가들과 일반 이용자들의 기능 요구 사항을 정리한 ‘한글과컴퓨터’의 내부 문서다.
분류 내용 품질의견 마케팅의견 개발의견
툴 박스
차트만 독립적으로 실행해서는 차트를 만들 수가 없음. 차트 기능의 툴박스 배치가 실용적이지 않음
[표]
툴박스에
"차트" 기능 제공 필요
현재 차트는 2007보다 불편함. 추후 판단하겠음.
차트 기능 개발이 완료되면 가능함.
새 탭
"새 탭"으로 열려있는 문서를
"새 창"문서로 전환하는 기능.
반대로 새 창으로 열린 여러 개의 문서를 "새 탭"으로 전환하는 기능 필요.
있으면 편할 것 같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듯. 개발은 엄청 고생할 것 같음.
현재 구현 계획이 없음.
표
지우개를 잘 쓰는데, 아쉬운 것이 있다면, 투명선 만들기 도구가 있었으면 훨 좋지 않을까 싶음.
"선 없음"을 선택한 후 선 지우기를 해야함.
제안
내용대로라면 매우 편리할 듯
현재 구현 계획이 없으나, 추후 검토하겠음.
스크 립트
ActiveX Object으로 버전별로
한글 실행 지원 필요. 지원
불가능함.
캡션 개체(표, 글상자) 안에도 캡션 기능을 빠른 메뉴로 제공 요청
개체 안에서 캡션 삽입이 가능해야 함.
타당한 의견임
개체 선택 상태에서 빠른 메뉴 제공 중.
표 계산
식
계산식에 함수 추가 요청 또는 스크립트 편집 창에 사용자 정의 함수와 표 계산식 연동 필요.
있으면 좋으나, 많이 사용하지 않는 기능임.
지원하는 게 더 타당하리라 여겨짐.
추후 검토 하겠음.
<표 17> 외부 전문가 제안 사항에 대한 ‘글 2010’ 기능 검토 문서
23) <표 17>의 내용은 ‘한글과컴퓨터’ 내부 자료로 수집한 내용 중 공개 가능한 범위로 수 정한 것이다.
‘한글과컴퓨터’는 내부적으로 ‘글’ 제품의 개발 과정에서 다양한 행위자들 을 동원하고 있다. ‘글’의 개발 과정은 상품으로서 ‘글’의 가치 제고를 위해 마케팅 관점에서 시장 조사, ‘글’ 이용자 모임 등에서 제시하는 의견 수렴, 이를 바탕으로 구현 가능한 기능들을 분류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에 서 당연히 ‘글’을 자주 이용하는 조직, 개인, 기관 등 모두가 의견을 개진하 고 ‘글’의 기능 개선에 참여한다. ‘글’을 이용하는 사람은 모두 ‘글’과 네 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인간 행위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글’과 관 련된 모든 측면에서 존재하고 있다. <표 17>에서처럼 이름도 보이지 않는 행위 자들이 ‘글’의 개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글’의 인간 네트워크 행위자는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 행 위자를 찾아내 기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된 ‘글’ 인간 네트워크의 행위자들은 ‘글’이 형성하고 있는 인간 네트워크의 모든 행위자들이라기보다는 대표적 행위자들이라고 할 수 있 다. ‘글’의 인간 네트워크는 불법복제를 통해 네트워크를 확장할 수 있었고, 국어정보화 관련 행위자들의 지원과 그에 따른 공공기관 행위자들의 적극적인 이용으로 현재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글’의 개발 측면 에서 ‘한글과컴퓨터’가 내부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듯 형성한 인간 네 트워크로 인해 ‘글’이 유지돼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한글과컴퓨터’만이
‘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행위자들이 ‘글’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어서 가능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소프트웨어 연구 관점의 해석과 함의
이러한 ‘글’의 인간-소프트웨어 네트워크는 네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 하다. 첫째, 글쓰기 도구측면에서 ‘글’은 여전히 ‘익숙한’ 도구로 받아들여지 고 있다. ‘글’이 처음 출시된 1989년은 우리나라에서 개인용 컴퓨터 보급이 확산되던 시기와 절묘하게 일치했다. 1987년에서 19990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컴퓨터 보급 대수는 무려 14배 증가했는데, 세계적인 개인용 컴퓨터 보급 추세 에 따른 기기 가격 하락과 1989년 문교부가 초중고 교과 과정에 컴퓨터 교과 목을 도입한 것의 영향이 컸다(김상훈‧오정석, 2006). 대부분 불법 복제를 통하 긴 했지만, 컴퓨터를 구입하고 처음 사용하게 된 워드프로세서는 대부분 ‘글’
이었다. 초기부터 사용한 글쓰기 도구로서 워드프로세서에 익숙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 ‘글’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지금 도 2,000만 명이 이상이 ‘글’을 사용자로 파악되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 다. 기능-기능 네트워크에서 ‘글’이 고유한 단축키를 유지하고 있는 배경에는
‘글’의 인간-소프트웨어 네트워크가 있는 것이다.
둘째, 소프트웨어로서 ‘글’은 개발 행위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용 행위 자들의 다양한 실천 행위가 결합돼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표 16>에 봤듯이 ‘글’의 대표적 기능들 중 몇몇은 ‘한글과 컴퓨터’가 만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행위자들이 만든 것을 결합한 것이다.
또, <표 17>에서 봤듯이 다양한 인간 행위자들의 생각들이 ‘글’에 구현되고 있다. 초기 ‘글’은 개발자의 순수 판단만으로 기술적 요소를 산출해 만들었다 면, 현재의 ‘글’은 이용 행위에 기반 해 기술적 요소를 산출해 내고 있다.
‘글’은 기술적 산물이기보다는 ‘글’ 네트워크의 다양한 인간 행위자들이 함 께 만들어 나가고 있는 사회‧문화적 산물이다.
셋째, ‘글’은 인간 행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한글’의 대변인과 같 은 역할을 맡아 다양한 행위자들을 동원했지만, 현재는 점차 그 역할을 잃어가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은 ‘한글’이라는 사회‧문화적 배경을 소프트웨어로 서 반영하면서 컴퓨터에서 ‘한글’ 입력의 대명사처럼 받아들여졌다. 국어정보화 관련 행위자들이 ‘글’의 개선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유다. ‘글’은 하나의 상품이라기보다는 국어정보화에 기여가 큰 사회‧문화적 가치를 지닌 존 재24)였다. 하지만, “컴퓨터 속 한글의 완전한 구현을 위해 ‘글’만의 HNC 코 드를 버릴 것”25)을 거부하고, “워드프로서세들의 문자표를 서로 공개하고 공유 하겠다는 서약”(비표준문자등록센터, 1999, 68쪽)을 ‘글’이 지키지 않으면서 국어정보화와 관련한 행위자들은 ‘글’ 네트워크와 점차 단절됐다. 현재 ‘글’
의 인간-소프트웨어 네트워크에서 ‘글’은 사회‧문화적 가치로서 ‘한글’의 대변 인이라기보다는 ‘한글’ 이용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글’의 현재 인간-소프트웨어 네트워크에는 개발 측면과 이용 측면 행위자의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불법복제의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발 행위자들은 불법복제로 인해 입은 피해로 인해 ‘글’의 네트워크가 더욱 확장되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만, 이용 행위자들은 불법복제로 인한 피해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26).
24) 지난 6월 21일 문화재청은 ‘글 1.0’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한글 정보화에 기여한 기술적·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이유였다.
25) 홍윤표 연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와의 심층 인터뷰 내용.
26) ‘글’ 이용자 모임 관계자와의 심층 인터뷰 내용.
<그림 13> 한국의 불법복제 비율
구분 불법복제 건수 피해액
2008년 9,872 17억 4,200만 원 2009년 11,452 20억 3,100만 원 2010년 13,103 23억 2,400만 원 2011년 16,990 30억 1,300만 원 2012년 5,553 9억 8,500만 원
<표 18> ‘글’의 불법복제 피해액
※ 출처 : BSA ※ 출처 :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 협회
<그림 13>에서 보듯이 ‘글’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약 90%에 달하던 소프 트웨어 불법 복제 비율은 점차 낮아져서 현재는 약 40%이다. 이는 전 세계 평 균 불법 복제 비율인 42%보다 낮은 수치이다. <표 18>은 ‘한글과컴퓨터’도 참 여하고 있는 한국 소프트웨어저작권 협회가 매년 실시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불 법 복제 모니터링 결과다. 2012년 기준으로 ‘글’ 제품의 불법 복제 피해액은 약 10억 원으로 ‘글’ 제품의 2012년 매출 483억 원의 약 2.1%다. 물론, 전 수 조사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피해액은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 출시 초기와 같이 상당한 매출 차질을 빚을 정도는 아니다.
‘글’의 이용 행위자들은 “불법복제만 탓하면서 기능 개선에는 그리 힘쓰지 않 는다”고 비판하지만, 개발 행위자들은 “불법복제로 인해 연구 개발에 온 힘을 기울일 수 없다”고 이용 행위자들을 비판한다.
한편, ‘글’의 인간-소프트웨어 네트워크는 전체 네트워크에서 봤을 때 ‘앙 상블’ 수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몽동(Simondon, 1958/1989/2011)에 따르면 앙상블은 개체 수준을 넘어 기술적 개체들이 느슨한 연결망을 구성한 연합 환경이다. ‘글’을 이용하는 행위자들은 ‘글’이라는 기술적 개체들을 매 개로 해 서로 연합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글’이라는 같은 글쓰기 도구, 같 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한다는 것은 같은 기능-기능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서로 호환이 자유로운 소프트웨어-소프트웨어 네트워크를 형성한 상태에서 명확하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서로가 연결되고 있다. ‘글’이 다양한 인간 행위자들과 형성한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인간 행위자들이 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