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지난 20여 년 동안 문서를 통한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양식 을 규정해 온 미디어라고도 볼 수 있는 ‘글’의 특성은 무엇이었는지를 소프트 웨어 연구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글’은 워드프로세서로서 컴퓨터를 통한 새로운 글쓰기 도구다. 또한, ‘글’은 글쓰기 와 문서 작성이라는 기존 미디어 기술을 소프트웨어화한 응용 소프트웨어로 우 리 사회‧문화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속적으로 변화해오면서 기능적, 문화적으 로 다양한 특성을 보여주었다. 소프트웨어로서 ‘글’은 물리적으로는 컴퓨터에 결합되어 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들과 영향을 주 고받으며 다양한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 는 않지만 사회‧문화적으로 ‘글’이 보여주었던 중요한 역할은 ANT 관점에서 행위자 네트워크로 나타낼 수 있다. 버전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글’의 행위 자 네트워크를 기록하는 것은 지난 20여 년 동안 ‘글’이 형성되어온 과정을 보여주는 유용한 방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ANT 관점에서의 기록은 이미 언 급한 바와 같은 이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다양한 사회‧문화적 맥락 등을 고려한 해석이 필요하다.
즉, 이 연구는 소프트웨어 연구에서 출발해 ANT의 관점을 접목한 후 다시 소프트웨어 연구로 돌아와 해석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사회‧문 화의 새로운 동력으로서 소프트웨어를 입체적, 다층적, 복합적으로 분석하기 위 해 소프트웨어 연구와 ANT를 통합한 새로운 이론적 틀을 제시하는 것이다. 소 프트웨어 연구 관점에서 워드프로세서 ‘글’은 우리 문화의 동력으로서 지난 20여 년 동안 컴퓨터 문화에서 지배적 위치를 유지해 온 소프트웨어였다. ‘
글’은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 소프트웨어’(Manovich, 2013)로서 첫째, 표상, 생각, 믿음, 미적 가치들을 공유하고 접속하는 수단이며, 둘째, 상호작용적 문 화 경험에 참여시키는 도구이며, 셋째, 정보와 지식을 생산 및 공유할 수 있으 며, 넷째, 문서를 중심으로 한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동시에, 다섯째, 온라인 정보 생태계에 참여하는 도구도로 활용되고 있다. ‘글’은 처 음 등장했을 때에는 컴퓨터에서 글쓰기 도구 수준이었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특성 을 지닌 문화 소프트웨어로 진화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글’의 실체를 이론적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진화의 과정을 추적하기 위한 대안으로 ANT 관점
을 소프트웨어 연구에 접목을 시켰고, 그 의미와 함의의 분석을 위해 다시 소 프트웨어 연구 관점에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림 9>는 ‘글’이라는 소프트 웨어라는 분석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연구와 ANT를 통합한 새로운 이론적 틀을 도식화해 나타낸 것이다.
<그림 9> 소프트웨어 연구와 ANT의 통합적 접근을 위한 이론적 틀
첫째, 워드프로세서 ‘글’을 <그림 9>와 같이 소프트웨어 연구 관점에서 소 프트웨어로 규정한다. 이는 워드프로세서와 ‘글’에 대한 선행 연구들의 한계 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다. 선행 연구들은 첫째, 워드프로세서를 소프트웨어가 아닌 컴퓨터와 동일시하며 새로운 글쓰기 도구로 간주하고 있으며, 둘째, 기능 주의적 관점에서 기술 결정론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셋째, 버전에 따라 변 화해 온 ‘글’의 특성이 아닌 특정 시점에 ‘글’이 미친 영향을 수용의 관점 에서 분석하고 있다. 소프트웨어는 한 번에 완성되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 양한 사회‧문화적 요소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진화해 나간다.
이 때 진화의 방식은 자체적으로 기능을 구현하는 것과 다른 소프트웨어와 기능적으로 연계를 맺는 방식이 있다. ‘글’은 소프트웨어로서 기존 글쓰기 기 술을 소프트웨어화한 미디어 귀속적 기능,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기능들인 미디어 독립적 기능, 다른 워드프로세서와는 달리 사회‧문화적 배경을 반영해 만들어낸 미디어 문화적 기능들을 자체적으로 구현하면서 워드 프로세서로서 기능적 완성도를 높여 간다. 워드프로세서로서 기능적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다른 소프트웨어 연계를 통해 기능을 확장한다. 내적 혼종화를 통해 텍스트 외 다양한 미디어 요소들을 부분적이지만 저작, 편집 등이 가능하 게 하며, 다른 문화 소프트웨어들과 연계하는 외적 혼종화를 통해 생존을 위한 경쟁력을 높여 간다. 소프트웨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해야만 하고 이를 위해 소프트웨어는 진화해 가는 것이다. 기능적 우수함 만이 이용을 전제로 한 소프트웨어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소프트웨어의 진화 과정을 기록하고 분석하기 위해 ANT 관점에서 소 프트웨어를 인간과 대칭적인 비인간 행위자로 규정한다. 이는 기존 소프트웨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소프트웨어 연구들은 첫째, 특정 버전을 중심으로만 분석하면서 이용자에게 미친 영향만을 분석하고 있으며, 둘째,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전체적으로 하나의 기능으로 묶고 있으며, 셋째, 소프트웨어의 자율적인 변화에 따른 진화 과정을 분석하지 못하 고 있다. 기존 소프트웨어 연구들은 소프트웨어를 사회‧문화적 실재로는 인정하 지만, 변화의 주체로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의 이용자 관 점이 아닌 자율적인 움직임을 갖는 변화의 주체로서 소프트웨어를 분석하기 위 해 대안적으로 ANT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또한, ANT 관점에서 소프트웨어가 진화의 과정에서 형성한 행위자 네트워크 를 세 층위로 구분해 분석한다. 이는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네트워크 분석에 머무르고 있는 ANT 관점의 기존 연구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적 대 안인 동시에, 소프트웨어의 특성에 따른 다층적 네트워크 분석이기도 하다. 소 프트웨어의 기능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인쇄 기능은 문서 작성 기능과 관계 를 형성하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다. 다른 소프트웨어들과 관계를 형성하지 않 으면 소프트웨어 자체가 작동할 수 없다. 운영 체제 없이 작동할 수 있는 소프 트웨어는 없다. 기능-기능 네트워크, 소프트웨어-소프트웨어 네트워크를 바탕 으로 소프트웨어는 다양한 인간 행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 한 다층적 네트워크 형성 과정은 역동적이며, 소프트웨어의 버전에 따라 두드 러지는 네트워크가 등장할 수 있다. ANT 관점에서 소프트웨어의 다층적 네트 워크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은 자율적인 움직임을 갖고 진화하는 주체로서 소 프트웨어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방법론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셋째, ANT 관점에서 ‘글’의 행위자 네트워크, 즉 버전에 따른 진화 과정을 기록한 뒤 이를 다시 소프트웨어 연구 관점에서 해석한다. ANT는 번역, 네트 워크, 행위자, 매개자, 기입 등 다양한 개념들을 통해 교호 과정을 기록한다.
하지만,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가 실제로 만나서 번역을 하고 네트워크
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비인간 행위자는 인간 행위자와 같은 실제 행위 능력 을 갖고 있지 않다. ANT가 비인간 행위자에게 행위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비 인간 행위자로 인해 인간 행위자들이 이전과는 다른 지향성을 보인다는 점을 연구자의 입장에서 강조하기 위해서다. 비인간 행위자의 행위 능력은 연구자가 부여하는 것이다. ANT의 개념만으로 모든 과정을 기록하면 오독의 여지가 생 길 수 있다. 충분한 해석이 없다면 비인간 행위자가 실제 행위를 한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전에 따른 ‘글’의 진화과정을 ANT 관점에서 기록하지만, 그 해석은 소프트웨어 연구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소프트웨어 연구 관점의 해석이 갖는 함의를 그 당시 사회‧문화적 맥락 을 고려해 분석한다. 풀러(Fuller, 2003)가 지적하듯이 소프트웨어 연구는 기존 학문의 이론, 연구방법을 계승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글’에 새롭게 등장한
‘하이퍼링크’ 기능, 지금은 사라진 ‘덧실행’ 기능 등이 갖고 있는 함의는 단순히 소프트웨어 연구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MS 워드’ 등 경쟁 워 드프로세서와의 차별화를 위한 기능일 수도 있고, ‘글’의 개발사인 ‘한글과컴 퓨터’ 내부 사정이 반영된 기능일 수도 있다. ‘글’이 기능이 사회화되는 것으 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글’은 사회‧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 사회‧
문화적 맥락을 배제하고는 분석할 수가 없다. 또한, ANT만으로는 모든 것을 분석하고 설명할 경우 갖게 되는 이론적 한계점을 소프트웨어 연구 관점의 해 석을 통해 보완하는 것이다.
주로 기능적, 산업적 연구에 머물러 있던 워드프로세서 ‘글’에 대한 선행 연구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 연구는 소프트웨어 연구와 ANT를 통합한 새로운 이론적 틀을 제시했다. ‘소프트웨어 연구→ANT→소프트웨어 연구’라는 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면서 각각의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회‧문화적 실재”로서 소프트웨어가 버전에 따라 진화해 오는 과정 을 분석해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사회‧문화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 온
‘글’을 입체적으로 분석하려는 것이다. 소프트웨어 연구는 다학제적 분야로 기술적 시스템과 인문학적 관점, 사회학적 관점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컴퓨터 문화가 일상생활을 재정의”(Truscello, 2003)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컴퓨터 문 화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소프트웨어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것이 갖고 있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풍부하게 해석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이다. 5장에서는 이러 한 이론적 작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법론적 방안을 모색해 본다. 소프트웨어 의 다층적 네트워크를 자의적이라는 ANT의 한계를 극복하고 서술할 수 있는 방안이다.